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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180화 (180/200)

제180화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이 몇천 년 만일까. 즐겁구나, 왕의 대적자여….”

날개를 펄럭이며 천천히 내려오는 루시엘의 전신이 환한 빛무리에 감싸였다.

두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강렬한 빛이 사그라들며 드러난 루시엘의 외형이 변했다.

전신에 걸쳐진 새하얀 슈트는, 순백의 갑옷으로.

흔히 외눈 안경이라 불리던 모노클은 얼굴을 가리는 투구로 변했다.

지팡이는 창으로 변해, 루시엘의 오른손에 강하게 움켜쥐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등에 달린 열두 쌍의 날개까지.

본래의 강함을 드러낸 신성과 모습은 비슷했으나, 풍기는 강함은 차원이 달랐다.

“그러고 보니 이 차원에도 나의 피를 계승한 인간이 있더구나.”

‘역시 신성… 을 말하는 건가.’

루시엘의 말에 제로가 미미하게나마 인상을 찌푸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루시엘은 단순히 신성과 비슷한 것을 넘어 신성의 종족인 하프 엔젤. 흔히 천사라 불리는 종족의 기원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네가 천사라는 종족의 시작이라면, 나는 죽음 그 자체야.”

스윽.

그러한 말과 함께 네크로노미콘을 들어 올리는 제로에, 루시엘이 클클 웃음을 흘렸다.

“그러하냐. 그렇다면 한번 음미해 보도록 하겠다. 그대, 왕의 대적자라는 죽음을.”

파앙-!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시엘이 움직였다.

등에 달린 열두 쌍의 날개가 움찔하는 순간, 루시엘의 신형이 한줄기 새하얀 선으로 늘어나며 제로를 향해 쏘아졌다.

가볍게 초음속을 돌파한 속도로 루시엘이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소닉 붐이 휘몰아치며 바다가 출렁였다.

“너무 쉽게 죽지는 말게나. 몇천 년 만에 몸을 움직였으니, 나 또한 다소 즐겨야 하는 법 아니겠느냐.”

쉐에엑-!

순식간에 제로 앞에 도착한 루시엘이 오른손에 쥐어진 순백의 창을 내질렀다.

휘황찬란한 빛에 휘감긴 순백의 창날은 망설임 없이 제로의 심장을 노렸으며, 그에 제로는….

“고작 이 정도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쩌엉-!

전신에 죽음을 두르는 것으로 루시엘이 내지른 순백의 창을 막아냈다.

두 눈을 멀게 만들 것만 같은 강렬한 빛을 휘감은 순백의 창날과, 제로가 내뿜은 죽음이 뭉쳐 만들어진 방패가 충돌하는 순간.

사방으로 거대한 충격이 휘몰아치며 바다가 주저앉았다.

“흐음, 죽음이라. 확실히 개념에 가까운 힘이다 보니 다소 거슬리는구나.”

순백의 창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죽음에, 루시엘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허나, 내가 품은 힘 또한 개념에 인접한 힘. 진정한 빛의 공포를 느끼게 해주마.”

파앗-!

열두 쌍의 날개를 활짝 피며 말하는 루시엘의 전신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평범한 인간은 물론, 같은 허상괴나 어지간한 플레이어라 하더라도 두 눈을 태워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그와 동시에….

“루 파엔.”

지이잉-!

루시엘이 뭐라 중얼거리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빛무리에서 수백 개의 섬광이 쏘아졌다.

하나하나가 강렬한 열기를 품은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며 제로를 향해 나아갔다.

제로는 자신을 향해 쏘아진 수백 개의 강렬한 광열의 섬광에, 낮게 혀를 차며 움직였다.

허나 수백 개의 광열로 이루어진 선은 마치 유도 기능이라도 달려 있다는 듯, 지옥 끝까지 따라올 기세로 제로의 뒤를 쫓았다.

“확실히 대장군. 하지만, 고작 이 정도의 힘이 전부는 아니겠지?”

허공에 멈추며 뭐라 입을 여는 순간, 이번엔 제로를 중심으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잿빛으로 물들어 있는 그것은 지구를 집어삼킬 기세로 빛나고 있었으며, 그러한 잿빛의 빛무리는 루시엘의 그것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명계의 냉기를 품었다.

스킬 발동, 데스 이레어저.

지이잉-!

제로의 손 위로 뭉친 잿빛의 빛무리에서, 수백 개의 선이 튀어나와 루시엘의 광열과 충돌했다.

