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그럼 잘 부탁한다.”
“어떻게든 처리해 보겠습니다.”
제로의 말에 신성이 대답하고, 베이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둘의 반응에 제로는 망설임 없이 본 드래곤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자신의 머리 위로 제로가 올라서자, 본 드래곤은 망설임 없이 뼈의 날개를 펄럭이며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제로가 사라지자….
“무색의 성자, 베이글 님. 저희도 이제 움직이도록 하지요.”
“그래야지.”
신성의 말에, 베이글이 다소 축 처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베이글은 팔자에도 없을 여장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그렇게 본 드래곤을 통해 이동하고 있는 제로는 발밑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저렇게 많이 남아있었던가?”
구름을 뚫고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바다에는 수많은 허상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최하급부터 최상급까지. 다양하게 뒤섞인 그것들은 정확히 한국을 노리며 이동하고 있었는데 ….
만일 저것들이 한국에 들이닥친다면 대재앙이 벌어질 것이다.
“저놈이 사령탑인가?”
무심히 허상괴들을 지켜보고 있던 제로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수백만…, 혹은 수천만에 달하는 허상괴들 사이로 유독 강렬한 기운을 품은 허상괴 한 마리가 제로의 기감에 포착되었다.
최상급 허상괴마저 아득히 뛰어넘는 기운은, 놈이 최소 군단장급의 허상괴라는 것을 알려줬다.
“형태는 대해의 지배자 레비아탄과 비슷한데…, 그놈이 뱀에 가까웠다면 저놈은 ‘용’에 가까운 형태네.”
외형만 보면 레비아탄보다 지금 발견한 허상괴가 더욱 강력할 것이다.
허나 레비아탄은 대해의 지배자라 불릴 만큼, 물이 있는 장소에선 최강을 자랑하는 허상괴.
그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저 수룡은 레비아탄에 비해 그 강함이 떨어지리라.
물론….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제로가 돌연 한 걸음을 딛는 순간, 발밑의 바다를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농밀한 죽음과, 난폭한 존재감을 여과 없이 흩뿌리며 떨어지는 제로의 존재를 느낀 것인지 한국을 향해 이동하던 허상괴들의 움직임에 돌연 변화가 생겼다.
최하급부터 하급, 중급의 허상괴들은 본래의 목적대로 한국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지만, 상급부터 몇몇 최상급의 허상괴들은 그 궤도를 틀어 제로를 향해 움직였다.
키아아아악-!
카악!
그라라락!
상급 이상의 허상괴들은 순식간에 가까워진 제로를 향해 살기를 터트리며 공격을 감행했다.
오징어를 닮은, 허나 그 크기는 자그마한 섬과 비슷한 허상괴가 수백 개의 촉수를 휘둘렀다.
전신에서 서늘한 냉기를 흩뿌리는, 거대한 상어의 형태를 한 허상괴는 허공을 뛰어올라 제로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난 거대한 입을 들이밀었다.
해마를 닮은 허상괴는 그 입에서 물대포를 쏘아대고, 그 뒤를 이어 다종다양한 형태를 한 허상괴들의 공격이 잇따랐다.
본래 같았으면 그 격이 낮다 한들, 이만한 숫자의 공격은 제로에게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생명의 수호자가 품은 생명을 먹어 치우고, 한 꺼풀 한계를 벗어 진정한 죽음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지금의 제로에게 있어 이 정도 공격은….
“통하지 않아.”
딱-!
무심히 중얼거린 제로가 손가락을 튕겼다.
검지와 중지가 교차하며 딱!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제로를 중심으로 거대한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왔다.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죽음의 탁류는 수백, 수천의 허상괴들의 공격을 집어삼켜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으며.
“쏟아져라.”
수천 자루의 창의 형태로 변한 죽음이 허상괴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키아아악-!
크라락!
끼에에엑!
농밀한 죽음으로 이루어진 창이 꽂히며, 허상괴들의 입에서 고통과 공포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로가 만들어 낸 창은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그 증거로 저들의 육체를 창이 파고들었음에도, 사소한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허상괴들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제로가 만들어 낸 창을 이루는 힘은 죽음. 그것이 허상괴들의 육체를 잠식하듯 흘러 들어가, 허상괴들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그 강함이 약한 상급 이하의 허상괴들은 채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육체가 말라비틀어진 미라와 같은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다소 강함과 격이 높은 최상급 허상괴들은 어느 정도 버티는 듯 보였으나, 그마저도 모든 생명을 죽음에게 갉아 먹혀 절명하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만 움직이지?”
마치 계단을 내려오듯 천천히 허공을 걸어 내려오는 제로의 말에, 바다 깊숙이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허상괴가 으득! 거칠게 이를 갈았다.
‘저놈이 왕의 대적자…! 들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확실히 그 힘은 그분의 대적자라 불릴 만하군. 하지만!’
콰가가-!
일순 바다가 터져 나가며 거대한 수룡… 아니, 해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터져 나간 바닷물에 휩쓸려 죽어버리는 다른 허상괴들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래도 네 부하들인데 너무한 거 아니야?”
“병졸들의 목숨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나의 목표는 단 하나. 네놈을 죽이는 것뿐이다.”
“레비아탄보다 약한 네놈이…, 그게 가능할까?”
으득-!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제로에, 해룡이 다시 한번 거칠게 이를 갈았다.
수의 군단장 레비아탄.
다른 말로는 대해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존재.
그것은 언제나 자신과 비교 대상이었다.
