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그런가…. 단순히 육체를 잃은 것이 아닌, 순수한 힘의 덩어리가 되었구나.”
연신 벼락이 내리치고, 대지가 울리며 거대한 해일이 몰아치는 세계.
그 중심에 앉아있는 허상괴의 왕이 중얼거렸다.
반쯤 감긴 왕의 눈에는, 자신의 손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순백의 구체가 내비쳐졌다.
“수고 많았다, 루시엘. 네놈의 복수는 내가 대신해주지. 그러니….”
뒷말을 흐리던 왕이 돌연 싸늘하게 식은 두 눈동자로 지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당장 움직이지 못하겠느냐.]
우웅-!
강대한 존재감이 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왕을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것이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다.
연신 떨어지던 벼락은 그 자취를 감추었고, 대지진을 동반하는 대지가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던 거대한 해일마저 잠잠해진 세계.
그 세계의 중심에 앉아있던 왕은 다시 한번 두 눈을 감으며 침묵했다.
한편, 그러한 왕의 목소리는 차원과 차원을 뛰어넘어, 지구에 자리 잡은 허상괴들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에 허상괴. 개중에서 군단장급 이상의 허상괴들은….
“명을 받듭니다. 저희들의 왕이시여.”
무릎을 꿇고, 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 * *
“방금 그건….”
제로가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중얼거렸다.
자신은 분명 루시엘이 내지른 광창에 심장이 꿰뚫려 죽었어야 했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루시엘의 힘에 의해 육체를 잃고 외차원으로 추방되었어야 했다.
분명 그럴 텐데….
‘힘의 운용이 자유로워졌다. 지금까지는 거대한 힘에 휩쓸리지 않게 억눌러야 했는데 지금은….’
마치 힘 그 자체가 자신에게 온전히 종속된 느낌이었다.
본래 자신이 품고 있던 힘이었지만, 그것을 온전히 다루게 된 지금은 마치 한번 더 한계라는 이름의 껍질을 깨부순 기분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마워 ■■■….”
제로가 허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언제나 자신의 가슴 한켠에 자리 잡았던. 허나 이제는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옛 연인.
그녀의 도움으로 자신은 스스로가 품은 거대한 힘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 보답으로 더욱 확실하게 지구를. 인류를 구원해 보일게. 설령 그것이 네가 나에게 건 저주. 혹은 족쇄라 하더라도.”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의 몸뚱이가 죽음에 휩싸며 사라졌다.
그렇게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라진 제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어떻게 됐어?”
생명의 추종자들이 모여 난동을 부렸던 협회의 건물.
개중에서도 최상층에 위치한 방에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그곳은 본래 아무도 없어야 할 장소였지만, 지금은 자애의 성자 신성. 그리고 무색의 성자 베이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베이글은 뜬금없이 튀어나와 입을 여는 제로에 후… 한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어찌어찌 처리할 순 있었어.”
“그래?”
베이글의 대답에 제로가 나름 만족스런 미소를 내비쳤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잠잠히 있던 허상괴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허상괴들의 뒤에는 군단장. 대장군. 그리고 왕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
인류의 위기라고도 칭할 수 있는 상황에서 플레이어들끼리 내분을 일으키고, 갈라지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생명의 추종자들의 반응은 어떻지?”
“내가 생명의 수호자라는 것을 납득하는 플레이어가 절반. 내가 생명의 수호자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플레이어가 절반 정도야. 그래도 날 적대하거나 하는 행동은 보이지 않고 있어.”
“흐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다소의 의심은 있을지언정, 베이글의 의도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만으로도 곧 있으면 벌어질 허상괴들과의 전면전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던 신성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제로 님은 괜찮으십니까?”
“뭐가?”
“태평양 쪽에서 거대한 힘의 충돌을 감지했습니다. 그 정도로 강대한 힘을 품을 수 있는 것은 현존하는 플레이어들 중 오직 제로 님뿐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는….”
“군단장. 혹은 아직 자신도 보지 못한 대장군 급의 허상괴이겠지.”
동시에 입을 여는 신성과 베이글에, 제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신성과 베이글은 강했다.
백의 대장군 루시엘.
그리고 제로.
그 둘의 충돌로 퍼져 나간 힘의 편린은 지구 전역을 뒤덮었다.
허나, 그러한 힘의 편린을 느낄 수 있는 존재는 현 플레이어들 중에 몇 없을 것이다.
애초에 플레이어라 해서 모두 감지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고, 그 수준 또한 높진 않았다.
평범한 인간만도 못한, 너무나도 약한 힘은 느낄 수 없었고, 역으로 너무 강대한 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로와 루시엘의 충돌을 감지해냈다는 것은, 그만큼 신성과 베이글. 그 두 존재가 상당한 강자라는 증거가 되어 준다.
“뭐, 일단 생명의 추종자들은 잘 마무리됐다고 보면 되겠고. 문제는 허상괴인데….”
끄덕.
