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제로…, 님이십니까?”
“그럼 누구로 보이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신성에, 제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그녀’를 흡수한 이래, 자신은 한 꺼풀 한계를 벗어던졌다. 그 영향으로 외형 또한 상당한 변화를 이루었으니, 신성이 몰라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편,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제로의 반응에 으음…, 하는 낮은 울림을 토해낸 신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생명의 수호자. 그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제로의 반문에 신성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제주도가 있는 방향에서, 거대한 죽음과 생명이 충돌하는 것이 느껴졌다.
제로가 중국에서 무왕과 충돌했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죽음과 생명의 충돌 또한 상당히 거대해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은 전부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급하게 길드원들을 파견한 것이었지만.’
제로가 제주도를 벗어나기 전 만났던 플레이어들.
그들은 죽음과 생명의 충돌을 느끼고 신성이 급파했던, 신성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쯤 그들 외에도 다양한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 속속들이 제주도로 모여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생명의 수호자를 뒤따르던, 생명의 추종자라는 단체에 소속된 플레이어들 또한 있으리라.
“그들의 반발이 상당할 것입니다. 또한….”
“허상괴들을 상대할 전력이 줄어들었다?”
“예.”
지금도 간간이 하늘에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 허상괴들이 지구로 넘어오고 있다.
비록 그 등급은 최하급에서 하급. 높아 봐야 중급이었으나, 언제 어느 때 상급이나 최상급. 혹은 군단장급 이상의 허상괴가 넘어올지 모른다.
그에 반해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줄어만 가고 있었다.
일반인들 중 새로이 플레이어로 각성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허상괴와의 전투에서 죽어가는 플레이어들이 속출하기 때문이다.
즉, 적은 늘어만 가는데 아군은 줄어만 간다.
그러한 상황에서 비록, 협회에 협조적이지는 않지만, 생명의 수호자라는 강력한 플레이어의 죽음은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것은….
‘제로. 당신이 더욱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생각을 품으며 신성이 제로를 바라보자, 제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로 님이 품은 강함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까? 물론 제로 님은 강하십니다. 하지만,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요. 하나의 손은….”
“열 손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제로의 말에 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로 또한 회귀하기 전, 숫자의 폭력을 앞세운 허상괴들에 의해 강력한 플레이어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수없이 봐왔다.
본인부터가 그렇게 죽기도 했었다.
비록 마지막에 허상괴의 왕과 1:1로 싸웠다지만, 왕은 상처를 입을 때마다 넘쳐나는 허상괴들을 포식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했다.
‘그게 회귀 후, 내가 네크로맨서가 되기로 다짐한 이유이기도 하지.’
제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신성은 여전히 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신성의 두 눈동자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라는 질책 아닌 질책이 뒤섞여 있었다.
그에 제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부족한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망자들로 대처하면 그만이니까.”
“물론 일정 레벨 이하의 플레이어들은, 제로 님이 보유하고 계신 언데드보다 그 전투력이 떨어지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의 수호자의 빈 자리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생명의 수호자가 제로에게 죽었다.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아니, 어쩌면 벌써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둘의 충돌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강대한 충격.
그 속에 녹아들어 있는 농밀한 죽음과, 충만한 생명력은 누가 봐도 제로와 생명의 수호자. 그 둘의 것이었다.
그렇기….
“시, 신성 님!”
제로와 신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돌연 쾅! 하며 문을 박차고 한 플레이어가 들이닥쳤다.
그는 무엇이 그리 다급한 것인지 노크조차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들이닥친 플레이어의 표정에는 상당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플레이어의 다급함 덕분일까?
자신의 방에 노크도 없이 쳐들어왔음에도 신성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이…, 스스로를 생명의 추종자라 칭하는 플레이어들이 협회의 건물에 속속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1000위 이내의 랭커급 플레이어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으음….”
플레이어의 대답에 신성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우려하던 일이 터져버린 것이다.
‘설마 이렇게 빨리 행동할 줄이야. 그건 예상 밖이로군.’
속으로 그러한 생각을 품은 신성은 아직도 남아 있는 플레이어를 바라봤다.
“또 무언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것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허상괴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으음…, 일단 알겠습니다.”
신성의 대답에 플레이어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신성은 곧장 미묘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제로를 바라봤다.
“상황이 상당히 복잡하게 되었군요.”
“그러게. 추종자들의 반발과 허상괴들의 난립이라. 그나저나 추종자들도 참 움직임이 빠르네. 마치 내가 생명의 수호자를 죽이길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야.”
“…….”
제로의 농담 아닌 농담에 신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종종 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이유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던 신성이다.
헌데,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의미 없는 농담을 던지다니.
제로를 바라보는 신성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기만 했다.
그런 신성의 속마음을 눈치챈 제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설마 제로 님께서 스스로 생명의 수호자로 변장해서 그들의 혼란을 잠재우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농담도.”
신성의 말에 제로가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그러한 방법 보다 더욱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요지는 이거잖아? 생명의 수호자가 죽었다. 그리고 생명의 수호자를 죽인 것은 허상괴도, 뭣도 아닌 나, 제로다. 마지막으로 그것으로 인해 생명의 추종자들이 빡쳤다. 안 그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생명의 수호자가 ‘살아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면 그만 아니야? 그리고 추종자들이 보는 앞에서 생명의 수호자가 앞으로 ‘협회에 협력해 사람들을 구하고, 허상괴들을 죽여 나가겠다’라고 말하면 끝이고. 그렇지?”
