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그런가….”
제로의 반응에 루시엘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다만….
‘방금 그건 뭐였지?’
제로의 등 뒤로 언뜻 내비쳐졌던, 공허한 어둠에 휘감긴 무언가.
그것을 보는 순간,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던 공포가 정신을 장악했다.
특히나, 아직까지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그건 단순한 착각에 불과해.’
루시엘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공포의 잔재를 떨쳐내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로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하던 건 마저 끝내야지?”
“그래, 그래야지.”
제로의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루시엘이 움직였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순백의 창을 놓는 순간, 순백의 창이 대지를 향해 떨어지다….
파스슥.
한 줌의 가루가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제로가 의아하다는 듯 루시엘을 바라봤다.
루시엘은 그런 제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힘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 네놈뿐이라 생각했더냐.”
푸욱-!
말을 내뱉기 무섭게 루시엘의 오른손이 자신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피부를 뚫고, 살을 파헤치며 가슴에 파고든 루시엘의 오른손이 뽑혔을 땐….
“심장?”
루시엘의 오른손에 붉은 피를 꿀렁이며 토해내는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왕의 대적자… 아니, 제로여. 그대의 강함을 인정한다.”
퍼억-!
제로를 향해 그러한 말을 내뱉은 루시엘이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에 루시엘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심장이 산산이 터져 나가며 허공에 흩뿌려졌다.
“뭐 하자는 거지?”
“말하지 않았는가. 그대의 강함을 인정한다고.”
두근-! 두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루시엘을 보고 제로가 입을 열자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루시엘의 전신에서 심장이 맥동하는 듯한 기묘한 무언가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콰아아아-!
심장을 뽑아냄으로써 만들어진 가슴에 뚫린 구멍.
루시엘 스스로가 만들어 낸 그 구멍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와, 루시엘을 집어삼켰다.
루시엘을 집어삼킨 빛이 품은 강렬한 열기는 공기마저 증발시켰으며,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로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환한 빛에 집어삼켜진 루시엘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크기가….
‘점차 커지고 있다.’
왕을 제외한다면 허상괴들의 정점에 서 있다 봐도 무방할 정도의 강함을 자랑하는, 백의 대장군 루시엘.
그가 강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제로가 속으로 그러한 중얼거림을 내뱉을 때, 주변의 모든 것을 증발시키는 열을 품은 환한 빛무리가 사라졌다.
아니, 빛무리의 중심에 있는 루시엘에게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나타난 루시엘의 외형은 상당히 변해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순백의 머리카락이 오색찬란하게 빛난다.
두 눈동자는 동공까지 새하얗게 물들었으며, 눈동자에는 마치 눈물을 형상화한 것 같은 순백의 선이 한 줄기 그어졌다.
가슴에는 심장을 뽑은 영향인지 공허한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것을 가려주듯 전신에 새하얀 천이 이리저리 둘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스윽.
루시엘이 손을 들어 올리자, 펼쳐진 손 위로 빛이 뭉치며 하나의 창으로 변했다.
“후-. 이 모습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군.”
오싹-!
변화를 끝낸 루시엘이 입을 여는 순간, 제로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음에도, 전신의 피부가 저릿저릿하게 울린다.
이것이….
‘백의 대장군, 루시엘의 진정한 힘.’
펄럭-!
제로가 착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자, 루시엘이 등에 달린 열두 쌍의 날개를 펄럭였다.
그것은 오른손에 쥐어진 광창과 마찬가지로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러한 열두 쌍의 날개가 펄럭이는 순간.
사방으로 광풍이 휘몰아치며 발밑의 바다가 밀려났다.
“흠. 그분의 허락 없이 본신을 드러낸 영향인가. 내가 이 차원에 속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분 정도로군.”
루시엘이 비어있는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중얼거렸다.
10분.
