제193화
….
제로와 죽음.
그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런 둘의 시선이 허공에 교차하는 순간, 무형의 압력이 외차원의 틈새에 휘몰아쳤다.
제로와 죽음.
그 둘을 중심으로, 주변의 대지가 움푹움푹 내려앉기 시작하며, 틈새 그 자체가 붕괴할 것만 같았던 그때….
“농담이야. 그러니 눈에서 힘 좀 빼지?”
“후….”
양손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죽음에 제로가 낮은 숨을 토해냈다.
자신이 초월자, 진정한 의미의 오버 데스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죽음이다.
자신과는 격이 다른 존재.
굳이 따지고 보자면 자신은 죽음의 권속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굳이 죽음과 척을 질 마음은 제로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대체 저건 뭐지?”
슬쩍 시선을 돌린 제로가 입을 열었다.
그런 제로의 시선과, 흑골의 손가락은 멀뚱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지 다하카에 꽂혀 있었다.
“저것의 이름은 아지 다하카. 다른 말로는….”
“외차원의 마룡.”
“맞아.”
제로의 중얼거림에 죽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런 죽음의 대답에도 찌푸려진 제로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저것의 진정한 정체야. 그런 두루뭉술한 정보가 아니라.”
“흐음. 진정한 정체라. 그렇게 말해도 외차원의 마룡은 외차원의 마룡이고. 아지 다하카는 아지 다하카야.”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진실을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듯, 장난스레 입을 여는 죽음에 제로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은은한 짜증마저 내비치는 제로에, 죽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겠어, 알겠어. 그러니까…, 네가 알고 싶은 건 아지 다하카가 정확히 ‘무엇’이냐 이거지?”
끄덕.
죽음의 물음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해. 아지 다하카는 외차원의 방위선이야. 허락받지 않은 존재가 외차원에 침입하면, 그 침입자를 격퇴하는 거지.”
“그렇다는 말은…?”
“아지 다하카를 알고 있는 존재들은, 그 강대한 힘에 경외와 공포를 담아 외차원의 마룡이라 부르지만. 실상은 단순한 생물병기에 불과해. 그것도 내가 만들어 낸.”
이어진 죽음의 대답에 제로가 입을 다물었다.
평범한 존재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설마하니 죽음이 직접 만들어 낸 존재라니.
그런 생각을 품은 제로가 슬쩍, 다시 한번 아지 다하카를 훑어봤다.
세 개의 머리에 달린, 똘망똘망한 세 쌍의 눈동자는 어린 강아지의 눈을 연상시킨다.
겉모습은 흉악하기 이를 데 없으나, 그 속은 순진무구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저런 존재가….
‘외차원의 방위선이니. 외차원의 마룡이니 라고 불리다니. 아니, 나이기에 그렇게 보이는 건가.’
“그럴걸?”
제로의 생각을 읽은 죽음이 입을 열었다.
그에 제로의 미간이 불쾌감을 찌푸려졌다.
틈새라고는 해도 이곳은 외차원.
죽음은 그러한 외차원을 지배하는 존재이다.
아니, 정확히는 죽음이 존재하기에 외차원 또한 존재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즉, 외차원 내부에선 제아무리 제로라 하더라도 죽음에게 그 무엇 하나 숨길 수도. 죽음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도 없었다.
“그럼 사룡 덴드로는 뭐지?”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야. 사룡 덴드로 또한 실존하는 존재이며, 명계의 파수꾼이지. 나는 그것의 외형을 잠깐 빌렸을 뿐이야.”
“즉, 그 말은 사룡 덴드로라는 껍데기를 만들고, 그 속에 아지 다하카를 봉인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룡 덴드로를 다시 한번 심장에 봉인시키고, 그것을 나에게 건넸다?”
“정확해!”
제로의 말에 죽음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그런 죽음의 반응에, 제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도대체 왜?
어째서 그런 번거로운 짓을 벌인 것일까?