“그렇… 습니다만.”
제로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다만….
“그렇다면 제로 님께서 죽여버린 생명의 수호자를 어떻게 대체하실 겁니까?”
“그거야 또 간단하지.”
신성의 질문에 그러한 대답을 내놓은 제로가 손가락을 튕겼다.
중지와 엄지가 교차하며, 딱!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우웅-!
제로의 앞으로 하나의 마법진이 만들어지고.
그 마법진 속에서 한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진에서 모습을 드러낸 플레이어는 생명의 수호자가 걸쳤던 것과 비슷한 순백의 갑옷, 성휘의 갑옷을 걸쳤고, 등에는 거대한 칠흑의 도끼인 처형자를 매고 있었다.
또한 그런 플레이어에게선 로스트 월드에서 ‘신’이라 추앙받은 존재, 주신 오딘과 마신 알루타의 신력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했다.
“이 플레이어는…?”
“소개할게. 내가 숨기고 있던 비장의 카드 중 하나, 무색의 성자 베이글이야.”
* * *
“전쟁이 시작된 지 한참 만에 불러서… 뭐? 나보고 연기를 하라고?”
“그래.”
무색의 성자, 베이글의 어이없다는 목소리에도 제로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제로의 뻔뻔한 태도에 베이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뜩이나 지금까지 협회에도, 플레이어에게도.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들키지 않게 몸을 숨기고 행동했던 무색의 성자 베이글이었다.
그가 그러한 행동을 취한 이유는 단 하나, 제로의 언질과 약속 때문이었다.
자신이 부를 때까지 최대한 정체를 숨기고 있어라.
그러한 약속 때문에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느라 상당한 고생을 했었는데….
이제는 뭐? 자신이 죽여버린 생명의 수호자를 연기해 세상에 나서라고?
물론 베이글 또한 생명의 수호자라는 플레이어는 잘 알고 있었다.
상당한 강함을 가지고, 홀로 돌아다니며 수없이 많은 시민들을 구해낸, 영웅의 표본과도 같은 플레이어.
하지만 그 성별은 여자로 알려져 있는 플레이어. 그것이 생명의 수호자다.
한편 무색의 성자 베이글은 제로의 터무니없는 명령… 아니,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생명의 수호자의 빈 자리를 대처해라. 네놈의 뜻은 잘 알겠다. 그 빈자리를 메꾸지 않는다면. 특히나 생명의 수호자를 죽인 존재가 네놈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크나큰 혼란이 오겠지.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난 남자란 말이다! 이 잡것아!”
콰아아-!
버럭 외친 무색의 성자 베이글의 전신에서 새하얗고 새까만 신력이 뿜어져 나왔다.
주신 오딘의 신력과, 마신 알루타의 신력이 뒤섞인 그것이야말로 무색의 성자 베이글의 진정한 힘이었다.
쩌적-!
쩌저적-!
베이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난폭한 힘의 기류에, 주변의 바닥이나 벽이 갈라지고, 건물 자체가 무너질 듯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신성의 길드원들이 달려오는 소리에 제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알겠으니 진정 좀 해.”
제로가 그러한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베이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난폭한 힘의 기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에 베이글이 상당히 놀란 표정을 내비쳤으며, 신성은….
“별일 없으니 모두 돌아가도록 하세요.”
문을 바라보며 말했는데, 그에 다급히 달려오던 플레이어들이 주춤거렸다.
신성의 명령이 있으나, 건물을 뒤흔들던 힘의 주인 또한 상당한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혹여나 신성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별일 없습니다. 모두 돌아가서 본인의 일을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들려오는 신성의 목소리에 몰려들던 길드원들이 대답과 함께 해산했다.
한편, 그렇게 놀란 길드원들을 진정시킨 신성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베이글을 바라봤다.
‘무색의 성자, 베이글. 주신 오딘의 성자인 나와, 마신 알루타의 성녀인 파괴의 성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신 오딘과 마신 알루타에게 동시에 선택받은 플레이어. 협회가 설립되었을 때, 그를 영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며 찾았지만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단순한 도시전이라 생각했는데….’
신성이 그러한 생각을 품기 무섭게….
“왜? 내가 베이글을 알고 있는 게 놀랍냐?”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제로의 물음에 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제로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넌 종종 내가 누구인지 잊어먹고 있는 거 같더라?”
그 말에 신성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제로를 바라봤다.
“까먹었냐? 내가 소설 속에서만 보이던 ‘회귀자’라는 것을. 이미 쓸만한 전력을 갖춘 플레이어들은 전부 한 번씩 만난 지 오래야.”
“아….”
제로의 말에 신성이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눈앞의 존재, 제로가 미래에서 과거로 타임 워프를 한 회귀자라는 것을.
신성이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 다시 한번 깨닫고 있을 때, 제로가 베이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해줄 거야 말 거야? 참고로 네가 여장을 할 필요는 없어. 네 목소리도 충분히 중성적이고, 생명의 수호자가 여자였다! 라는 것도 사람들이 멋대로 착각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크흠.”
제로의 말에 베이글이 낮은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럼 그렇게 알고, 움직여 볼까?”
“제로 님은 어딜 가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허상괴들을 처리하러 가야지.”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가 씨익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