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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175화 (175/200)

제175화

“크으윽….”

머리를 감싸 쥔 제로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머리는 깨질 듯 아프고, 울렁거리는 위장은 뒤집힐 것만 같았다.

고통과 함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는 연신 제로의 정신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도대체… 이건 뭐야…?”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던 제로가 뭐라 중얼거렸다.

그런 제로의 눈앞에는 하나의 환영이 스치듯 지나치고 있었다.

제로의 눈을 가리는 환영 속 주인공은 한 명의 여인이었다.

플레이어로 보이는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타오르는 듯한 선홍빛의 머리칼을 지녔다.

두 눈동자는 시리도록 푸르른 빛이었으며 가죽 갑옷을 걸치고, 한 손에 거대한 장궁을 쥐었다.

그녀는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양손에 불꽃과 냉기의 검을 쥔 남자를 서포트 하듯 연신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허나, 정황은 그들에게 불리해져만 갔다.

마침내 서포트하던 남자가 위기에 처한 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날렸다.

그렇게 남자의 앞을 가로막는 여인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안돼-!”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내지르며 손을 내뻗었다.

허나, 흑골로 이루어진 제로의 손이 환영 속 여인의 몸에 닿기 무섭게, 환영은 순식간에 제로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바, 방금 그건 도대체…?”

사라진 환영에 맞춰, 끔찍한 두통과 울렁이던 속이 진정되었다.

그 현상에 제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눈앞의 생명의 수호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넌…?”

제로가 저도 모르게 당혹성을 터트렸다.

자신의 눈앞에 자리 잡은, 순백의 투구가 벗겨진 생명의 수호자.

그녀의 외모가, 방금 전까지 자리 잡았던 환영 속 여인과 매우 흡사했다.

다른 점이라고는 생명의 수호자는 환영 속 여인과는 다르게, 자신이 걸치고 있는 장비와 똑같이 순백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 점만 제외한다면, 생명의 수호자는 제로가 봤던 환영 속 여인과 동일 인물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편 생명의 수호자는 갑자기 괴로워하다, 돌연 자신을 바라보면 놀라는 제로에 인상을 찌푸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지금 자신들은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저것 또한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한 하나의 연기라 생각한 생명의 수호자는. 바닥에 나뒹구는 투구를 다시 뒤집어쓰며 입을 열었다.

“그따위 연기로 내 검을 막을 순 없다.”

타닷-!

바닥을 박차며 움직인 생명의 수호자가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도착했다.

“죽어라,”

스킬 발동, 생명의 연격.

촤라라락-!

초고속으로 휘둘러지는 순백의 검에서, 제로의 전신을 노리는 수백 개의 참격이 쏟아져 나왔다.

생명의 수호자의 외모가 환영 속 여인과 똑같다는 것에 당황하고 있던 제로는,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수백 개의 참격에 놀라며 몸을 내뺐다.

“자, 잠깐-!”

스킬 발동, 더미 블링크.

콰가강-!

제로의 신형이 사라지고, 그 대신 더미가 만들어지는 순간 생명의 수호자가 날린 수백 개의 참격이 쏟아졌다.

반월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 참격은 제로가 만들어 낸 더미. 그리고 대지와 충돌하며 거대한 순백의 폭발을 만들어냈다.

한편, 그러한 생명의 수호자의 공격을 피해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제로는 여전히 혼란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순간 스쳐 지나가듯 나왔던 환영 속 여인은 누구이고.

또 그러한 환영의 주인공이었던 여인과 닮은… 아니, 닮았다는 표현마저도 부족한.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만 제외한다면 완전히 똑같이 생긴 생명의 수호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된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제로였다.

“이만 죽어라.”

스킬 발동, 생명의 단죄.

그리고 바닥을 박차며 뛰어올라, 순식간에 제로에게 접근하며 생명의 수호자가 검을 휘둘렀다.

생명의 칼날이 휘감긴 순백의 검은 대기를 베어 가르며 제로의 목을 쳐냈다.