존재 자체만으로 하나의 차원마저 붕괴시켜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루시엘이, 본연의 강함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
10분이 지난다면, 루시엘은 스스로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육체가 붕괴해 허상계로 추방될 것이다.
“10분… 인가.”
“그러하네.”
제로의 중얼거림에,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스스럼없이 드러내다니.
이것은 절대적인 강함을 품고 있기에 드러나는 자신감일까. 아니면 단순한 오만함 때문일까.
아니, 그 무엇이 되었든….
“너무 걱정하지 마. 네놈을 죽이는 데 10분도 필요 없으니.”
“그거 즐겁겠구나.”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와 루시엘.
그 둘이 돌연 충돌하는 순간, 거대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 * *
“왜 그러지? 아까보다 반응이 반 박자 늦어졌구나.”
“쯧-!”
연신 오른손에 쥔 광창을 내지르며 말하는 루시엘에, 제로가 낮게 혀를 찼다.
확실히 제약을 풀어, 본래의 힘을 드러낸 루시엘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것은 전 세계의 플레이어들이 힘을 합쳐도 놈에게 생채기 하나 입힐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직은 할 만해.’
스킬 발동, 망자의 역린.
끼아아악-!
제로를 중심으로 귀곡성이 울려 퍼지며, 모습을 드러낸 수천의 망자들이 창의 형태로 변해 루시엘을 향해 쏘아졌다.
하늘을 가득 메운 수천 자루의 창.
그것들 하나하나에는 제로가 품은 농밀한 죽음마저 깃들어 있어, 제아무리 루시엘이라 하더라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재미있구나!”
본래의 성정이 전투광에 가까운 것일까?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목숨에 위협이 될 만한 공격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고 있음에도, 루시엘의 입가에는 진심으로 ‘즐겁다’라는 감정이 깃든 미소가 걸쳐졌다.
“이 정도로 몸을 움직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전투광 자식.”
콰가가강
허공에 죽음과 빛으로 이루어진 선이 뒤엉키고, 얽힌다.
그렇게 얽히고설킨 두 색의 선이 충돌하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연신 일어나며 주변이 모든 것을 증발시켰다.
만일 둘의 전투를 제3자가 지켜보고 있노라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신들의 싸움… 이라고.
그 정도로 제로와 루시엘.
그 두 존재의 강함은 이치를 벗어난, 말 그대로 초월적인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그냥 좀 뒤져.”
스킬 발동, 데스 로어.
크아아아-!
제로의 입이 쩍! 벌어지며 거친 포효가 터져 나왔다.
농밀한 죽음이 담긴 포효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는데, 그러한 포효에 휘말린 루시엘이 돌연 비틀거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으음-! 나의 정신마저 뒤흔들 정도의 거친 포효라. 즐겁구나!”
콰가강-!
허나, 몸을 비틀거리기도 잠시.
데스 로어에 의해 뒤흔들린 정신을 추스른 루시엘이 등에 달린 열두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다시 움직였다.
“어디 한번 막아 보거라.”
루 가니아.
콰가가가강-!
창이 분열된다.
하나였던 창이 두 개로.
두 개였던 창이 네 개로.
네 개였던 창이 여덟 개로.
루시엘의 오른손에 쥐어진 창은 순식간에 분열해 하늘을 뒤덮고, 제로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쏟아졌다.
그 모습에 제로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저건 단순한 초고속 찌르기야. 다만…, 내 눈에도 창이 분열한 것으로 보일 정도의 스피드라니.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강함이야?’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가 전신에 농밀한 죽음을 둘렀다.
그와 동시에….
콰가강-!
하늘을 가득 메우며 쏟아지는 광창의 폭격이 제로의 전신을 두드렸다.
광창이 충돌할 때마다 거대한 충격이 전신을 뒤흔든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음으로 만든 방패는 산산이 부서지고. 그 속에 있는 자신의 연약한 육체는 한 줌의 가루도 남기지 못하고 증발하게 된다.
그렇게 육체를 잃어버린다면….