제로의 말에 신성과 베이글.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허상괴들에 의해 전 세계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수만의 허상괴들을 거느리며 움직이는 군단장급 허상괴에 의해 벌써 십여 개의 나라가 지도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외에도, 작은 마을이나 도시 따위의 피해를 합치자면 그 인명피해나, 재산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나 가장 뼈아픈 손실은….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건가.”
어느 정도 대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허상괴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마저도 마을이나 도시를 습격한 허상괴들은 그러한 영역 다툼에서 밀려난 패배자. 혹은 인간을 포식해 강해지겠다는 생각을 품은 것들의 소행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초기에는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플레이어들의 긴장감이 느슨해졌고, 허상괴들으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 기습에 가까운 습격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전체 숫자 중 8%에 해당한다.
어찌 보면 작은 숫자이고. 희생당한 플레이어들의 레벨이 낮다는 것을 보면 별 다른 손해는 아니게 보일 수도 있다.
허나,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
또한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라 하더라도, 그들의 힘의 근원은 게임 시스템. 허상괴들과의 전투로 경험치를 획득하고, 충분히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이상.
그들의 죽음은 뼈아픈 손실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다가왔다.
그렇게 제로와 신성. 베이글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라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파앗-!
돌연 제로의 앞으로 환한 빛이 뭉쳐 들며, 그 속에서 거대한 거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갑작스런 거울의 등장에 신성과 베이글이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거울의 표면에 한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황금빛 로브를 뒤집어쓰고 전신에 포션 병이 주렁주렁 매달린 플레이어, 로열 알케미스트 첸첸이었다.
그녀는 십강 중 하나인 마학자 길드의 길드 마스터임과 동시에, 700레벨을 돌파한 몇 없는 플레이어들의 정점이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첸첸의 주변 풍경이 마치 울창한 밀림에 들어간 것마냥 사방팔방 푸른 초목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꼴이지?”
제로가 입을 열자, 첸첸의 표정이 다급함과 조급함으로 물들었다.
-도, 도와…!
첸첸이 제로를 향해 뭐라 외치는 순간, 거울의 표면이 마치 노이즈라도 낀 마냥 지지직거렸다.
그와 동시에 첸첸의 말이 전부 울려 퍼지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갑작스런 거울의 등장.
거울에 내비쳐진 첸첸. 그리고 그녀의 다급한 도움 요청.
그것에 신성과 베이글은 물론, 제로의 표정마저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비록 첸첸이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가져, 그 전투 능력이 약하다고는 하나.
그녀에게는 연금술로 만들어 낸 인공생명체, 호문쿨루스의 군단이 있다.
또한 공격용 포션들을 사용한다면 어지간해선 첸첸이 위험에 빠질 일은 없을 텐데….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지진이라도 난 양 건물이 우르릉 떨림과 동시에, 사방에서 당황한 인간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갑작스런 혼란에 방을 나선 제로와 신성. 베이글의 두 눈에 비쳐 보인 것은….
“저건… 나무?”
그것은 나무였다.
거대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허나 거대하다… 라는 단어만큼 잘 어울리는 것도 없을 것만 같은 나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나무의 길이는 족히 수십 킬로는 되어 보였다.
특히나 원근감을 무시하는 그 거대함에 나무가 뿌리를 내린 장소를 특정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형님.”
나무를 지켜보던 와중 갑자기 제로의 그림자가 꾸물텅거리더니, 곧 다크 로드 스타툰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것보다도….”
제로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스타툰이 거대한 나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스타툰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허상괴를 사냥하고. 시민들을 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갑작스레 거대한 나무가 출몰하지만 않았어도,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스타툰은 목격했다.
평소와 같이 동유럽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하던 와중, 거대한 나무가 영국을 집어삼키며 솟아오르는 것을.
심지어 저 거대한 나무의 뿌리는 영국을 넘어, 서유럽 전체로 뻗어나갔다.
그로 인해 영국은 물론, 서유럽 전역의 사람들이 플레이어와 일반인을 막론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로열 알케미스트 첸첸. 그리고 대현자 마도왕이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지만 그마저도 한계인 듯 보여요.”
“…….”
스타툰의 말에 제로가 침묵했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
방금 전 뜬금없이 나타났던 거울. 그리고 그 거울에 비친, 밀림에라도 들어간 것만 같았던 풍경과 그 속에 자리 잡은 첸첸까지.
다만, 십강 중, 두 길드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서유럽 전체를 집어삼키는 피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대장군. 루시엘이 아닌 또 다른 대장군이 나타난 것인가.’
다만, 이번에 나타난 대장군은 흑의 대장군 다크니스가 아니었다.
백의 대장군 루시엘의 힘의 근원이 빛이라면, 그의 힘의 근원은 어둠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켜, 허무로 만들어 버리는 그 압도적인 힘은 상상만으로도 전신에 전율이 흐른다.
하지만, 저렇게 거대한 나무를 만드는 힘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어쩔 수 없지.”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공간이 갈라지며 본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다녀오도록 하지. 너희들은 한국의 혼란을 잠재워.”
끄덕.
제로의 말에 베이글과 신성, 스타툰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셋의 대답을 들은 제로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누가 되었든 상관없어. 지구를 위협하는 허상괴는 모조리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