아니, 쳐낸 듯 보였다.

막 그녀의 검이 제로의 목을 훑고 지나가려는 순간….

“그러니깐 좀 기다리라고!”

콰가강-!

버럭 외치는 제로의 전신에서 막대한 죽음이 터져 나왔다.

물리력을 동반한 죽음은 제로의 목을 베어버리려는 순백의 검을 밀어내고. 나아가 허공에 떠 있는 생명의 수호자의 전신을 두드렸다.

“커헉-!”

생명의 수호자는 갑작스런 충격에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추락했다.

제로는 고통스러워하는 생명의 수호자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으며,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허나 곧, 제로는 저도 모르게 놀라며 내뻗은 손을 거두어들였다.

“내가 왜 이러지…?”

마치 정신과 육체가 따로 행동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분명 눈앞의 여인, 생명의 플레이어는 제로에게 있어 ‘죽여야 할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허나 육체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콰아아아-!

버럭 외친 제로의 전신에서 농밀한 죽음이 터져 나왔다.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죽음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으며, 그렇게 죽음에 집어삼켜진 모든 것은 빠른 속도로 생명을 갉아 먹혔다.

“젠장.”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은 제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뭔 짓을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최대한 빨리 죽이고 끝낸다!’

속으로 그러한 다짐을 집어삼킨 제로가 생명의 수호자를 향해 흑골의 손가락을 내뻗었다.

스킬 발동, 데스 이레이저.

지잉.

제로가 내뻗은 흑골의 손가락 끝에서 잿빛의 광선이 튀어나왔다.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잿빛의 광선은, 궤도 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평등한 죽음’을 선사했으며, 나아가 생명의 수호자의 몸을 뒤덮었다.

생명의 수호자의 육신이 잿빛의 광선으로 이루어진 죽음, 데스 이레이어저에 뒤덮여 부패하려는 찰나….

“아직… 멀었어!”

콰아아-!

이번엔 생명의 수호자의 전신에서 방대한 생명력이 뿜어져 나왔다.

순백으로 빛나는 그것은 넘실거리는 해일과도 같았으며. 그렇게 뿜어져 나온 생명은 제로의 죽음을 밀어내고. 말라비틀어진 대지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 모습에 제로는….

“제발 죽어! 죽으란 말이다!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말고 그냥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여라!”

제로는 저도 모르게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내며 다종다양한 마법을 발현시켰다.

허공에 거대한 흑골의 창, 데스 본 스피어가 만들어지며 생명의 수호자를 향해 쏘아진다.

머리 위로는 수백 개의 작은 흑골의 화살, 데스 본 애로우가 만들어지며 생명의 수호자를 향해 쏟아졌다.

죽음이 뭉쳐 만들어진 총알, 데스 불릿이 생명의 수호자의 전신을 노리며 발사되고.

그 외에도 기타등등 다양하게 발현된 마법들은 하나같이 생명의 수호자의 목숨을 노렸다.

허나….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전까진 죽을 수 없어.”

스킬 발동, 생명의 수호.

생명의 수호자는 다시 한번 거대한 순백의 방패를 내세우며 입을 열었다.

제로가 발현한 다종다양한 마법들은,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 생명의 수호자가 만들어 낸 거대한 방패를 뚫지 못하고 막혀 사라졌다.

그 모습에 제로는….

“제발…, 제발 죽으란 말이다!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말고 그냥 사라지란 말이다!”

왜인지 모르곘으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슬픔에 다시 한번 절규를 내뱉었다.

어째서 이렇게 슬픈 것일까?

어째서 이렇게 괴로운 것일까?

눈앞의 플레이어, 생명의 수호자는 자신과 아무런 연이 없다.

눈앞의 플레이어, 생명의 수호자는 그저 죽여야 할 존재에 불과하다.

자신이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지구에 남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죽여야 하는 존재가 바로 생명의 수호자였다.

하지만….

‘도대체 왜…! 어째서…!’

