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펄럭-!
한라산 정상에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드래곤, 본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앉았다.
한라산은 수백만 마리의 허상괴들로 북적거려, 관광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한라산에 자리 잡은 허상괴들은, 갑작스런 본 드래곤의 출현에 흉성을 터트렸다.
본 드래곤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에서 모이기 시작하는 허상괴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수만 마리.
대다수가 최하급과 하급이었지만, 그 사이에는 중급과 상급의 허상괴들 또한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크아아아아악-!
대지가 들썩이며 거대한 허상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렁이를 수천 배, 수만 배 확대한 듯한 거대한 크기의 그것은, 검게 번들거리는 피부와 함께 수백 개의 날카로운 이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외형은 로스트 월드에서도 악명을 떨쳤던 몬스터, 데스 웜과 흡사했다.
본 드래곤의 머리 위에 서 있던 제로는, 대지를 무너트리며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지렁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최상급인가? 한라산의 주인이 저놈인가 보네.”
한라산의 주인, 데스 웜을 닮은 허상괴.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제로가 이동용으로 사용한 본 드래곤에 자극을 받아서였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본 드래곤에게 한라산이라는 이름의 자신의 영역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네놈 따위를 상대할 시간이 없어.”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후웅-!
제로의 등 뒤에 만들어진 거대한 흑골의 창, 데스 본 스피어가 쏘아졌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쏘아진 그것이 데스 웜을 닮은 허상괴의 머리에 꽂히는 순간….
퍼억-!
수박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데스 웜을 닮은 허상괴의 머리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머리가 터져 나간, 데스 웜을 닮은 허상괴는 최상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강대한 힘을 선보이기도 전에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지금의 제로에게 있어 최상급 허상괴조차 땅을 기어 다니는 벌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편, 영역의 실질적인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최상급 허상괴조차 허망하게 죽었음에도 제로를 포위한 허상괴들은 도망칠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그 흉성을 더욱 터트리며 제로를 향해 달려드는 수만 마리의 허상괴들이었다.
“버러지들이 귀찮게 하기는.”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제로의 전신에서 농밀한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왔다.
거대한 해일처럼 넘실거리는 그것은 달려드는 수만 마리의 허상괴들을 집어삼켰는데, 그 거대한 탁류에 휩쓸린 허상괴들은 최상급 허상괴와 마찬가지로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모든 것을 휩쓰는 죽음의 탁류가 가라앉고, 폐허가 되어버린 한라산 정상에는 본 드래곤. 그리고 그것의 머리 위에 올라서 있는 제로를 제외하면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어디 보자…, 생명의 수호자는 어디에 있으려나.”
본 드래곤의 머리에서 뛰어내린 제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일단 제주도에 있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블러드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으며, 그 이상으로….
‘제주도에 도착한 이후, 뭔가 모르게 기분이 나쁘네.’
제주도의 대기 중에 무언가, 묘하게 기분을 긁어대는 기운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매우 희미하고, 희박하여 제로조차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자신의 기분을 거슬리게 만드는 그 묘한 기운의 주인은 분명 생명의 수호자. 그러한 이명으로 불리는 플레이어의 것이며, 그러한 플레이어가 제주도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흐음.”
잠시 주변을 살피던 제로가 낮은 울림을 토해내며, 사방으로 죽음을 퍼트렸다.
희석되고, 확산되어 희미해진 죽음이었으나.
그러한 죽음이 퍼져나가 제주도를 집어삼키는 순간….
파직-!
허공에 새하얀 순백과, 잿빛의 스파크가 파지직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찾았다.”
씨익 웃으며, 어느 한 장소를 응시하며 입을 연 제로가 돌연 대지를 박차며 튀어 올랐다.
수백 미터를 뛰어넘어 상공에 멈춰 선 제로는 플라잉 마법을 통해 두둥실 떠올랐는데.
그에 멈추지 않고 어느 한 장소를 향해 움직였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검은 선이 되어 움직이던 제로가 멈춰 선 장소는….
“제주도에 이런 장소가 있었던가?”
앞으로는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충만한 생명력을 품은 숲이 존재하는 장소.
