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쩌억-!
저벅. 저벅. 저벅.
가시나무 덩굴로 이루어진 고치가 갈라지며, 그 속에서 가이아가 걸어 나왔다.
변화를 끝낸 가이아는 말 그대로 여신, 그 자체였다.
허리까진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녹색과 갈색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제로를 향해 빛나는 그녀의 두 눈동자는, 마치 아름다운 호박색 보석을 연상시킨다.
전신은 새하얀 실크로 짜여진 드레스를 걸쳤다.
그런 그녀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올 때마다 그녀의 발자취가 묻어 나오는 대지에 식물이 피어나고, 나무가 자라났다.
지금의 가이아는 신화 속에 나오는, 대지의 어머니. 혹은 생명의 여신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다.
“어떤가요?”
쿠구구-!
단순히 입을 열었을 뿐임에도, 막대한 존재감이 무형의 압력을 만들어 사방을 짓눌렀다.
그 압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천장을 이곳저곳 누비며 필사적으로 생존자들을 구출하던 첸첸과 마도왕의 몸이 휘청거렸다.
“저건…, 말 그대로 신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겠어.”
마도왕이 슬쩍, 가이아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가이아의 외형은 상당히 아름다웠지만, 마도왕의 눈에는 단순한 괴물. 혹은 이치를 벗어난 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편, 그러한 마도왕의 중얼거림을 들은 첸첸 또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신이라면…, 그녀에게 대적하는 제로 또한 신이 아닐까요?”
자신이 생각해도 실없는 말을 뱉은 것일까.
그렇게 말한 첸첸이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도와주려 했는데…, 우리가 개입해 봤자 방해만 되겠군.”
“저희는 저희의 일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에요.”
그렇게 말한 첸첸이 호문쿨루스의 등에 업혀 움직였다.
이제 남은 고치의 숫자는 수천.
몇 분만 더 고생하면 모든 생존자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 * *
“왜 말이 없으신 건가요? 설마 제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버린 것은 아니겠지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가이아에, 제로가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네가 허상괴임은 변하지 않아.”
“허상괴… 라.”
제로의 말에 가이아가 슬며시 중얼거렸다.
“확실히 당신의 눈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말이에요. 그거 아시나요? 저와 같은 대장군들은, 당신이 말하는 허상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답니다.”
대장군과 허상괴는 다르다…?
“그렇답니다.”
제로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가이아가 뜬금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이 허상괴라 부르는 ‘졸’은 그분의 피에서 태어난, 아무런 이지도 갖추지 않고 오로지 살육만을 반복하는 도구에 불과하답니다. 그에 반해 저희 대장군. 그리고 군단장이라 불리는 자들은 모두 그분의 은혜를 받은 존재들.”
“즉, 네 말의 요지는 단순한 도구이자 졸병에 불과한 허상괴와 동급으로 보지 마라?”
“그렇답니다.”
확실히 허상괴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다.
그저 단순히 실체를 가지지 않고, 지구의 생물에 깃들어 육체를 가지기에 허상괴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보지. 가이아, 널 포함한 나머지 대장군. 그리고 군단장들은 본디 다른 차원에 속해 있던 존재들이냐?”
“그렇답니다. 확실히 그분의 대적자라 그런지 이해력이 좋군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는 가이아에, 제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허상괴의 왕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차원을 침공해 멸망시킨 것일까?
얼마나 많은 숫자의 초월자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는 것일까?
뭐, 그래봤자….
‘놈이 아무리 강해도 내가 죽여야 할 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러한 생각을 품은 제로는 손에 쥐고 있던 망자의 폭거를 네크로노미콘의 형태로 변화시켰다.
“뭐, 상관없지. 그럼 어디 한번 놀아볼까?”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후웅-!
제로의 등 뒤로 만들어진 거대한 흑골의 창, 데스 본 스피어가 가이아를 향해 쏘아졌다.
허나 가이아는 자신의 심장을 노리며 쏘아진 흑골의 창에도 아무런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어째서?
