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짜악-!
퍼억-!
가이아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가시나무 덩굴이 휘둘러질 때마다 바닥이 터져 나갔다.
그 외에도, 휘둘러지는 덩굴의 속도가 가볍게 초음속을 돌파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생겨나는 소닉붐이 제로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쯧.”
스킬 발동, 데스 그라운드.
파스스-!
제로를 중심으로 주변의 대지가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 줌의 생명마저 사라지며 죽어버린 대지는, 마치 사막을 떠올리게 바스라졌다.
그 모습에….
“어머, 그러면 안 되죠.”
생명의 화원.
녹음의 대장군, 가이아의 전신에서 제로의 죽음과는 상반되는 생명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내뿜은 생명의 기운은 생명의 수호자와는 사뭇 달랐다.
생명의 수호자가 다루는 생명이 따스한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느낌이라면, 그녀의 생명은 난폭한. 마치 계모 특유의 표독스러움이 묻어나왔다.
허나, 생명은 생명이라는 것일까.
가이아에게서 뿜어진 생명은, 제로가 내뿜은 죽음을 밀어내며 대지에 한 줌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로 인해 가이아를 중심으로 대지에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피어난 꽃들은….
콰가강-!
제로를 향해 녹색의 광선을 토해냈다.
꽃잎에서 뿜어진 녹색의 광선이 제로의 전신을 두드리자, 연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고작 이 정도로 죽은 건 아니겠지요?”
푸확-!
가이아의 입에서 요염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폭발에 의해 피어오른 흙먼지가 흩어졌다.
그렇게 사라진 흙먼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제로는 그 흔한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
“설마. 그것보다…, 대장군이라 불리는 너야말로 너무 약한 거 아니야?”
스윽.
가이아를 향해 입을 연 제로가 손짓하자, 그의 등 뒤로 거대한 흑골의 창이 만들어지며 쏘아졌다.
그 숫자는 수백에 달해, 가이아를 향해 쏘아지는 흑골의 창은 마치 폭격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흐음.”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흑골의 창에, 가이아가 묘한 미소를 내비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녀를 중심으로 솟아오른 수십 개의 가시나무 덩굴이 움직였다.
하나하나가 제로를 노릴 때와 마찬가지로 재빠르게. 그리고 난폭하게 움직이는 가시나무 덩굴은 곧 가이아를 노리며 쏟아져 내리는 흑골의 창을 모조리 박살 내버렸다.
“아직 멀었어.”
스킬 발동, 데스 본 크로스.
후웅-!
콰앙!
가이아의 머리 위로, 농밀한 죽음을 휘감은 거대한 흑골의 십자가가 떨어졌다.
거대한 흑골의 십자가가 떨어진 대지가 움푹! 내려앉으며, 그것으로부터 흘러넘치는 농밀한 죽음이 사방을 잠식해 들어갔다.
“미안하지만 난 네크로맨서라서 말이야.”
딱-!
이어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등 뒤로 공간이 갈라지며 외차원의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튀어나와.”
척-! 척-! 척-!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외차원의 창고에서 대량의 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전신이 흑골로 이루어진 스켈레톤.
그 뒤를 이어, 살점이 검게 썩어 문드러진 좀비나 구울 등이 튀어나왔다.
그것들 외에도 다종다양한 무기를 갖춘 데스 솔져. 수만의 스켈레톤들을 이끄는 제왕, 스켈레톤 엠페러. 모든 영체형 망자들의 여왕, 퀸 레이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허나 제로가 이동용으로 애용하는 본 드래곤 등등.
최상위 망자들 또한 외차원의 창고에서 튀어나오며 흉흉한 살기를 터트렸다.
가이아는 제로가 소환한 망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차원에는 이러한 말이 있더군요. 토끼가 아무리 많아봤자, 사자 한 마리 죽이지 못한다. 확실히 당신이 소환한 저 불쾌한 것들은 강해요. 그렇지만….”
“너와 비교하면 토끼에 불과하다?”
“그렇답니다.”