그 둘의 충돌은 폭발음도, 파괴음도 울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로를 잡아먹으며 이리저리 얽히다, 사그라들며 사라질 뿐이다.

“재미있구나.”

잿빛의 선과 순백의 선.

그 둘이 이리저리 얽히며 공멸하는 순간, 루시엘이 창을 내질렀다.

찰나의 찰나의 찰나.

인간은 인지조차 할 수 없는 극히 짧은 시간에 걸쳐, 공간과 공간을 뛰어넘으며 내질러진 창이 제로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크윽-!”

제로는 순백의 창이 스쳐 생긴 상처를 통해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에 억눌린 신음을 토해냈다.

순배의 창을 휘감은 빛은 평범한 빛이 아니었다.

격이 낮은 존재는 빛에 노출되기만 해도 존재 자체가 사라질 정도로 흉악했다.

특히나 그 빛이 품은 열기는 마치 태양의 중심부처럼 강렬해, 창날이 스쳐 지나간 제로의 옆구리는 끔찍한 화상이 낙인처럼 새겨졌다.

“칫. 먹어 치워버려, 사룡 덴드로.”

쩌억-!

낮게 혀를 차며 말하는 제로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지며, 가슴이 쩍! 갈라졌다.

갈라진 가슴 너머로는 짙은 어둠이 자리 잡았으며, 그 어둠 속에서 불과 몇 분 전.

세 마리의 인공 허상괴, 스캐빈저를 집어삼킨 사룡 덴드로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흐음. 확실히 쓸만한 힘을 품은 권속이로다.”

쩌엉-!

지금까지 누구 하나 반응하지 못했던 사룡 덴드로의 속도였으나, 대장군은 그 격이 남다르다는 것일까.

빛의 대장군, 루시엘이 손에 쥔 순백의 창을 내지르는 순간,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며 농밀한 죽음을 흩뿌리던 사룡 덴드로의 머리가 허공에 멈췄다.

그 둘의 충돌에 사방으로 강렬한 충격이 휘몰아쳤으나, 그 누구도 그 충격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저….

“돌아와.”

사룡 덴드로의 힘으로는 눈앞의 존재, 백의 대장군 루시엘을 죽일 수 없다.

그것을 깨달은 제로는 순백의 창날에 찔려, 한줄기 피를 흘러내리는 사룡 덴드로를 회수했다.

“재주가 바닥난 것이더냐.”

“설마.”

씨익 웃으며 말하는 루시엘에, 제로 또한 미소를 내비치며 응답했다.

“사룡 덴드로는 단순한 도구일 뿐이야.”

파라랏-!

그렇게 말하는 제로의 손에 쥐어진 네크로노미콘의 페이지가 미친 듯이 넘어갔다.

그와 동시에….

죽. 어.

싸아아아아.

제로의 입에서 농밀한 죽음이 깃든 목소리, 사언이 울려 퍼졌다.

목소리에 닿는 모든 것에 거부할 수 없는. 공평한 죽음을 선고하며 퍼져나간 그것은 곧 루시엘의 전신을 휘감으며 귓가를 파고들었다.

“흠.”

루시엘은 자신의 귀를 파고들며 들어온 제로의 사언에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사언을 듣는 순간, 전신의 힘이 쭉! 빠지며 일순 몸을 비틀거리는 루시엘.

허나, 지금까지 모든 것에 평등한 죽음을 선사했던 사언마저 루시엘을 죽음으로 인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쉽구나. 나름 그대의 비장의 패 중 하나일 터인데, 나에게 통하지 않았으…!”

“방금 그걸로 널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흠칫-!

언제 움직인 것일까?

갑작스런 탈력에 비틀거린 몸을 추스르며 입을 연 루시엘의 등 뒤로 제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루시엘이 등에 달린 열두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제로와 거리를 벌리려는 찰나!

“어딜 도망가?”

스킬 발동, 생명을 집어삼키는 뱀.

샤아악-!

제로의 손가락이 거리를 벌리는 루시엘을 가리키는 순간.

그 손가락 끝에서 자그마한 뱀이 튀어나와 루시엘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은 겉보기에 평범한, 아무런 위력도 없어 보이는 뱀이었으나, 그게 뭔지 아는 자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것이다.

뱀의 입에 달린 두 개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흐르는 것은 독이 아닌 죽음이다.

한번 물린다면, 격이 낮은 초월체라면 소멸을 피하지 못하며. 격이 높은 초월체라 하더라도 다소간의 기나긴 잠에 빠져 죽음을 밀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성가신 것을 꺼내는구나.”

