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처음 뵈어요. 제 이름은 가이아. 녹음의 대장군이자, 시작의 나무 위그드라실의 관리자랍니다.”
나무로 이루어진 왕좌에서 일어난 여인, 녹음의 대장군 가이아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녀의 하반신은 마치 식물처럼 바닥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상반신은 나뭇잎을 엮어 만든 듯한 드레스를 걸치고. 머리에는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화관이 씌워져 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과 두 눈동자는 녹음의 대장군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자연을 품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 가이아의 인사에 제로의 얼굴에 미미하게나마 놀람이 깃들었다 사라졌다.
가이아, 흔히 대지의 어머니이자, 생명의 여신이라 불리는. 신중의 신이라 불리는 존재의 이름이다.
그뿐이랴? 시작의 나무 위그드라실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 불리는 나무였다.
설마….
“이 거대한 나무가 시작의 나무, 위그드라실이라고?”
“아직 묘목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시작의 나무 위그드라실이랍니다.”
가이아의 대답에 제로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위그드라실이 거대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의 크기가 묘목에 불과할 줄이야. 헌데….’
그러한 생각을 품은 제로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넌 지구에 위그드라실의 묘목을 심은 거지?”
“그거야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왕을 강림시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말을 채갔음에도 가이아는 불편하다는 기색 하나 없이, 여전히 요염한 미소를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내 손으로 위그드라실을 없애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것을 정리하지 않으면 놈이 강림하겠지.”
쿠구구-!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의 전신에서 농밀한 죽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방팔방 모든 것을 잠식해 들어가는 제로의 죽음에, 시작의 나무 위그드라실이 우르르 떨렸다.
한편, 그러한 제로를 바라보고 있던 마도왕과 첸첸이 돌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머, 멈추게나! 제로!”
“아직 안 돼!”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내는 두 사람을 제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지?”
“위를 봐라.”
마도왕의 말에 제로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으음.”
위그드라실에 들어오기 전 만났던 벤.
그런 벤이 구했던 사람들을 가둔 나무 덩굴로 이루어진 고치가 천장에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숫자는 일, 이백이 아닌. 천. 아니, 어쩌면 만이나 억 단위일지도 몰랐다.
또한, 그렇게 인간을. 플레이어나 일반 시민들을 구분하지 않고 집어삼킨 고치는 가두어 둔 인간들의 몸뚱이에서 생명과 마나를 뽑아내 어디론가로 보내고 있었다.
“자네가 강한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가 본격적으로 저 허상괴와 싸운다면 아직 살아있을지 모를 생존자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네!”
다급한 마도왕의 외침에, 제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 수많은 고치 속에 잠들어 있는 인간 중, 과연 살아있는 인간의 숫자는 몇이나 될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불확실한 생존의 여부를 위해 힘을 제한했다간 내가 당한다.’
녹음의 대장군, 가이아.
언뜻 보기에 그녀는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인다.
허나 제로는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런 강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가, 괜히 대장군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라는 듯 저 여인의 형상을 한 껍데기 속에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난폭한 무언가가 잠들어 있음을.
한편, 그렇게 제로가 선뜻 움직이지 못하자 녹음의 대장군 가이아가 싱긋 웃어 보이며, 품에 안고 있던 강아지를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선 제가 상대해 드리고 싶지만…, 저도 저것들을 관리해야 해서요. 그러니…, 당신은 제 권속이 상대해 줄 거랍니다.”
그러한 가이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내려온 강아지의 표정이 확! 변했다.
처음 봤을 땐 귀엽고 순박한, 말 그대로 평범한 강아지의 얼굴이었다면 변해버린 지금은 마치 악귀와도 같이 일그러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언뜻언뜻 내비쳐졌다.
“그 아이의 이름은 베히모스. 저의 권속이자 땅의 군단장이며. 한때 대지의 폭군이라 불리었던 귀여운 아이랍니다.”
귀여운… 아이…?
가이아의 말에 제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것의 어디가 귀엽다는 것일까?
제로를 향해 한번 터진 적의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으며, 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적의만큼 베히모스의 덩치 또한 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커지고, 커진 베히모스는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머리에는 유연한 곡선을 이루는 두 개의 뿔이 돋아났고.
전신을 뒤덮은 털은 길게 늘어져 바닥에 닿았다.
네 개의 발에 달린 손발톱은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단단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특히나 그 거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력은, 지금까지 만나온 그 어떤 허상괴보다 압도적이었다.
“칫.”
땅의 군단장이자 대지의 폭군, 베히모스.
그것이 온전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자 제로가 낮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에 제로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던 죽음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첸첸과 마도왕의 전신을 휘감은 나무 덩굴을 잘라냈다.
“저 개새끼는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들은 생존자들을 구출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무겁게 가라앉은 제로의 말에 첸첸과 마도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지금까지 구속당해 상당량의 마나를 강탈당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700레벨을 뛰어넘은, 수억의 플레이어들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들이다.
충분히 머리 위의 고치 속에 잠들어 있는 생존자들을 구출해 낼 여력이 남아 있으리라.
물론….
‘가이아. 그녀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선에서 말이지.’
그러한 생각을 품은 제로가 슬쩍 가이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느새 나무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아, 제로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한눈을 파실 때가 아닐 텐데요? 저래 보여도 상당히 자존심이 강한 아이랍니다. 뭐, 이를테면 사춘기의 그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가이아의 충고가 제로의 귓가에 파고드는 순간, 베히모스가 움직였다.
그것은 자신을 눈앞에 두고 딴 곳을 바라보는 제로에 상당히 분노했다는 듯, 난폭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크아아아-!
