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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184화 (184/200)

제184화

“그러니까, 네 말을 정리하자면 넌 평소와 마찬가지로 독일을 돌아다니며 허상괴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래.”

“그러던 와중, 갑자기 나타난 수해에 휩쓸려 고립되었다?”

“맞아.”

제로의 물음에 벤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숲은 뭔가 이상하더군. 방향감각이 상실된 것처럼 아무리 움직여도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었어.”

“흐음.”

방향감각의 상실이라….

제로는 그런 벤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지금까지 제로가 움직인 거리만 해도 족히 수십 킬로미터는 될 것이다.

허나, 그만한 거리를 움직이는 동안, 제로는 단 한 번도 방향감각이 뒤틀린 듯한 무언가를 느낀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건 인간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일 수도 있겠어. 플레이어의 본질은, 따지고 보면 인간이니까.’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벤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넌 여기에는 어쩐 일이지?”

“아, 첸첸의 구조 요청이 들어와서. 겸사겸사 이 수해를 만든 허상괴를 처리하려고.”

“흐음.”

제로의 대답에, 이번엔 벤이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첸첸이라면 벤 또한 잘 알고 있는 플레이어다.

아니, 플레이어라면 그녀를 모르는 것이 더욱 이상할 것이다.

십강 중 하나인 마학자 길드의 길드 마스터.

700레벨을 넘기고, 로열 알케미스트라 불리는 연금술사들의 정점에 군림하는 플레이어.

비록, 그녀의 직업이 전투직이 아니라지만. 그 강함은 그 어떤 플레이어들보다 강력했다.

‘그런 첸첸이 구조 요청을 했다고?’

만일 그러한 말을 내뱉은 것이 제로가 아닌,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벤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넌 이제 첸첸을 찾으러 떠날 건가?”

“맞아. 왜, 너도 같이 가…!”

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제로의 시선이 홱! 하며 돌아갔다.

그것은 벤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방금 그건… 비명 소리인가?”

“이런!”

제로가 중얼거리기 무섭게, 벤이 당황한 표정으로 비명이 들린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갔다.

수해에 고립된 것은 벤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가 지키고 있던 사람들 또한 갑작스레 생겨난 수해에 휩쓸려 고립되었는데, 그렇기에 벤은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갑작스런 몬스터의 등장과 제로와의 만남에 그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을 뿐.

즉, 방금 들려온 비명 소리는….

‘생존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제로 또한, 벤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벤과 제로. 그 둘이 대화 한마디 없이 어느 정도 달려 나갔을까?

곧 그들은 자그마한 공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이건?”

그들이 도착한 공터의 상공에는 나무 덩굴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수백 개의 고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연신 꾸물거리고 있었는데. 그러한 고치 속에선 인간 특유의 기운이 풍겨 나왔다.

다만, 그러한 기운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져만 간다.

마치, 죽음을 향해 달려 나가듯이.

“젠장, 실수했군.”

벤은 머리 위에 자리 잡은 수백 개의 고치를 바라보며 데스바인더를 꽉! 움켜쥐었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사람들을 내버려 둬서는 안되었다.

그나마 생존자들 중 플레이어들이 섞여 있었기에 다소 안심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그러한 벤의 빈틈을 노렸던 것이다.

그렇게 벤이 인상을 찌푸리며 데스베인더를 휘두르려는 순간….

“당신이군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그분의 대적자가.”

돌연 땅이 들썩이며, 한 괴인이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모습을 드러낸 허상괴는 대지 그 자체였다.

전신이 흙과 돌로 이루어진 그것은 언뜻 보면 4대 정령중 하나인 대지의 정령, 노움과 비슷했다.

“감히 괴물 따위가…!”

쾅-!

허상괴의 등장에 활화산과도 같은 분노를 터트린 벤이 움직였다.

한 발 내딛는 순간, 딛고 있던 대지가 쾅! 하고 터지며 벤의 신형이 쭉! 늘어나며 허상괴를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성격이 급한 인간이로군.”