‘육체가 없는 난 외차원으로 추방되겠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인간의 인지를 초월한, 말 그대로 신이라 불리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강함을 선보이는 루시엘이었지만….
‘왜 내가 질 것 같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걸까?’
이 또한 생명을 집어삼킴으로써, 한 발자국 더 진정한 죽음에 가까워졌기 때문일까?
제로가 속으로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이만 죽어라.”
루 데니아.
쩌어엉-!
수천, 수만 개로 분열했던 창이 한 점으로 모여 하나가 되고.
그렇게 하나가 된 창이 광속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로 제로의 심장을 노리며 쏘아졌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빛으로 이루어진 창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물리력을 동반해, 창이 움직이는 궤적에 따라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고 비틀리며. 종내에는 무너져 내리기까지 했다.
‘이건 막을 수 없다!’
그 강대한 힘에 처음으로 제로의 두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막을 수 있다.
허나, 그러기 위해선 죽음을 한 점에 뭉쳐 저 힘에 대항해야 하나….
‘시간이 없어….’
시간이 부족했다.
광속마저 뛰어넘은 속도로 움직이는 광창의 날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대로 있으면 자신은….
‘심장이 뚫리고, 육체를 잃어버린다.’
육체가 붕괴한다 한들, 제로가 소멸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지구에서 추방당해 외차원으로 넘어갈 뿐이다.
하지만….
‘그럴 순 없…!’
제로가 속으로 그러한 외침을 터트리는 순간, 돌연 제로의 등 뒤로 죽음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로의 의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개입에 의한 현상.
그에 제로의 당혹감이 배로 높아졌다.
‘무슨-!”
제로가 놀라 속으로 외치는 순간, 등 뒤에 뭉친 죽음이 반전되어 생명력이 되었다.
동시에….
-이렇게라도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어 나는 기뻐, 강한. 아니지. 지금은 제로려나?
죽음이 반전되어 이루어진 생명.
그 생명이 뭉치며 하나의 여인의 형상을 띄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여인은 제로 또한 잘 알고 있는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부탁이 있었기에 자신이 지구에 남아있으며.
그녀가 있었기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
생명으로 이루어진 여인을 바라보며 제로가 입을 열었으나, 입에서 흘러나온 그녀의 이름은 여전히 이해할 수도, 인지할 수도 없었다.
그런 제로의 반응에 여인이 싱긋 웃어 보였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스윽.
제로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와 목소리로 입을 열던 여인의 시선이 루시엘에 닿는 순간.
죽음보다 더욱 싸늘하게 식어갔다.
-고작 저런 닭둘기 하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넌 약하지 않아.
그러한 말을 내뱉은 여인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언뜻 보면, 달팽이보다 느릿해 보이는 움직임이다.
허나, 그렇게 움직인 여인의 손이 광속보다 빠르게 내질러지는 루시엘의 창을 붙잡았다.
“무슨-!”
자신이 내지른 광창이 붙잡혔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루시엘이 당혹감 어린 목소리를 내뱉는 순간, 생명의 여인이 한 줌의 가루가 되어 흩어져 제로에게 흡수되었다.
-지구를…. 고향을 부탁해….
제로는 여인이 사라지기 직전,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되뇌며 루시엘을 바라봤다.
“이만 끝내자.”
“어리석…!”
푸욱-!
제로의 말에 성난 외침을 토해낸 루시엘이 다시 한번 광창을 내지르려는 순간, 농밀한 죽음과, 그에 상반되는 생명이 휘감긴 제로의 손이 움직였다.
천천히 내뻗어지는 제로의 손은 루시엘의 두개골을 부드럽게 파헤치며 들어가, 그 뇌를 움켜쥐어 터트렸다.
“커-! 헉-!”
뇌. 나아가 머리의 일부분이 터져 나간 루시엘은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전신이 빛으로 승화해 허상괴들이 튀어나왔던 구멍으로j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