제로가 속으로 그러한 생각을 품자, 그 생각을 읽은 죽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간단하게 생각해. 딱히 복잡할 건 없어. 넌 강해지길 원했고, 이제는 내 권속이 되었어. 나를 제외한, 단 한 명뿐인 외차원의 주민이 된 거지. 그 의미로 너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전해줬을 뿐이야.”
자그마한 선물.
자그마한….
“자그마한 선물이라.”
제로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외차원의 마룡, 아지 다하카.
그것의 강함을 직접 본 제로는. 그것을 ‘자그마한 선물’이라고 칭하는 죽음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비쳤다.
죽음을 제외한다면. 그 누가 과연 아지 다하카를 ‘자그마한 선물’이라 칭할 수 있을까.
한편….
“그래서. 궁금한 건 이게 끝?”
“일단은.”
죽음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제로가 주변을 훑어봤다.
외차원의 틈새는 어느새 붕괴하고 있었다.
틈새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아지 다하카.
그리고 흑의 대장군 베르젤라와 제로의 전투로 인해 한계 이상의 데미지를 받아버린 탓이다.
제로는 점차 붕괴가 가속화되어 가는 외차원의 틈새에, 손을 내리그었는데.
그에 제로 앞의 공간이 갈라지며 그 너머로 지구가 비쳐보였다.
죽음은 망설임 없이 지구로 몸을 날리는 제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건 이제 네 거야. 나한테는 딱히 필요 없거든. 언제든지, 어느 때든. 네가 저것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면 저것은 언제까지나 너의 힘이 되어줄 거야. 물론….”
‘네가 외차원의 주민으로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이야.’
그러한 죽음의 말을 들은 제로의 신형이 순식간에 갈라진 공간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 * *
스스로를 흑의 대장군 베르젤라라 칭한 허상괴가 나타났던 장소.
그리고 뒤늦게 나타난 제로가 베르젤라와 사라졌던 장소이기도 한 그곳에 수십만의 플레이어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고르고 골라 선별한 정예 플레이어들이다.
제로가 베르젤라와 사라진 뒤 흐른 시간이 벌써 일주일.
제로의 강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해 십강의 길드 마스터들이 플레이어들을 소집했다.
그렇게 플레이어들이 사뭇 긴장 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때….
“저, 저길 봐!”
“공간이 갈라진다!”
상공 수 킬로미터 위.
구름에 가려져, 상위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시야에 들어오지조차 않는 그곳의 공간이 점차 갈라졌다.
천천히 갈라진 공간 너머의 풍경은 짙은 어둠뿐이었다.
그 모습에, 갈라진 공간을 바라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과연 갈라진 구멍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무엇일까?
베르젤라에게 승리하고 지구로 돌아오는 제로일까?
아니면 제로를 죽이고 지구를 침공하려는 베르젤라일까.
신성이나 썬더. 마학자와 첸첸 같은 십강의 길드 마스터들조차 긴장 어린 표정으로 구멍을 지켜보고 있을 때….
“뭐하냐?”
오싹-!
찰나의 찰나의 찰나.
무언가 튀어나온다! 라고 깨닫는 순간, 어느새 갈라진 공간이 메꿔지고.
모여 있는 십강의 길드 마스터들의 뒤에서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산하게 퍼져 나가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주변에 모여 있던 플레이어 전원이 엄습해오는 공포에 부르르 몸을 떨었으며….
“합-!”
썬더가 남은 오른팔에 푸른 뇌전을 휘감고, 등 뒤를 향해 일권을 내뻗었다.
그 재빠른 몸놀림은 플레이어들 중, 가장 빠르다 여겨지는 썬더다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쩌엉-!
내뻗어진 썬더의 주먹은 반투명한 막에 막혔다. 그 막 뒤에 서 있던 제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이게 뭐 하자는 거냐?”
“제… 로…?”
“그럼 내가 뭐로 보이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썬더에, 제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썬더의 반응도. 주변 플레이어들의 반응도 딱히 이해 못 할 것은 없었다.