콰가강-!
바닥을 박차며 튀어 오른 베히모스가 제로를 향해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 압도적인 크기와, 거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힘이 발생한 풍압에 제로가 비틀거리는 순간….
크앙-!
제로의 등 뒤에 있던 명왕의 번견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콰앙-!
하지만 명왕의 번견은 베히모스가 휘두른 앞발에 얻어맞아 벽에 처박히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 일격으로 한계 이상의 데미지를 받아 역소환 된 것이다.
그 모습에 제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움직임이 둔해졌어. 아니, 몸이 무겁다고 해야 하나?’
제로는 명왕의 번견을 치운 베히모스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묘하게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하다.
그것은 마치, 중력이 자신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제로를 보곤 가이아가 어머! 하며 낮은 탄식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 아이는 중력을 다룰 수 있답니다. 그러니 조심해야겠죠?”
중력을 다룬다.
가이아의 그 말에 제로의 의문이 해소되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죽음의 탁류가 베히모스의 앞발을 밀어냈다.
아니, 그것을 넘어 거대한 해일처럼 변한 데스 웨이브가 베히모스를 덮치며, 그것의 전신을 두드렸다.
크어어어-!
데스 웨이브가 전신을 두드리는 충격에 베히모스가 거친 포효를 터트렸다.
베히모스는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공격도, 자신의 질기고 튼튼한 가죽을 뚫고 충격을 주지 못했다.
헌데 눈앞에 있는 존재의 공격은 달랐다.
그것의 공격 하나하나는 자신의 가죽을 뚫고, 내부의 장기를 뒤흔드는 강력함을 갖추고 있었다.
크아아앙-!
다시 한번 거친 포효를 터트린 베히모스가 앞발을 내리찍었다.
그에 바닥이 파도처럼 출렁였으며….
푸부북-!
베히모스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수백 자루의 창이 제로의 전신을 관통하며 바닥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빡쳤냐?”
대지의 창에 전신을 관통당한 제로. 아니, 제로의 더미가 한 줌의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어느새 베히모스의 머리 위에 자리 잡은 제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로는 베히모스의 공격에 당하기 직전, 더미 블링크를 통해 몸을 빼낸 것이다.
그러한 제로의 반응에, 가이아가 호오~ 하는 낮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한편, 눈앞에서 제로를 놓쳐버린 베히모스가 불쾌하다는 듯 크르르…, 하는 울림을 토해냈다.
“제 아이가 상당히 화가 났나 본데요?”
“그러냐?”
싱긋 웃으며 말하는 가이아에, 제로 또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크앙-!
베히모스가 포효를 터트리며 제로를 향해 움직였다.
그것은 산을 연상시키는 압도적인 거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사방팔방을 누비며, 제로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앞발을 휘둘렀다.
그런 베히모스의 앞발이 휘둘러질 때마다 거대한 중력이 제로의 전신을 짓눌렀으며. 중력으로 이루어진 참격이 제로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베히모스의 발톱에서 튀어나온, 중력으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참격이 제로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기 직전.
제로는 죽음을 두르는 것으로 베히모스가 만들어 낸 참격을 막아냈다.
허나 베히모스의 공격은 단순한 참격에 한정되지 않았다.
크앙-!
베히모스가 다시 한번 포효를 터트리는 순간….
“크윽-!”
제로를 중심으로 강렬한 중력장이 형성되었다.
제로는 전신을 짓누르는 중력에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수백, 수천 배로 증폭된 중력은, 제로가 평범한 플레이어였다면 순식간에 압사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고작 이 정도로는 안 돼!”
콰아아-!
제로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죽음이 사방을 잠식하며 휘몰아쳤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어찌 보면 하나의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는 베히모스의 중력마저 침식해 들어갔다.
그렇게 죽음에 갉아 먹힌, 베히모스가 만들어 낸 중력장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사라졌다.
“어머? 베히모스의 중력장을 그토록 간단하게 파훼하다니. 확실히 그분의 대적자라 불릴 만하네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하는 가이에에 제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작 개새끼 하나 처리하지 못해서야 이 모든 것의 원흉, 녹음의 대장군 가이아를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이상 힘을 사용하면 저들이 휩쓸린다.’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가 슬쩍 천장을 바라봤다.
드높은 천장에는 첸첸과 마도왕이 나무 덩굴 고치에 갇힌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있었다.
첸첸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호문쿨루스들을 이용해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마도왕은 마법을 통해 구해내고 있다.
그런 제로의 시선의 움직임을 눈치챈 것일까?
돌연 녹음이 대장군, 가이아가 싱긋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저것들이 신경 쓰이나 보네요? 그렇다면, 베히모스.”
크륵?
가이아의 부름에 베히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쓸모없는 인간들을 치우세요. 저들의 생명과 마나는 충분히 빨아 먹었으니 더 이상 필요 없겠죠.”
크앙-!
가이아의 명령이 떨어지자, 베히모스가 후읍! 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에 베히모스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그것의 입에 막대한 기운이 뭉쳤다.
‘이건 브레스!’
베히모스가 하려는 행동이 무엇인지 눈치챈 제로가 다급히 죽음을 퍼트렸다.
그와 동시에 베히모스의 입에 뭉친 거대한 에너지가 마도왕과 첸첸. 나아가 아직 남아있는 고치를 향해 쏘아졌다.
그렇게 쏘아진, 공간마저 일그러트리는 초중력으로 이루어진 베히모스의 브레스와 제로가 퍼트린 죽음이 충돌하는 순간.
두 눈을 멀게 만들 것만 같은 빛을 동반한 거대한 폭발이 사방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