왜?
아무런 방어도, 회피도 취하지 않은 것일까?
데스 본 스피어의 속도는 가볍게 초음속을 뛰어넘는다.
허나, 본신을 드러낸 가이아라면. 아니, 본신을 드러내기 전의 가이아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속도는 충분히 반응할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제로가 그러한 속마음을 집어삼키고 있을 때, 돌연 가이아의 발밑의 대지가 솟아오르며 거대한 벽이 되었다.
데스 본 스피어는 갑자기 만들어진 벽과 충돌하며 산산이 터져 나갔다.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랍니다.”
녹음의 대장군 가이아.
그 이명으로만 보자면 가이아는 식물을 다루는 힘이라 착각하기 쉬웠다.
허나, 가이아의 진정한 힘은 대지에 대한 압도적인 지배력이다.
특히나, 그녀를 중심으로 주변의 대지는.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는 무언가가 있을 때 자연스레 움직여 그 위험을 배제한다.
즉, 말하자면 그녀는 자율 의사를 가진 방패를 지니고 있다 봐도 무방했다.
“그나저나… 간 보기는 이제 충분하지 않나요? 아니면….”
스윽.
뒷말을 흐리는 가이아의 호박빛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저 인간들 때문에 본래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인가요?”
마지막 생존자를 구하고 있던 마도왕은, 그러한 말을 내뱉는 가이아의 호박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오싹-!
마도왕은 저항할 수 없는 공포가 자신의 정신을 뒤흔드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으아아아아아-!”
스킬 발동, 블랙홀.
본능적으로 마도왕이 마법을 발현시켰다.
그의 앞으로 자그마한 점과 같은 어둠이 만들어졌으며.
그러한 어둠, 블랙홀이 압도적인 흡입력으로 ‘무언가’를 빨아들였다.
“허억-! 허억-!”
가이아의 공격이라 예상되는 무언가를 빨아들인 블랙홀이 사라지고.
그것을 발동시켰던 마도왕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만,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블랙홀을 사용한 반작용일까.
마도왕의 낯빛이 뱀파이어인 블러드와 비슷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다, 당장 여기서 빠져 나…!”
첸첸을 향해 입을 열던 마도왕의 신형이 훅! 하며 사라졌다.
아니, 그것은 비단 마도왕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서 마지막 생존자를 들쳐업고 있던 첸첸. 그리고 그들이 구한 생존자 전원이 위그드라실의 내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한 짓이 가능한 존재는 이곳에선 제로뿐.
“흐응. 아쉽네요. 그래도 뭐, 이 정도면 당신 또한 마음껏 힘을 발휘할 수 있겠네요.”
가이아는 위그드라실 내부에서 모든 사람들을 퇴장시킨 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편, 제로는 난데없이 마도왕을 향해 공격을 날린 가이아에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그건 뭐 하자는 짓이었지?”
“간단해요. 당신이 제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장애물을 치우려 했을 뿐이랍니다. 뭐, 당신을 제외한 누군가가 제 공격을 막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그것도 설마 하찮은 ‘인간’ 따위가 말이에요.”
그러한 말을 내뱉은 가이아의 입꼬리가 말려 비틀어졌다.
그 미소는 명백한 불쾌감.
인간이 자신의 공격을 막았다는 것에서 파생된 불쾌감이었다.
“그러냐. 그럼….”
죽. 어.
제로의 입이 열리며, 사언이 흘러나왔다.
농밀한 죽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가이아를 휘감는 순간….
“어머. 상당히 특이한 공격법이네요.”
가이아가 전신에서 대지의 기운을 터트리며 사언을 밀어냈다.
그에 사방으로 흩어진 사언은 애꿎은 위그드라실 내부의 곳곳을 사멸시키며, 한 줌의 가루로 만들었다.
“목소리에 죽음을 담는다라. 확실히 이 정도라면 스스로를 군단장이라 칭하는 버러지들은 버틸 수 없겠죠.”