자신이 아닌 베르젤라가 튀어나온 것이라 착각하고, 반사적으로 공격을 한 것이겠지.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정권을 날렸던 썬더가 하하-! 하는 웃음과 함께 털석 주저앉았다.
이로써 지구를 위협하는 최흉의 재앙은 사라졌다.
그 누구도 아닌, 최강의 플레이어라 불리는 제로에 의해.
“지구도 이제 안전해…!”
“안전? 아직 아니야.”
제로의 승리를 축하하고, 만끽하며 신성이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제로가 입을 열자, 기쁨에 취해 있던 플레이어들 사이로 싸늘하면서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로 님…? 그게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야. 지금부터가 본 게임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가 슬쩍 하늘 위를 올려봤다.
그런 제로의 시선이 닿은 장소에는 망자의 거성이 자리 잡은 부유섬. 그리고 그 옆에 자리 잡은, 허상괴와 통하는 통로나 다름없는 구멍이 내비쳐졌다.
“그 말씀은…?”
“진짜가 찾아온다.”
불안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는 신성에, 제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방금 내가 처리한 놈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지구에 나타난 허상괴들은 모두 선발대라 할 수 있어.”
그게 무슨!
그 정도의 숫자가! 그 정도의 강함이 선발대라니!
말도 안 돼!
충격적인 제로의 한마디에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술렁였다.
몇몇 플레이어는 참을 수 없는 공포심에 발작까지 일으켰는데, 그에 썬더가 쾅! 하며 발을 내리찍었다.
“모두 조용!”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썬더의 목소리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백에 술렁이던 플레이어들이 단숨에 침묵했다.
“우리는 플레이어다! 인류의 영웅이다! 그런 우리가 고작 괴물 따위에게 겁을 집어먹어서야 되겠느냐!”
마, 맞아!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난 죽을 수 없어!
난 사랑하는 연인과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고!
썬더의 외침 덕분일까.
아니면 그의 말이 플레이어들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주변을 잠식해 나가던, 공포에서 파생된 혼란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또한! 우리에겐 제로가 있다! 명실상부 최강의 플레이어! 학살자 제로가 말이다! 그를 믿어라! 그리고 우리를 믿어라!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힘을 믿어라! 우리들이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지구를 지킬 수 있을 거다!”
다시 한번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썬더의 외침에,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며 전의를 다졌다.
제로는 그런 플레이어들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슬쩍, 다시 구멍을 바라봤다.
‘자 와라.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 * *
“때가 되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여는 왕의 손바닥 위로 세 개의 구체가 두둥실 떠다녔다.
그 안에는 각기 가이아가 관리하는 시작의 나무 위그드라실. 태초의 빛의 첫 번째 자식인 루시엘의 힘. 마지막으로 태초의 어둠의 첫 번째 자식이자, 그런 루시엘의 반신이라 여겨지는 베르젤라의 힘이 담겨 있었다.
왕은 그런 세 개의 구슬을 망설임 없이 집어삼키며 그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쿠르르-!
무수히 많은 시체로 쌓아 올린 왕좌에서 몸을 일으키는 왕은, 마치 거대한 산맥 하나가 통째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렇게 몸을 일으킨 왕의 앞으로는 몇 남지 않은 군단장. 그리고 수백억 그 이상에 달하는 허상괴들이 포진해 있었다.
“때가 되었노라.”
“지루한 유희의 끝을 장식해 보자꾸나.”
그러한 말을 내뱉은 왕이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대지가 쿵! 쿵! 하고 울리며, 바닥이 요동쳤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 나간 왕이 멈춰 선 장소는 눈앞에 자리 잡은 구멍이다.
지구와 통하는 연결통로인 그것은 상당히 거대했으나, 왕이 통과하기에는 사뭇 작았다.
그에 왕은 망설임 없이 구멍을 향해 양손을 내뻗었다.
동시에….
파지직-!
왕의 손이 양옆으로 벌어지자, 구멍 또한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작았던 공간이 드높은 산만큼이나 거대해지며….
“진격하라.”
허상괴들을 향한 왕의 명령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