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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183화 (183/200)

제183화

“흠.”

발밑을 내려다본 제로가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욱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나무가 영국을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그것은 마치 전설 속에 존재하는. 로스트 월드 내에서도 그 존재 자체가 불투명하다 여겨졌던 신목, 세계수를 연상시켰다.

다만, 그러한 나무가 집어삼킨 것은 비단 영국뿐만이 아니다.

영국 주변에 있는 벨기에마저 나무의 뿌리에 집어삼켜졌으며, 근처에 있는 프랑스와 독일은 영토의 70%가 침식되었다.

특히나 서유럽을 집어삼킨 거대한 나무의 뿌리는, 단순한 뿌리가 아니었다.

그 뿌리를 통해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로스트 월드에도 없었던 각종 식물들이 자라나 빽빽한 수해를 이루고 있었다.

“어디 보자….”

수해를 내려다보던 제로가 죽음을 퍼트렸다.

서유럽을 집어삼킨 수해 속에 분명 로열 알케미스트 첸첸을 포함한 마학자 길드. 그리고 영국에 터를 잡은 상아탑 길드와, 길드 마스터 대현자 마도왕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파직-!

“으음.”

퍼트린 죽음이 수해에 닿기 무섭게, 녹색과 잿빛의 스파크가 튀기는 것에 제로는 다시 한번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드넓은 수해 전역에, 이 사단을 만들었으리라 예상되는 대장군 급의 허상괴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그 농밀한 기운이 제로가 퍼트린 죽음을 밀어내며, 첸첸과 마도왕. 나아가 생존자들의 수색을 방해했다.

“외부에서의 탐색은 불가능하겠어. 어쩔 수 없지.”

스윽.

귀찮게 되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제로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제로의 몸뚱이가 수 킬로미터 밑에 자리 잡은 수해로 떨어져 내렸다.

“본 드래곤. 넌 이만 들어가 있어.”

크아악!

제로의 명령에 포효를 터트린 본 드래곤이 갈라진 공간 너머로 집어삼켜지며 사라졌다.

그렇게….

“밀림이라…,”

조용히 중얼거린 제로가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나무로부터 뻗어나온 잔가지와, 그 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헤치며 바닥에 착지한 제로는….

“평범한 나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아.”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본디 숲이란 충만한 생명력을 품은 장소였다.

허나, 이곳은 달랐다.

수해를 이룰 정도로 빽빽하게 자라 있는 나무나 수풀 따위에선, 단 한 줌의 생명력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들이 품고 있는 것은 허상괴 특유의 기운뿐.

만일 이 수해를 이루는 식물의 잎사귀 하나라도 섭취하는 순간….

“플레이어라 해도, 잎사귀에 깃들어 있는 대장군의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겠지.”

까다롭게 되었다.

그나마 자력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다면, 생존자들을 구출할 때까지 어느 정도의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식량으로 삼을 만한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

‘첸첸과 마도왕. 그리고 몇몇 플레이어들을 제외한다면 모조리 죽었다고 봐도 무방하겠…!’

츠즛-!

속으로 중얼거리던 제로가 더미 블링크를 발동하며 몸을 빼냈다.

그와 동시에, 제로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더미가 사방에서 튀어나온 덩굴에 휘감기며 퍼억! 하고 터져 나갔다.

“흐음.”

십수 미터 떨어진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제로가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더미가 있던 장소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식물 형태의 허상괴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숲에 깃들어 있는 대장군의 기운 때문에 감지하지 못했어.’

확실히 대장군이 만들어 낸 수해. 아니, 하나의 거대한 던전이라 이걸까.

언뜻 보기에도 상급의 힘을 품은 허상괴들의 숫자가 수십.

이 정도라면….

‘첸첸과 마도왕이라 하더라도 생존해 있을 확률이 줄어들겠는데?’

그나마 한 가지 희망을 품자면. 첸첸과 마도왕 둘 모두가 700레벨을 넘긴, 플레이어들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그들 또한 플레이어 이전에 인간이다.

체력과 마나의 한계는 명확하기에, 최대한 빨리 찾아내야 했다.

“우선 이 거슬리는 것들부터 치워야겠네.”

스킬 발동, 명왕의 숨결.