제로의 말에, 가이아가 싱긋 웃어 보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망자들이 강하다 한들. 그리고 그렇게 소환된 망자들이 데스 그라운드와, 데스 본 크로스의 영향으로 강화되었다 한들.
가이아에게 상처 하나 입히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네놈의 눈을 가리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스윽.
그러한 말을 내뱉으며, 제로가 손을 내리긋자.
외차원의 창고에서 걸어 나온 망자들이 움직였다.
흑골의 몸뚱이를 가진 스켈레톤들은, 똑같이 흑골로 이루어진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든다.
살점이 썩어 문드러진 좀비나 구울 따위는 손톱과 이빨에 흐르는 시독을 앞세우며 가이아를 덮쳤다.
그 외에도, 본 드래곤이 거대한 포효를 터트리며 엄니를 들이밀고.
데스 솔져들이 무기를 뽑아 쥐며 움직였다.
스켈레톤 엠페러가 허리춤에 매어진 검을 뽑아 높이 치켜들자, 대지가 들썩이더니 용아병들이 튀어나와 가이아를 향해 나아갔다.
퀸 레이스는 영체형 망자 특유의 성질을 이용해 가이아의 정신을 뒤흔들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다는 것은 당신 또한 알고 계시지 않나요?”
가이아를 향해 달려드는 망자들이, 가이아가 만든 꽃밭. 생명의 화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전신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무너져 내렸다.
생명의 화원을 이루는 농밀한 생명력이, 망자들의 육신에 깃든 죽음을 밀어내 평범한 시체로 되돌린 것이다.
그나마 생명의 화원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최상위 망자들 또한, 그 힘이 격감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제가 정성스레 가꾼 화원에서 그 더러운 발을 치우시지요.”
스윽-.
아직 남아 있는 망자들을 바라보며 말한 가이아가 손을 내리긋자, 생명의 화원을 이루는 꽃이 녹색의 광선을 쏘아댔다.
불과 1분 전, 제로에게 향했던 녹색의 광선은 망자들과 충돌할 때마다 쾅! 쾅!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한 폭발에 휩쓸린 망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십만에 달하던 망자들 중, 지금 남아있는 망자들의 숫자는 고작해야 수백.
그마저도 데스 솔져나 본 드래곤. 어보미네이션 같은 최상위 망자들 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절 죽이려 하다니. 절 너무 우습게 보…!”
쩌어엉-!
제로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던 가이아의 표정이 미미하게나마 일그러졌다.
그런 가이아의 앞으로는 언제 꺼내 든 것인지 모를 대검, 망자의 폭거를 휘두르는 제로가 자리 잡았다.
제로의 손에 쥐어진 망자의 폭거는 정확히 가이아의 목을 노렸다.
허나, 자율 방어 능력이라도 갖추어져 있는 것일까?
제로가 휘두른 망자의 폭거가 가이아의 목에 닿기 직전, 사방에서 꿈틀거리던 가시나무 덩굴들이 그것을 막아냈다.
제로는 공허한 눈구멍에 깃든 푸른 귀화. 그 속에 감추어진 사신의 흉안으로 가이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하지 않으면 넌 죽어.”
츠즛.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를 향해 가시나무 덩굴들이 휘둘러졌으나, 그것들이 닿기도 전에 제로의 신형이 죽음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으음. 확실히 당신을 너무 얕보고 있었던 것 같네요.”
가이아는 자신을 중심으로, 수백 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제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존재는, 왕이 인정한 대적자.
그 강함은 동격의 존재인 백의 대장군, 루시엘마저 죽일 정도로 강대하다.
그것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가이아는, 입가에 걸쳐져 있던 요염한 미소를 거두어들였다.
“저도 조금은 진지하게 임해야겠네요.”
콰르르-!
가이아가 바닥에 손을 대자, 그녀의 앞으로 대지가 들썩이며 수십의 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것은 흙과 바위로 이루어졌고. 어떤 것은 화려한 꽃들이 뭉쳐 만들어졌다.
