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하는 네크로맨서-176화 (176/200)

제176화

“여긴…?”

존재하는 것이라곤 짙은 어둠과, 공허한 죽음뿐인 세계.

그러한 세계의 중심에서 깨어난 제로는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정신을 옥죄이는 고통과, 존재하지도 않는 심장을 아련하게 만드는 짙은 슬픔.

그것들에 휩싸인 제로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체 멍하니 허공만 응시할 뿐이다.

한참 동안 허공을 응시하던 제로의 두 눈동자로, 한 줌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이 들어섰다.

일반적인 불꽃과는 다른, 순백으로 피어오르는 그것은 바라만 봐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아….”

불꽃을 바라보던 제로는 낮은 탄식과 함께, 본능적으로 눈앞에 피어오른 불꽃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허나 제로가 손을 내뻗으며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순백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더욱 멀리 떨어져만 갔다.

“가지… 마….”

멀어지기만 하는 불꽃에, 제로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제로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짙은 슬픔과, 원인 모를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허나 불꽃은 그런 제로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더욱 멀리 멀어져만 갈 뿐이다.

그에….

“제발… 가지마. 날 버리지 말아줘….”

제로의 입에서 다시 한번, 마치 애원하듯.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쏟아낼것만 같은 슬픔이 담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불꽃은 멀어져만 갔는데…, 그렇게 멀어지던 불꽃이 한순간 화륵! 하고 더욱 강하게 피어오르며 일렁였다.

동시에….

“아…!”

순백의 불꽃의 외형이 변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촛불처럼 자그마한 불꽃이었다면, 지금은 순백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한 명의 여인’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제로는 여인의 형상을 띤 불꽃을 보며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순백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여인을 마주하는 순간, 심장을 옥죄이는 슬픔과 아련함. 그리움이 더욱 증폭되었다.

이제는 제로의 공허한 두 눈구멍에서 붉은 피로 이루어진 눈물마저 흘러내리고 있었다.

순백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여인 또한, 그런 제로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과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러한 여인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제로는 자신의 시야에 무의식 저편에서 잊혀진 기억이 보여주는 하나의 환영이 들어서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환영은, 자신이 이 공허한 세계에 들어오기 전.

생명의 수호자라 불리던 플레이어와의 싸움에서 봤던 환영과 동일했다.

허나, 그때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전투 때 봤던 환영 또한 제로에게 진득한 슬픔을 안겨줬지만, 지금 보는 환영은 그 정도가 완전히 달랐다. 심장이 아리며 존재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특히나….

“■■■아….”

제로의 입에서 알아듣지도 못할 이름 하나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스스로가 내뱉었음에도, 스스로가 무엇이라 내뱉었는지 인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이름.

허나 그 이름을 내뱉는 순간, 눈앞의 순백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여인의 표정과 미소에 걸쳐진 슬픔은 더욱 깊어져만 갔으며.

제로의 심장을 옥죄이는 무언가 또한 더욱 강해져만 갔다.

-강해졌구나.

제로가 한참 동안 멀어져만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순백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여인의 입에서 슬픔 어린 목소리가 흘 러나왔다.

그것은 명백히 제로를 향한 것으로, 그러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제로의 공허한 눈구멍에서 흘러내리는 피눈물이 더욱 늘어만 갔다.

“제발 날 버리지 말아줘…, 제발. ■■■아….”

여전히 스스로조차 인식할 수 없는 이름을 내뱉으며 애원하는 제로.

허나, 그런 제로의 애원 어린 목소리에도 무색하게 멀어져만 가던 여인의 육체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육체를 이루는 불꽃이 점차 줄어들고,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순간….

-지금까지처럼 사람들을 부탁해. 부디…, 날 위해서라도. 나의 이러한 부탁이 강력한 저주가 되어, 너를 옭아맬 사슬이 될 것임은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부디 사람들을 버리지 말아줘.

-부디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줘.

그러한 말을 남기며,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던 순백의 불꽃은 두근거리는 심장의 형태로 변해 제로의 손에 쥐어졌다

“아…!”

제로는 손에 쥐어진 순백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심장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저도 모르게 낮은 탄식을 자아냈다.

그렇게 제로가 멍하니 손에 쥐어진 심장을 보고 있을 때….

파앗-!

돌연 심장에서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듯한 따스함과 포근함을 안겨주는 순백의 빛이 터져 나왔다.

“아아…!”

주변을 가득 메운 어둠과, 공허한 죽음을 밀어내는 순백의 빛에 휩싸인 제로가 저도 모르게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손에 쥐어진 심장이 마치 액체와도 같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다, 제로의 육체에 스며들듯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아아…!”

순백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심장을 온전히 흡수하는 순간, 제로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제로의 육체에 크나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본래 제로는 언데드계 몬스터 중 하나인 리치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신이 흑골로 이루어진 몸뚱이에, 미간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고.

그 주위로는 스산한 죽음이 휘몰아친다.

특히나 흑골의 육체에는,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한 사룡 덴드로의 심장에 의해 미세한 혈관들이 묻어나 있다.

허나 변화를 시작한 제로의 육체는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흑골의 육체에 근육이 붙고, 살점이 불어나며 인간의 그것과 같은 피부가 뒤덮는다.

전신을 휘감은 스산한 불꽃은 새로이 구성된 육체에 빨려 들어가듯 흡수되어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를 겪은 제로는 ‘단 하나’만 제외한다면, 누가 봐도 ‘평범한 인간이다!’라고 말할 정도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제로가 가지지 못한 단 하나.

그것은 얼굴이었다.