땅의 정령 노움을 닮은 허상괴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벤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가 제로에게 예우를 갖춘 이유는 오롯이 자신의 어머니의 인정을 받았을 뿐이다.

그 외의 존재들은 그에게 있어 벌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편, 그렇게 달려 나간 벤은 순식간에 허상괴의 앞에 도착하며 데스바인더를 휘둘렀다.

후웅-!

허공을 가로지르며 휘둘러진 데스바인더의 거대한 칼날이 허상괴의 몸을 가르기 직전….

훅-! 하며 허상괴의 몸뚱이가 무너져 내렸다.

그에 벤이 휘두른 데스바인더의 칼날은 허망하게 허공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칫.”

벤은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버린 허상괴에 불쾌하다는 듯 혀를 찼다.

“벤.”

“왜?”

상대를 놓쳤다는 것에 짜증을 토해내던 벤을 향해 제로가 입을 열었다.

“넌 사람들을 구해. 저놈은 내가 처리한다.”

츠즛-!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의 신형이 죽음에 휩싸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벤은 제로가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허상괴를 처리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우선은 아직 살아있을지 모를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한편, 그렇게 자취를 감춘 제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수백 개의 고치가 있던 공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해 한복판이었다.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제로는….

“이만 튀어 나오지?”

삼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는데, 그에 대지가 들썩이며 노움을 닮은 허상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절 죽이실 생각이라면 그 성급한 인간 또한 데려와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딱히? 기껏해야 군단장급으로 보이는데…,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니야?”

“크흐흐.”

제로의 말에, 허상괴가 기묘한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당신은 강하지요. 어머니와 동격의 존재라 불리던 루시엘. 그조차 당신에게 죽음을 맞이했으니. 하지만….”

콰앙-!

허상괴가 돌연 손을 휘두르자, 그의 발밑으로 거대한 돌덩이가 쏘아졌다.

마치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환영을 불러 일으키는 거대한 돌덩이는 망설임 없이 제로를 덮쳤다.

허나….

“소용없어.”

파스스.

허상괴가 쏘아낸 거대한 돌덩이는, 제로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 모습에 허상괴가 호오~, 하며 낮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의 표정에는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는 오만함에 가까운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자신감이 과하네. 그게 아니라면 넌 자신이 루시엘보다 강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루시엘은 대장군 아닙니까. 비록 어머니보다 약하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

뒷말을 흐리는 허상괴에 제로의 두 눈동자가 의문으로 물들었다.

“이곳은 어머니가 만드신, 어머니의 성역. 어머니의 힘이 충만한 이곳에선 저는 강해지고, 당신은 약해집니다. 이미 눈치채시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허상괴의 말에, 제로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해에 들어온 뒤부터, 묘하게 힘의 운용에 제약이 생겼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수해 전역에 퍼져 있는 대장군급 허상괴의 기운에 의해 힘의 운용을 방해받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나에게 덤벼든 것이라면, 후회할 거다.”

“과연 누가 후회하게 될까요? 저? 아니면…, 이곳이 스스로의 무덤인지도 모르고 기세 좋게 돌입한 당신?”

허상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로가 움직였다.

제로의 신형이 다시 한번 죽음에 휩싸이며 사라지는 순간, 어느새 허상괴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킬 발동, 데스 터치.

스윽.

허상괴의 등을 향해 너뻗어지는 제로의 손에 싸늘하면서도 농밀한 죽음이 휘감겨졌다.

허상괴는 자신의 등 뒤에서 다가오는 사신의 손길에 회피를 취했다.

그의 전신이 무너지며 한 줌의 흙이 되는 순간, 수십 미터 떨어진 대지가 들썩이며 허상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로는 대지를 제 마음대로 헤집고 돌아다니는 허상괴에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건 좀 거슬리겠네.”

“그렇습니까?”