어떤 것은 가이아가 애용하는 공격 수단인 가시나무 덩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거인. 아니, 골렘에 가까운 그것들 하나하나의 강함은 능히 최상급 허상괴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저것들 하나하나가 준 군단장급이라 봐도 되려나.’
수십의 거인들이 쿵! 쿵! 대지를 울리며 걸어오는 모습에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인들은 백의 대장군, 루시엘이 인공적으로 만든 군단장급의 허상괴, 스캐빈저와 닮았으나 그 결은 달랐다.
스캐빈저가 인간과 허상괴들을 통한 실험에서 만들어진 부산물이라면….
‘저건 가이아가 품은 힘의 조각이라 봐도 되겠어.’
“정답이랍니다.”
제로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돌연, 가이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제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얕보고 있기는. 사룡 덴드로.”
크르르.
제로의 가슴이 살짝 갈라지며, 짙은 심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한 심연 속에선 한 쌍의 흉흉한 붉은 안광이 떠오르고. 드래곤 특유의 나지막한 울부짖음이 새어 나왔다.
“모조리 먹어 치워버려.”
크아아아앙-!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로의 가슴이 쩍! 하며 더욱 크게 갈라졌다.
그렇게 갈라진 가슴에 깃들어 있는 심연 속에서 사룡 덴드로의 머리가 거친 포효와 함께 튀어나왔다.
으적! 으적!
심연 속에서 사룡 덴드로의 머리가 튀어나올 때마다 수 마리의 거인들이 집어삼켜졌다.
그렇게 수십 마리의 거인들이 모두 사라지기까지는 찰나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가이아는….
“외차원의 마룡, 아지 다하카. 설마 그 괴물을 사역하고 있을 줄이야.”
으음… 하는 낮은 울림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한편 제로는 설마하니 가이아가 사룡 덴드로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두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아니, 그것보다도….
“아지 다하카? 틀렸다. 방금의 그것은 사룡 덴드로. 외차원에 속한 존재가 아닌, 단순한 명계의 파수꾼에 불과하다.”
“그런가요. 저 괴물을 사역하고 있음에도, 그 정체를 꿰뚫어 보지 못했나 보군요.”
제로의 중얼거림을 들은 가이아가 싱긋 웃어 보였다.
“뭐, 이제 와서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요. 그나저나…, 제 아이들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조리 먹어 치워버릴 줄이야. 좀 너무하지 않나요?”
“딱히.”
“그런가요.”
제로의 대답에 가이아가 다소 슬픈 표정을 내비쳤다.
허나, 그러한 슬픈 표정은 가식에 불과했다.
“어쟀든, 당신이 외차원의 괴물마저 사역하고 있으니…. 이 모습으로는 조금 힘들겠군요. 흔히 말하는…, 2페이즈에 돌입해 볼까요?”
후웅-!
가이아의 입이 다물어지는 순간, 어디선가 불어닥친 미풍이 가이아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가이아를 중심으로 수천의 가시나무 덩굴이 튀어나오며 가이아를 휘감고 고치 형태를 만들었다.
다만….
‘이건 좀 위험하겠는데.’
가이아를 집어삼킨 고치를 바라보며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천장에 매달린 고치는, 인간의 생명과 마나를 빨아들여 위그드라실 중심에 박혀 있는 보석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수천만의 혹은 수억의 인간들의 생명과 마나를 빨아들인 보석이 돌연 천장에서 떨어져 가이아를 휘감은 고치에 스며들듯 흡수되었다.
그와 동시에 가이아의 힘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 *
“괜찮을까요…?”
제로가 소환한 명계의 주시자를 통해 수해를 빠져나온 플레이어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영국에 자리 잡은 거대한 나무, 위그드라실로 향한 제로를 걱정했다.
물론 제로가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지구를 침공한 괴물들 또한 인지를 초월한 무언가임은 틀림없었다.
그러한 플레이어의 걱정에….
“딱히 걱정할 건 없다. 그놈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그 강함을 떠올린다면, 놈이 죽는다는 상상은 할 수조차 없지.”
“그런가요….”
벤의 대답에, 플레이어의 얼굴에 서린 걱정이 한 꺼풀 벗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