인간의 형태를 한 얼굴의 절반은 여전히 흑골이 남아, 하나만 남은 공허한 눈구멍에는 푸른 귀화가 자리 잡았다.

공허한 눈구멍에 일렁이는 푸른 귀화 속에는, 여전히 흉흉한 안광을 토해내고 있는 사신의 흉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변화를 끝낸 제로가 감긴 두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라도 널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난 기뻤어…. 그리고….”

무엇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 것일까?

한참 허공을 응시하며 뭐라 뭐라 말하던 제로가 돌연 손을 내리긋는 순간, 공허한 어둠과 스산한 죽음만이 가득한 공간에 틈이 갈라지며, 그 너머로 지구의 풍경이 보였다.

“네 부탁은 반드시 이뤄줄게.”

제로는 그러한 말을 남기며 망설임 없이 갈라진 틈 너머로 몸을 내던졌다.

* * *

“넌 그렇게 생겼구나.”

지구.

그것도 한때 생명의 수호자와 사투를 벌이던 제주도에 모습을 드러낸 제로가 상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곳에는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음에도, 제로의 두 눈동자. 아니, 더욱 정확히는 푸른 귀화로 뒤덮인 사신의 흉안에는 ‘한 명의 소년’이 내다보이고 있었다.

더욱 정확히는, 제로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원반형의 거울과 비슷한 무언가였다.

그 너머로 한 명의 소년이 턱을 괴고 앉아, 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내가 상상하던 이미지와는 다르네, 죽음.”

제로의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앉아있던 소년의 입가에 걸쳐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진정한 의미의 죽음으로써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것을 축하해.]

짝! 짝! 짝!

박수를 치며 말하는 소년, 죽음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축하가 담겨 있었다.

제로는 그러한 죽음의 축하를 받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후회하지 않겠냐는 말을 꺼낸 그 의미를 이제야 알았어.”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안정적인 모습인데.]

“더 이상… 그녀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러한 말을 내뱉는 제로의 목소리에는 쓸쓸한 슬픔이 감돌다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두 번이나 희생했다.

한 번은 자신의 회귀를 위해서.

또 한 번은 자신이 진정한 의미의 죽음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그렇기에….

“그렇기에 난 그녀의 부탁을 반드시 들어 줄 생각이야.”

[뭐, 그렇기 위한 희생이었으니. 난 말리지 않아.]

단호한 의지가 담긴 제로의 말에, 죽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저 지켜만 볼 뿐이야. 네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과연 진정한 의미의 죽음에 다다를 수 있는지. 더 이상 그 무엇도 너에게 개입하지 않은 채, 단순히 지켜만 볼 뿐이지.]

“그래.”

죽음의 말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죽음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제 와서 더 큰 도움을 바라는 것은 스스로부터가 사양이었다.

한편, 그렇게 제로가 사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파바밧-!

사방에서 환한 빛무리가 뭉치며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400레벨을 넘긴 듯, 플레이어 특유의 강렬한 마나를 내뿜고 있는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야?”

속속들이 나타나는 플레이어들이 주변을 훑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현재 이곳은 제로와 생명의 수호자의 전투에 의해 난장판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곳곳의 대지는 제로의 죽음과 생명의 수호자가 품은 생명이 뒤섞여 깃들어져 있다.

그 외에도 곳곳이 갈라지고, 움푹 파이며 무너져 내린 대지는 마치 두 마리의 괴수가 날뛰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어라? 넌…?”

현장을 살피던 한 플레이어가 제로를 발견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제로를 향해 모였다.

누구 아는 사람 있어?

글쎄,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종족 플레이어인가? 얼굴 한쪽이 해골인데?

아무리 이종족 플레이어라도 저런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나나?

뭐, 제로 같은 경우도 있으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눈앞에 두고 있는 플레이어가 제로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제로가 ‘인간’이었을 시절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으며.

제로가 지구에서 활동할 땐 전신이 흑골로 이루어진, 리치와도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어이~, 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

오싹-!

한 플레이어가 대표로 나서 입을 여는 순간, 모여있던 플레이어 전원이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제로의 하나만 있는 공허한 눈구멍에서 피어오른 푸른 귀화.

더욱 정확히는 그러한 푸른 귀화에 감싸여져 있는 사신의 흉안과 눈이 마주치자, 원인 모를 공포감이 전신을 엄습한 것이다.

제로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공포에 휩싸여 덜덜 몸을 떠는 플레이어들을 잠시 훑어보며….

스킬 발동, 워프.

환한 빛무리에 휘감기며 그 모습을 감추었다.

제로가 사라지자, 그제야 전신을 휘감은 공포에서 빠져나온 플레이어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 * *

“준비는 끝나가나 보군.”

하늘에선 연신 벼락이 내리치고, 대지는 미친 듯이 떨리며. 바다에는 수백 미터에 다다르는 거대한 해일이 넘실거리는 세계.

그 세계에 자리 잡은 거대한 존재, 허상괴의 왕이 감겨있던 두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백의 대장군. 흑의 대장군.”

-부르셨습니까.

-저희들의 왕이시여.

왕의 부름에, 흐릿한 환영의 형태를 띤 백의 대장군과 흑의 대장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획을 앞당겨라. 짐의 강림을 서두르도록.”

-분부.

-받들겠나이다.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그 명령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행한다.

그러한 다짐을 품은 백의 대장군과, 흑의 대장군의 환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는 조각만 넘어갔기에 제대로 즐기지 못하였으나…, 이번에는 다르겠구나.”

왕은 떴던 두 눈을 감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