“어째서 널 죽이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행동하면 할수록 이렇게 슬프고 괴로운 거냔 말이야!”

생명의 수호자를 죽이기 위해 공격하면 할수록,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한편, 끝없이 쏟아지는 제로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생명의 수호자가, 다시 한번 생명을 폭발시켰다.

콰아아아-!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생명이 제로의 마법들을 밀어내, 한순간의 틈을 만들어내는 순간….

“죽어.”

바닥을 박차며 튀어 오른 생명의 수호자가 순식간에 제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해할 수 없는 말 하지 말고, 그냥 죽어.”

후웅-!

생명의 수호자가 제로의 목을 향해, 생명의 칼날이 휘감긴 순백의 검을 휘둘렀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며 휘둘러진 순백의 검이 제로의 목에 닿기 직전….

“도대체 왜 이런 거냔 말이다!”

제로가 슬픔과 괴로움. 불쾌감과 공포 따위의 잡다한 무언가가 뒤섞인 외침을 토해냈다.

그런 제로의 전신에선 난폭한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왔는데, 그러한 죽음의 탁류는 생명의 수호자가 휘두른 순백의 검을 밀어내며 사라졌다.

“허억-! 허억-!”

생명의 수호자를 다시 한번 떨쳐낸 제로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그만 끝내자.”

그러한 말을 내뱉으며 바라본 생명의 수호자가, 환영 속 여인과 겹쳐 보였다.

제로는 생명의 수호자와 겹쳐진, 환영 속 여인이 자신을 향해 슬픈 표정을 짓고. 자신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그것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털며 쩍-! 하고 입을 벌렸다.

아아아아아아-!

쩍! 벌어진 입에서 깊은 슬픔이 뒤섞인 귀곡성이 울려 퍼지며, 제로를 중심으로 똑같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든 영혼들이 튀어나왔다.

그러한 제로의 행동에, 생명의 수호자는 방패를 버리고. 양손으로 순백의 검을 꽉! 움켜쥐었다.

검을 움켜쥔 생명의 수호자의 전신에선 농밀하면서도 방대한 생명이 뿜어져 나왔으며, 그렇게 터져 나온 생명은 순백의 검에 깃들었다.

“그래. 이제 그만 끝내자.”

스킬 발동, 망자의 애환.

슬픈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하는 제로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지며, 깊은 슬픔을 품은 수백의 망령들이 뭉치며 거대한 검으로 변화했다.

생명의 수호자는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기나긴 인연의 사슬을 끊어낼 시간이야.”

타닷-!

다시 한번 바닥을 박차며 튀어 오른 생명의 수호자가 양손으로 꽉 움켜쥔 검을 휘둘렀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을 품은 수백의 망령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진 거대한 검.

농밀하면서도 방대한 생명이 깃들어 있는 순백의 검.

그 둘이 충돌하는 순간….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으며, 주변의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사라져 가는 것에는 생명의 수호자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망자의 애환과 충돌한 순백의 검이었다.

검신에 휘감겨 있는 생명이 사그라들고, 순백의 검이 천천히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동시에 생명의 수호자가 뒤집어쓰고 있는 순백의 투구. 걸치고 있는 순백의 갑옷이 그 뒤를 이어 사라졌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제로를 향하는 생명의 수호자의 두 눈동자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으며. 그녀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그리고…, 앞으로도 사람들을 부탁해.’

생명의 수호자의 입술이 움직이며, 들릴 리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제로의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런 생명의 수호자는 다시 한번 환영 속 여인과 겹쳐졌다. 이윽고 그녀의 전신이 완전히 증발해 사라지는 순간….

“아…!”

제로의 공허한 눈구멍에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리고, 제로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농밀한 슬픔이 담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 *

“그러니깐 내가 말했잖아. 후회하지 않겠냐고.”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롯이 죽음뿐인 공간.

그 공간의 중심에서, 거대한 원형의 무언가에 내비쳐 보이는 제로를 바라보고 있던 한 소년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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