후-.

제로가 낮은 숨을 토해내자, 사방 수백 미터 내의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동시에….

“얼렸으면 부셔야지.”

스킬 발동, 쇼크 웨이브.

콰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강렬한 충격이 사방을 휩쓸자. 얼어붙은 모든 것들이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문너져 내렸다.

그렇게 제로를 중심으로 거대한 공터가 생기는 순간.

츠즈즈즛-!

기묘한 소리와 함께 제로가 만들어 낸 공터의 경계에 있던 나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퍼트려 제로가 만들어 낸 공터를 뒤덮었으며….

“이러먼 나가리인데.”

명왕의 숨결과 쇼크 웨이브.

두 마법을 통해 만들어 낸 공터가 순식간에 밀림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이 수해는, 대장군급의 허상괴를 죽이지 않는 이상 영원토록 존재할 것이다.

“그러면….”

딱-!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등 뒤로 공간이 갈라지며 외차원의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튀어 나와.”

척-! 척-! 척-!

외차원의 창고를 바라보며 제로가 말하자, 창고가 품고 있는 심연 속에서 수백, 수천 개의 흉흉한 붉은 안광이 떠오르며 무언가가 걸어 나왔다.

외차원의 창고가 품은 심연에서 걸어 나온 것은 망자들이었다.

수천 아니, 수만에 달하는 망자들이 외차원의 창고에서 걸어나와 제로의 명령만 기다렸다.

“생존자를 찾…!”

수만의 망자들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리던 제로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자신이 만들어 낸 공터를 복구한 뒤,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고 있던 식물들이 돌연 날뛰기 시작했다.

사방팔방에서 날카로운 가시와 맹독을 품은 덩굴들이 휘둘러진다.

머리 위로는 강철조차 가볍게 갈라버릴 정도로 날카로운 예기를 품은 나뭇잎이 쏟아져 내렸다.

땅 밑을 헤집으며 움직이는 나무의 뿌리 같은 것들은, 망자의 발목을 휘감으며 대지 깊숙이로 끌어당기기도 했다.

그렇게 숲이 날뛰기 시작하자, 제로가 꺼낸 수만의 망자들이 1분도 채 되지 않아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미치겠네.”

수해에 집어삼켜진 수만의 망자들에, 제로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숲을 지워버리는 것도 불가능.

그렇다고 망자들을 이용해 생존자들을 수색하는 것도 불가.

이렇게 되면….

“내가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말이지.”

다소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었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제로는 스스로가 직접 움직이며 생존자들을 찾아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저벅. 저벅. 저벅.

그러한 생각을 품은 제로는 망설임 없이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수해를 거닐었다.

* * *

“흠.”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쉐에에에엑!

퍼억!

제로의 등 뒤로 만들어진 거대한 흑골의 창이 쏘아지며, 땅을 박차며 튀어 오른 허상괴의 핵을 날려버렸다.

이 수해 내부에는 식물형 허상괴들 뿐만이 아닌, 맹수형 허상괴. 그리고 그것들이 번식해 탄생한 몬스터들 마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맹수형 허상괴나 몬슨터들은 식물형과 비교해 딱히 강하지 않아.’

식물형 허상괴들의 등급이 평균 상급이라면, 맹수형 허상괴나 몬스터들의 등급은 기껏해야 중하급에서 중상급.

이 정도라면 충분히 예상 범위 내의 위험도였다.

애초에 이 드넓은 수해에 식물형 허상괴만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이것들인데 말이야.”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맹수형 허상괴를 바라보던 제로가 바닥을 박차며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제로가 딛고 있던 대지에 무수히 많은 나무뿌리들이 솟아났다 사라졌다.

상대의 적의를 탐지하는 것일까?

아니면 땅의 진동을 탐지하는 것일까.

그나마 피아식별은 가능한지, 땅 밑을 헤집으며 움직이는 나무뿌리들은 집요하리만치 제로의 목숨만 노리고 있었다.

저것에 한 번 휘감기면 지하 수백 미터로 끌려 내려가, 어지간한 플레이어라 하더라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지하의 압력 때문인지, 아니면 육체를 휘감은 나무뿌리가 체액을 빨아먹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 정말 거슬리네.”