그러한 말을 내뱉는 가이아의 두 눈동자는 오만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자신과 왕을 제외한, 모든 것.
그것이 단순한 졸에 불과한 허상괴이든, 아니면 자신과 같이 왕의 은혜를 받아 군단장이 된 존재이든.
그 무엇하나 가리지 않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편 제로는….
“사룡 덴드로.”
크르르….
제로의 가슴이 다시 한번 갈라지며, 사룡 덴드로의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가이아는 그런 제로의 갈라진 가슴 너머의 심연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사룡 덴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외차원의 마룡, 아지 다하카. 확실히 그건 저도 부담되는 존재네요.”
“그러니까 이놈은 사… 아니다. 그냥 죽어라. 덴드로, 먹어 치워버려.”
크아아아-!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룡 덴드로가 튀어나와 가이아를 향해 쏘아졌다.
쩍! 벌어진 사룡 덴드로의 입에는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운 엄니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러한 엄니에는 농밀한 죽음이 휘감겨져 있었다.
“뭐, 부담이 될 뿐. 제아무리 외차원의 마룡 아지 다하카라 하더라도 절 죽일 순 없답니다.”
스윽.
그러한 말을 내뱉은 가이아가 손을 내리긋자, 그녀를 향해 나아가던 덴드로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사룡 덴드로는 어떻게든 움직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그것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압도적인 중력. 공간을 비틀고, 빛마저 빨아들이는 초중력이 사룡 덴드로의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었다.
“중력. 그것도 베히모스보다 강력하네.”
“그렇답니다. 애초에 그 아이가 중력을 다룰 수 있었던 것도, 제 힘을 빌려줬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요.”
“그러냐.”
가이아의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린 제로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가이아가 펼친 중력장에 짓눌린 사룡 덴드로가 사라지고, 갈라졌던 가슴이 다시 붙었다.
“널 죽이려면 내가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겠네.”
“그렇답니다. 그러니… 부디 절 실망시키지 말아주세요. 빛나는 닭둘기를 죽여버린 당신의 힘을 저에게 보여주세요.”
콰가가-!
가이아의 손가락이 제로를 가리키는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대지가 출렁거렸다.
시작은 잔잔했으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거대한 해일과도 같이 변한 대지가 무서운 기세로 제로를 덮쳤다.
“흠.”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제로가 낮은 울림을 토해내며 데스 웨이브를 발동하자 제로의 전신에서 난폭하면서도 거대한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와 가이아가 만들어낸 대지의 해일과 공멸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그렇게만 해 주세요.”
촤라락-!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내는 제로에, 가이아가 기뻐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오케스트라를 이루는 악단을 지휘하는 지휘자의 손짓과도 비슷했으며.
그러한 손짓에 맞춰 사방에서 튀어나온 가시나무 덩굴이 제로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러한 덩굴 하나하나에는 강력한 중력이 휘감겨져 있었는데.
그것들이 제로를 향해 휘둘러질 때마다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고, 휘어졌다.
그에 제로는….
사. 라. 져.
사언을 퍼트리는 것으로, 가이아가 만들어 낸 수백의 가시나무 덩굴을 지워버렸다.
* * *
“가이아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
외차원에서, 거울을 닮은 무언가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죽음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녀라면 사룡 덴드로는 단순한 껍질.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아지 다하카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겠지. 누가 뭐래도 그녀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니.”
그러한 말을 내뱉은 죽음이 돌연 키득키득 웃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그놈은 정상이 아니야. 설마 태초의 빛의 첫 번째 자식과. 모든 생명의 어머니, 대지의 여신이라 불리는 가이아. 그리고 ‘루시엘의 반신’을 권속으로 두고 있을 줄이야. 참 재미있는 존재란 말이지.”
연신 키득키득 웃으며 중얼거린 죽음이 원반에 비친 제로를 바라봤다.
“부디,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네가 진정한 죽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