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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185화 (185/200)

제185화

땅의 정령 노움을 닮은 허상괴를 죽이고 돌아온 제로의 눈에, 고치에서 빠져나온 생존자들의 모습이 내비쳐졌다.

하나같이 비쩍 마르고, 약해져 있는 모습이 상당량의 생명을 빨려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나마 플레이어들의 상황은 괜찮았지만, 일반 시민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왔냐.”

생존자들의 중심에 앉아 있던 벤이 제로가 돌아오자 입을 열었다.

“피해는?”

“내가 구했던 생존자들의 3할이 죽었다.”

그러한 말을 내뱉은 벤이 어느 한 장소를 가리켰는데, 그곳에는 고치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생존자들의 무덤이 만들어져 있었다.

한참 동안 조용히 무덤을 바라보던 제로가 입을 열었다.

“벤.”

갑작스런 부름에 벤의 시선이 제로를 향해 움직였다.

“넌 이만 수해를 빠져나가.”

“수해를…?”

“수해에는 아직도 많은 숫자의 허상괴와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어. 넌 이들을 이끌고 수해를 빠져나가. 나머지는 내가 처리한다.”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어?”

벤의 반문에 제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로는 벤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벤이 약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제로가 상대해야 할 존재는 인지와 이치를 초월한 존재들 뿐.

그런 존재들을 상대로 벤이 도와주겠다고 난입하는 것은 도리어 방해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이 위험한 수해 속을 아무런 힘도 없는 일반 시민들이. 그리고 상당히 지쳐 제힘을 발휘할 수 없는 플레이어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벤 또한 그러한 생각을 품은 것일까.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제로를 바라보고 있던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제로는….

스킬 발동, 명계의 주시자.

쩌억-!

제로의 등 뒤로 공간이 갈라지며, 거대한 눈알에 수십 개의 촉수가 꿈틀거리는 망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끔찍한 모습에 명계의 주시자를 본 몇몇 사람들이 흠칫흠칫 몸을 떨고, 시선을 돌렸다.

“이놈이 수해를 빠져나가는 길을 알려줄 거야.”

“알겠다.”

그러한 대답과 함께 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또한 하나둘씩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준비를 끝마치는 순간.

“죽지 마라.”

“내가? 난 안 죽어.”

벤답지 않은 걱정 어린 한마디에, 제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제로의 대답에 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존자들을 추스르며 명계의 주시자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럼 나도….”

벤이 통솔하는 생존자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제로 또한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목표는 영국에 자라난 거대한 나무였다.

* * *

콰가강-!

대지가 뒤집히고, 수해를 이루는 거목들이 뿌리째 뽑히며 튕겨 나간다.

그러한 현상을 만들어 낸 것은 제로였다.

벤과 헤어진 제로는 상당히 무식한 방법으로 거대한 나무를 향해 나아갔다.

전신에 죽음을 두르고, 앞에 존재하는 것이 거대한 바위이든. 수해를 이루는 거목이든. 수해 속을 거니는 허상괴나 몬스터든.

그 무엇이든 무시하고, 파괴하며 일직선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움직였을까?

5분 정도 움직이고 나서야 제로는 거대한 나무의 밑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 제로의 등 뒤로는 대지가 헤집어지고, 거목들이 이리저리 무너진,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길이 만들어졌다.

물론 그마저도 수해 특유의 자생력으로 순식간에 메꿔지고 있었다.

“입구는…, 여긴가.”

슬쩍 훑어본 나무 밑동에는 자그마한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거대한 나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문이었으나, 그러한 문의 크기마저도 전설 속의 거인이 드나들어도 될 정도로 거대했다.

한편, 마치 제로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듯 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그에 제로가 씨익 웃어 보였다.

“재미있는 짓을 하네.”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는 망설임 없이 문을 통과해 거대한 나무 속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나무 내부는, 그 크기에 걸맞게 상당히 넓었다.

한쪽에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보였으며, 수십 미터 위에 있는 천장에는….

“박쥐?”

수백 마리의 거대한 박쥐 형태의 허상괴가 달라붙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저것들로 내 힘을 빼놓겠다? 대장군에겐 안 어울리는 행동이네.”

아마도 첸첸과 마도왕. 그리고 그들이 보호하고 있던 생존자와 거대한 나무를 만들어 낸 대장군 모두가 이 나무의 최상층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최상층까지 가기 위해서는….

“수천. 혹은 수만 마리의 허상괴와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라…. 마치 소설 속에 나오는 마왕의 탑 같네.”

흔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마왕의 탑은, 최하층에 가장 약한 적을 배치해 두고, 한 층씩 위로 올라갈 때마다 적의 강함이 점차 늘어난다.

그렇게 약한 적을 상대하며 강해진 용사가 도착한 최상층에는 마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거대한 나무 속, 내부의 구조는 그러한 마왕의 탑의 특징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제로가 실없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내뱉었을 때, 돌연 천장에 달라 붙어 있던 박쥐들이 움직였다.

그것들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바닥에 내려왔는데, 그와 동시에….

“뱀파이어? 평범한 박쥐는 아니다 이건가?”

거대한 박쥐가 돌연 인간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허나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두 개의 송곳니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고. 전신을 뒤덮은 피부는 그 어떤 생물도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그러한 특징을 가진 존재는 오롯이 뱀파이어뿐이다.

“뱀파이어라면…, 블러드를 데려올 껄 그랬나.”

상대가 뱀파이어라면, 그 정점에 있는 존재. 진조라고도 불리며, 어느 때는 신조라고도 불리는 엘더 뱀파이어인 블러드가 제격이었다.

다만, 상대는 ‘뱀파이어의 특성’을 가지고 있을 뿐. 진정한 뱀파이어가 아니었기에 뱀파이어에 대한 블러드의 절대적인 지배력이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뭐, 그래봤자….