스킬 발동, 헬 파이어 타워.

화륵-!

콰아아아!

제로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지는 순간 마법진의 중심부에서 지옥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구름 한 점 볼 수 없게 하늘을 가려놓은 나무를 불태우며 나아가, 그 끝을 모를 정도로 높이 솟아올랐다.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갑작스레 수해 한복판에서 거대한 불기둥, 그것도 지옥의 불꽃이라 불리는 헬 파이어로 이루어진 기둥이 솟아오르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 제로 님이겠지…?”

“그럼 여기서 헬 파이어를 다룰 수 있는 마법사가 제로 님밖에 더 되겠냐?”

“왜, 마도왕 님일 수도 있잖아.”

“마도왕 님이 계신 영국은 수해의 중심지야. 저 기둥은 다소 외곽에서 솟아올랐잖아.”

그렇게 플레이어들이 갑자기 나타난 지옥불의 기둥을 보며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을 때….

“불꽃도 안 통한다 이거냐?”

제로는 식물이 타오르며 사라지는 순간, 그 빈자리를 메꾸는 수해의 재생력에 혀를 내둘렀다.

명계의 냉기로 얼리고 부수는 것도 안 돼.

지옥의 불꽃으로 태워버리는 것도 안 돼.

망자들을 소환해 대신 생존자들의 탐색을 맡기는 것도 안 돼.

도대체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렇게 제로가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수해를 거닐고 있을 때.

돌연 등 뒤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크아앙-!

평범한 호랑이를 수 배 확장한 것만 같은 거대한 덩치의 몬스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제로를 향해 날카로운 엄니를 들어내며 달려들었는데, 그에 제로는….

“이제는 별 잡것이 다 튀어나오네.”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쉐에에에엑!

퍼억!

쏘아진 거대한 흑골의 창이 몬스터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머리를 잃어버린 몬스터의 거체가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던 건가?”

제로는 죽어버린 몬스터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몬스터의 옆구리에는 깊은 자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상처를 통해 죽음이 퍼져 나가며 시체를 잠식해 들어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 죽음이 퍼져 나갔을까?

상처를 통해 퍼지는 죽음이 시체를 전부 집어삼키는 순간….

쿵! 쿵!

죽었어야 할 몬스터가 멀쩡히 일어나며 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옆구리에 새겨진 깊은 자상.

죽은 몬스터의 시체를 언데드로 되살리는 능력.

이 두 가지를 유추해 본다면….

“뭐야, 너였냐? 벤.”

뒤를 돌아보며 말하는 제로에 시선에, 수풀을 해치며 모습을 드러낸 벤이 포착되었다.

그는 폭력을 형상화한 듯한 모양의 갑옷을 걸치고, 악마 형상의 투구를 뒤집어썼다.

등에는 피처럼 붉은 선홍빛 망토가 펄럭였으며, 오른손에는 로스트 월드에서 최흉최악의 마검이라 불리는 데스바인더를 쥐었다.

벤 또한 갑작스레 튀어나온 제로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로? 네가 왜 여기에…?”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벤의 놀람에 제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 * *

“흐음.”

영국에 뿌리를 내리고, 영국을 통째로 집어삼킨 거대한 나무의 내부의 중심.

그곳에 자리 잡은, 나무가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왕좌를 이룬 그것에 앉아 있던 한 여인이 묘한 웃음을 내비쳤다.

그녀는 나뭇잎을 엮어 만든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으며, 그런 그녀의 앞에는….

“괴물 새끼….”

대현자 마도왕.

그리고 로열 알케미스트 첸첸.

그 둘을 시작으로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이 나무에 묶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여인은 그런 플레이어들을 마치 서큐버스처럼 요염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손님이 오신 모양이야.”

손님…?

여인의 말에 첸첸과 마도왕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한편, 여인은 그런 둘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아, 이 농밀한 죽음. 확실히 그분의 대적자라 불릴 만해.”

손님.

농밀한 죽음.

그 두 단어만으로도 첸첸과 마도왕은 여인이 누굴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제로! 그가 온 건가!’

‘제로가 와준 거야!’

첸첸과 마도왕이 속으로 동시에 제로의 이름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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