파앗-!

전신으로 강렬한 열기를 품은 빛을 터트리는 루시엘이었다.

강렬한 열기를 품은 빛무리에 노출된 죽음을 머금은 뱀이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체크메이트.”

흠칫-!

언제 움직인 것일까?

루시엘이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제로의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동시에 상체를 돌리며, 등 뒤에 있을 제로를 향해 찬란한 광휘를 휘감은 순백의 창을 내질렀으나….

“어딜 보고 있는 거냐?”

흠칫-!

강하게 내질러진 순백의 창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로질렀으며.

등 뒤에 있어야 할 제로는 공간을 가르며 루시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불러들인 뱀에 상당히 당황했나 봐? 고작 이 정도의 눈속임에 넘어갈 정도면 말이야.”

스윽.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가 루시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허공을 가로지르며 내뻗어지는 제로의 손에는 농밀한 죽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루시엘은 점차 가까워지는, 농밀한 죽음을 휘감은 제로의 손에 속으로 외쳤다.

제로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이 무형의 압력을 만들어 내 전신을 짓누른다.

평소 같았으면 이 정도의 압력, 충분히 찢어발기며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황한 나머지 몸의 균형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창을 내지른게 실수였다.

무너진 균형을 바로잡으며 몸을 추스리는 것은 찰나의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았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제로의 손은 그보다 빠르게 자신의 몸에 닿을 것이다.

그렇다면….

“놈!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콰아아앙-!

농밀한 죽음을 휘감은 제로의 손에 닿는 순간, 루시엘은 전신에 두른 순백의 갑옷을 터트렸다.

수백, 수천의 조각으로 나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갑옷의 파편에는 루시엘의 빛이 담겨 있었으며, 그러한 것에 닿는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제로 또한, 설마하니 두르고 있던 갑옷을 폭발시킬 것임은 예상하지 못하고 그대로 갑옷의 파편에 노출되었다.

“크윽-!”

다급히 죽음을 둘러 방어하기는 했으나, 몇 개의 조각이 그 방어를 뚫고 들어와 육체에 파고들었다.

강렬한 열기와, 죽음을 밀어내는 빛이 깃들어 있는 파편이 육체를 파고드는 순간. 제로가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성가시게 하기는…!”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왕의 대적자여.”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루시엘은 육체를 잠식하며 퍼져 나가는 죽음에 인상을 찌푸렸으며, 제로는 역으로 육체에 틀어박힌 조각에서 흘러나오는 열기와 빛무리가 죽음의 기운과 육체를 불태우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한편, 갑옷이 터져 나가 드러난 루시엘의 육체는 말 그대로 신의 예술품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마치 천상의 조각가가 일평생을 바쳐 깎아내린 듯, 그 아름다운 육체는 한번 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눈을 떼지 못하리라.

“그나저나 대단하구나. 설마하니 이 정도로 날 몰아세울 줄이야. 그대와 같은 강함을 품은 적을 만난 것이 얼마 만일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왕의 대적자여.”

“딱히 자랑스럽지는 않아. 그리고…, 고작 네놈에게 고전해서야 왕을 죽일 순 없겠지.”

“크흐흐.”

오만한 제로의 말에 루시엘이 낮은 웃음을 토해냈다.

“대적자여. 대적자여. 어리석은 대적자여. 그대는 진정으로 왕을 죽일 수 있다 여기는 것인가. 태초의 빛의 첫 번째 자식인 나조차 왕을 이기지 못했거늘.”

…?

루시엘의 말에 제로의 두 눈동자에 의문이 들어섰다.

무슨 말일까?

허나, 루시엘은 그런 제로의 의문을 해소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제 할 말만 내뱉었다.

“대적자여. 그대에게 다시 한번 권유하는 바이다. 하찮은 반항 따윈 접고, 그대 또한 왕의 은혜를 받아 나의 동료가 되지 않겠는…!”

오싹-!

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던 루시엘의 두 눈동자에 일순 공포가 차올랐다 사라졌다.

루시엘은 목격했다.

제로의 해골 부분에 자리 잡은 공허한 눈구멍.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사신의 흉안을 통해, 자신을 불쾌감 가득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무언가’를.

그 무언가가 뭐라 속삭이는 순간, 루시엘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왕에게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심이 전신을 엄습하는 것을 깨달았다.

한편 제로는….

“지랄하고 있네.”

자신 보고 허상괴가 되라는 되도 않는 제안을 하는 루시엘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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