콰가강-!

제로의 중얼거림에 씨익 웃어보인 허상괴가 손을 까딱이자, 제로의 발밑으로 수십 개의 창이 솟아났다.

하나하나가 강철조차 찢어발기는 날카로움을 가진 그것들은, 허상괴의 기운이 휘감겨져 있었는데.

그에 제로의 전신을 휘감은 죽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제로의 육체에 틀어박혔다.

“흐음.”

제로는 왼팔과 오른다리에 틀어박힌 대지의 창에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그 모습에 허상괴는….

“언제까지 그런 여유를 품을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콰가강-!

제로를 향한 공격을 이어나갔다.

허상괴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돌조각이 순식간에 거대해지며 제로를 덮쳤다.

동시에 제로의 발밑에서 다시 한번 대지의 창이 솟아오르고.

머리 위로는 수해에 들어온 이래, 수십 번은 더 겪었을 정도로 진부한.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나뭇잎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내가 존재하는 장소가 곧 죽음이니.”

스킬 발동, 데스 스페이스.

우웅-!

제로를 중심으로 죽음이 퍼져 나가며, 다가오던 거대한 돌덩이도. 발밑에서 솟구치던 대지의 창도. 머리 위로 쏟아지던 날카로운 나뭇잎의 칼날도.

그 모든 것이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바스라졌다.

허나, 제로의 전신에서 뿜어진 죽음은 그에 멈추지 않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는데, 그렇게 제로를 중심으로 거대한 반구형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으음.”

허상괴는 전신을 휘감은 죽음에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제로를 중심으로, 반구형의 형태를 한 수백 미터 내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롯이 죽음 뿐이다.

다만….

“확실히 거슬리네.”

제로는 데스 스페이스의 영역이 고작 ‘수백 미터’에 그쳤다는 것에 불만족스런 표정을 띄었다.

확실히 수해를 가득 메운 대장군의 기운은 상당히 거슬렸다.

뭐, 그래도….

“네놈만 처리하고. 네놈이 어머니라 부르던 대장군도 죽여버리면 그만이지.”

“크흐…, 고작 루시엘에게 승리했다고 너무 오만하군요. 어머니를 죽이겠다? 고작 당신이? 그분의 대적자라 불려 스스로가 신이라도 된것마냥 착각하신 것 아니십니…!”

“그건 모르겠고. 넌 그냥 죽어라.”

푸부부북-!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상괴의 전신에 수십 개의 날카로운 칼날이 꽂혔다.

그에 허상괴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언제…?’

제로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은 허상괴다.

만일 제로가 공격을 가한다면, 그 힘의 운용을 눈치채고 회피를 취하던, 방어를 취하던. 무엇이든 간에 할 자신이 있었다.

다만, 이것은 달랐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이 날 적대하는 듯한 이 기분은…?’

허상괴가 그러한 생각을 품으며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때, 제로가 입을 열었다.

“딱히 설명하기도 귀찮다. 시간 아까우니 그냥 죽어.”

딱-!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상괴의 몸에 틀어박힌 수십 개의 칼이 진동하며 폭발했다.

농밀한 죽음을 머금은, 그 강렬한 폭발에 휩쓸린 허상괴는….

“끄아아아아아아악-!”

폭발에 의한 충격과,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죽음에 집어삼켜지며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 * *

“어머?”

거대한 나무의 중심.

이리저리 얽힌 나무로 이루어진 왕좌에 앉아 있던 여인이 묘한 탄식을 내뱉었다.

“확실히 대적자는 강하네요. 제 영역에서, 제 아이를 죽이다니.”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

그 말을 들은 첸첸과 마도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로가 가까워지고 있다!’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눈앞의 허상괴를 죽이기 위해서 찾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로가 가까워질수록, 자신들의 생존 확률은 높아져만 간다.

그 사실에 첸첸과 마도왕의 두 눈동자 깊숙이에 한 줄기 희망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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