같은 대해를 무대로 함에도 불구하고, 그 강함이 조금 더 뛰어나다고. 그 덩치가 조금 더 크다고.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이미 죽어버린 그따위 버러지와 날 비교하지 말란 말이다!”
콰가강-!
버럭 외친 해룡의 주위로 바닷물이 뭉치며, 곧 거대한 대포와도 같은 폭격이 제로를 향해 쏟아졌다.
수백 톤의 바닷물이 압축된 탄환 하나하나가 가진 위력은 마스터 레벨의 기사. 그것도 방어에 특화된 플레이어조차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으며, 강력했다.
하지만….
“우리 솔직해지자고. 솔직히 말해서 네가 레비아탄보다 약한 건 맞잖아?”
“난… 놈보다 약하지 않다! 나야말로 진정한 대해의 지배자란 말이다!”
콰가강-!
제로의 말에, 활화산과도 같은 분노를 터트린 해룡이 다시 한번 폭격을 쏟아냈다.
수백 톤의 바닷물이 압축된 탄환 외에도, 바닷물은 그 끝이 날카롭게 벼려진 삼지창, 화살, 검 따위의 형태로 제로를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놈의 공격 하나하나는 확실히 군단장급 이상의 허상괴의 강함을 선보이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네.”
해룡이 토해낸 공격들은 제로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저 제로의 주변을 부유하는 죽음과 닿는 순간, 모든 것이 사그라들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해룡의 두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으며, 그 표정이 와락! 악귀와도 같이 일그러졌다.
“네놈이… 네놈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콰아아아-!
터져 나오는 분노와 함께 버럭 외친 해룡의 주변으로,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용오름과도 비슷해 보였으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저건 좀 성가시겠는데.”
해룡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며 솟아난 그것의 속에는, 모든 것을 박살 낼 것만 같은 파괴적인 뇌전이. 그리고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만 같은 스산한 냉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죽어라-!”
콰가가가-!
뇌전과 냉기를 품고, 하늘을 뚫어버릴 기세로 솟아오른 용오름이 요동치며 제로를 향해 쏘아졌다.
피아식별 없이 쏘아진 용오름은 품고 있는 뇌전과 냉기로 주변의 허상괴들마저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며 움직였다.
“뭐, 좀 까다롭기는 한데… 그뿐이네?”
딱-!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제로를 중심으로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해룡이 만들어 낸 용오름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었다.
허나 해룡이 만들어 낸 것이 바다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폭풍이라면, 제로가 만들어 낸 것은 그것의 역풍으로 하늘에서 바다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또한….
“아직 멀었어.”
스킬 발동, 인챈트-데스 라이트닝.
스킬 발동, 인챈트-명계의 냉기.
해룡이 만들어 낸 것처럼 제로가 만든 폭풍에도 강렬한 뇌전과 냉기가 깃들었다. 다른 점은, 제로의 것에 깃들어 있는 뇌전은 물리적인 파괴력만 가진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태워버렸고, 냉기는 모든 생명을 얼려버리는 명계의 냉기였다.
그렇게 제로가 만들어 낸 역-용오름과, 해룡이 만들어 낸 용오름이 충돌하는 순간….
콰아아-!
거대한 폭발과 함께 터져 나온 빛이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로 뻗어나갔다.
“크으으….”
거대한 폭발과 함께,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던 빛이 사그라들고 드러난 풍경은 경악 그 자체였다.
드넓은 바다는, 출렁이는 파도마저 얼어붙어 거대한 얼음 섬이 만들어졌다.
그 속에는 수천, 수만 마리의 허상괴들이 죽음을 맞이한 채 갇혀 있었다.
그리고….
“허억-! 허억-!”
폭발에 깃들어 있는 데스 라이트닝과, 명계의 냉기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한계 이상의 힘을 사용한 것일까?
얼음 섬의 경계에 존재하는 해룡은 상당히 지친 모습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네… 놈…!”
“워, 아직도 살아 있었어? 끈질긴 거 하나는 레비아탄보다 뛰어나네.”
“날… 얕보지 말란 말이다!”
후읍-!
다시 한번 이어진 제로의 비아냥에, 해룡이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에 해룡의 가슴이 한계 이상으로 부풀어 오르며, 쩍! 벌려진 거대한 입에는 방대한 기운이 하나의 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브레스…?’
제로는 스스로가 품은 마지막 생명마저 불태워, 생애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해룡에 쯧! 하고 혀를 찼다.
아무리 스스로의 생명을 불태워, 한계 이상의 공격을 감행한다 한들….
“아직도 힘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 거냐. 그러니까 네가 레비아탄보다 약하다는 거야.”
“웃… 기지 마라!”
콰아아-!
버럭 외친 해룡의 입에서 한줄기 푸른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스스로의 생명마저 불태워 발현한 생애 최후의 일격, 브레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발현된 브레스의 위력은, 해룡 스스로 대장군조차 죽일 수 있으리라 여겼다.
“소용없다니까. 조금 놀아주니 주제도 모르고 기어 올라오네.”
스윽.
제로가 무심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브레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에 제로의 전신에서 농밀한 죽음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며, 순식간에 가까워진 해룡의 브레스와 충돌했다.
아니, 그것은 충돌이 아니었다.
그것은 포식.
제로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죽음이, 해룡의 생명이 담긴 브레스를 흔적도 없이 먹어 치워 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해룡은 죽어가는 눈으로 하하…, 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왕… 이시여….”
왕을 향해 마지막 단말마를 내뱉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해룡.
그와 동시에….
“멍청한 놈.”
죽어버린 해룡의 곁으로 다수의 허상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하나가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그들은 누가 봐도 군단장 그 이상의 허상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