“버러지는 버러지일 뿐이야.”

스킬 발동, 명왕의 번견.

스킬 발동, 데스 솔져.

쩌억-!

제로의 등 뒤로 공간이 갈라지며, 검은 가죽으로 이루어진 갑옷을 걸치고. 전신에 다종다양한 무기를 지닌 망자, 데스 솔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이어 쿵! 쿵! 하는 울림을 만들어 내며 모습을 드러낸 망자는 거대한 케르베로스. 보통의 케르베로스와는 다르게 세 개의 입에 명계의 냉기를 머금은 명왕의 번견이었다.

“데스 솔져.”

척! 척! 척!

제로의 부름에 수십 구의 데스 솔져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정렬했다.

“명왕의 번견.”

뒤이어 부름을 받은 명왕의 번견이, 그런 데스 솔져들의 뒤에 멈춰 서며 하울링을 내뱉었다.

“모조리 쓸어버려.”

키가가각-!

끼아아!

그게게게겍!

크르르…, 컹컹!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십 구의 데스 솔져와 명왕의 번견이 움직였다.

그에 맞춰 수백 마리의 뱀파이어. 아니, 뱀파이어의 특징을 가진 허상괴들 또한 움직였다.

데스 솔져들이 각자 쥐어진 무기를 휘두르자, 허상괴들 또한 양손의 손톱을 날카로운 칼날로 바꾸어 휘두르며 응수했다.

그 둘의 충돌로 사방에서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뒤를 이어 난입한 명왕의 번견은….

크아아아아-!

거대한 엄니로 허상괴들을 씹어 먹고, 입에 머금은 명계의 냉기를 토해내며 허상괴들을 얼음 동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허나 그렇게 시작된, 제로고 소환한 망자와 수백 마리의 허상괴들의 싸움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허상괴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그 강함은 기껏 해야 중급에서 중상급 정도.

그에 반해 로스트 월드 시절부터 함께해 온 제로가 소환한 데스 솔져 한구, 한구의 강함은 상급 이상이다.

명왕의 번견 또한 그 강함을 측정해 보자면 최상급 허상괴와 맞먹었으니, 제아무리 수적으로 열세에 몰려 있다 하더라도 망자들의 승리는 확실했다.

그 증거로….

크앙-!

우적우적!

명왕의 번견에게 달린 세 개의 입이 움직일 때마다 수 마리의 허상괴들이 씹어 먹혀 소멸을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허상괴라 하더라도 명왕의 번견이 토해내는 명계의 냉기와 데스 솔져들이 휘두르는 무기에 하나둘씩 쓰러질 뿐이다.

크르르!

결국 허상괴들은 데스 솔져와 명왕의 번견을 상대하는 대신, 제로를 노리기 시작했다.

괜히 뱀파이어의 모습을 한 게 아니라는 듯, 어떤 허상괴는 육체를 안개로. 어떤 허상괴는 육체를 짐승의 그것으로 변화시켜 제로를 덮쳤다.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나타난 수십 마리의 허상괴들이 망설임 없이 칼날과도 같은 손톱을 휘둘렀는데….

“멍청한 놈들.”

딱-!

그에 맞춰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제로를 중심으로 거대한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왔다.

그러한 죽음의 탁류에 휩쓸린 허상괴들은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소멸을 맞이했다.

“뭐하고 있어? 어서 정리해.”

끄덕.

크르르….

다시 한번 떨어진 제로의 명령에 데스 솔져가 고개를 끄덕이고. 명왕의 번견이 낮은 울림을 토해내며 허상괴들을 덮쳤다.

수십 구의 데스 솔져와 명왕의 번견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수백의 숫자를 자랑하던 허상괴들이 전멸하는 것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허상괴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우웅-!

한쪽 벽면에 자리 잡고 있던 문이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활짝 열렸다.

“이러니까 뭔가 기분이 묘하네. 마치 마왕에게 납치당한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기분이야.”

불론 첸첸의 성별이 여자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없는 생각을 품은 제로가 피식 웃으며 움직였다.

그런 제로의 뒤로는 상처 하나 없는 데스 솔져와, 명왕의 번견이 뒤따랐다.

* * *

쿠르르-!

제로가 망자들을 대동하며 층계를 돌파할 때마다 거대한 나무의 내부가 거칠게 떨렸다.

허나, 거대한 나무의 내부, 개중에서도 최상층에 자리 잡은 여인, 대장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마치 서큐버스를 연상시키는 고혹적이며 요염한 미소를 내비칠 뿐이다.

“대적자가 조금 늦네요.”

품에 안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여인에도, 첸첸과 마도왕은 그저 침묵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비단 여인이 말하지 않아도, 제로가 점차 자신들이 사로잡힌 최상층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들의 육체를 휘감은 덩굴들이, 자신들의 생명력과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어 제대로 감지하지는 못하겠으나 바닥을 뚫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싸늘한 죽음만큼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대장군으로 보이는 여인이 무심히 강아지를 쓰다듬고, 첸첸과 마도왕 그리고 살아남은 몇몇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점차 희망으로 밝아지고 있을 때….

쾅-!

쿠르르-!

돌연 일어난 거대한 폭발에 바닥이 무너져 내리고, 그 속에서 명왕의 번견에 올라타 있는 제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최상층?”

제로가 주변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최상층은 상당히 넓었다.

제로가 최상층에 도착하기까지 총 66개의 층을 돌파했는데, 그렇게 도착한 최상층은 공간을 수백 배, 수천 배 확대한 듯 무식한 크기를 자랑했다.

동시에….

“너지? 어머니라 불리는 대장군 급의 허상괴가.”

“그렇답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제로에, 여인은 다시 한번 요염한 미소를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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