그곳에 도착한 제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바다를 앞에 두고 자리 잡은 숲은 무언가 이상했다.
기본적으로 제주도에 이러한 숲이 있을 리 없었으며, 심지어 숲을 이루는 나무와 식물들이 ‘지구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충만한 생명력은, 제주도의 대기에 녹아들어 제로의 신경을 살살 긁어대던 기운과 흡사했다.
“흐음. 생명의 수호자라는 이명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니다 이거지?”
저벅. 저벅. 저벅.
숲의 입구에 도착한 제로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뻗는 순간….
파직-!
순백의 스파크가 튕기며, 숲. 아니, 더욱 정확히는 숲에 깃들어 있는 충만한 생명력이 제로를 밀어냈다.
그 현상에 제로가 피식, 저도 모르게 웃음을 내비쳤다.
“고작 이 정도로 날 막아서겠다?”
파직-!
파지직!
농밀한 죽음을 내뿜으며, 제로가 더욱 강하게 손을 내뻗자 사방에서 순백의 스파크가 튀겼다.
그와 동시에 숲에 감돌고 있는 생명력이 불안하게 흔들렸는데, 그에 멈추지 않고 더욱 강하게 손을 내뻗은 순간…
쩌어어엉-!
제로를 중심으로 거대한 충격이 휘몰아치며, 숲을 감싸고 있던 충만한 생명력이 어느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동시에 숲을 이루고 있는 모든 초목들이 말라비틀어지며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 속에서….
저벅. 저벅. 저벅.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전신이 순백으로 물들어 있는 한 명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 네가 생명의 수호자?”
“넌…, 제로… 인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제로에, 투구 너머로 생명의 수호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확실히 생명의 수호자의 목소리는 신성. 그리고 블러드에게 들었던 대로 여인의 그것이었다.
다만….
‘뭐지? 이 기분은….’
제로는 생명의 수호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존재하지도 않는 심장이 두근대는 듯한 묘한 감각을 느꼈다.
무언가…, 무언가 매우 아련한 이 기분은 무엇일까?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잊어버린 듯한 이 기분은 무엇일까.
‘상당히 기분이 더럽네.’
속으로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가 생명의 수호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름 인류를 위해 힘써준 너에겐 미안한데 말이야….”
뒷말을 흐리는 제로의 신형이 흐릿해지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에 생명의 수호자가 돌연 앞으로 튀어 나가며, 등 뒤를 향해 순백의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파공음을 동반하며 휘둘러진 검이 어느 한 장소를 지나가려는 순간, 카가강!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워, 반응 좋은데?”
사라졌던 제로가 멈춰버린 생명의 수호자의 검 앞에서 묘한 미소를 내비치고 있었다.
“확실히 강하네. 이 정도면 군단장급 허상괴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어.”
제로는 자신이 펼친 퍼펙트 데스 실드에 흠집을 낸 생명의 수호자의 검격에 음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강함을 지니고 있었으니 지금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진짜 진짜 미안한데 말이야. 넌 이만 죽어줘야겠어.”
푸확-!
말을 마친 제로의 전신에서 농밀한 죽음이 터져 나왔다.
난폭한 존재감과 뒤섞여 터져 나온 그것은 무형의 압력을 만들어냈으며, 그러한 압력은 곧 생명의 수호자에게 집중되며 그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생명의 수호자를 죽인다.
그것이 죽음에게 들었던, 제로가 스스로의 한계를 한 꺼풀 벗어 던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본디 생명과 죽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진정한 죽음이 되기 위해선 생명을 잡아먹어야 하며.
진정한 생명이 되기 위해선 죽음을 잡아먹어야 한다.
한편 생명의 수호자는 자신을 짓누르는 난폭한 존재감과, 그 속에 뒤섞여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려 하는 농밀한 죽음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역시 넌 ‘그때’ 죽였어야 했어.”
그때…?
날 죽였어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생명의 수호자에, 제로가 입을 열었다
“그건 로스트 월드 때의 일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 허나 이제는 상관없지. 그리고…, 날 죽여야 해서 미안하다 했나? 미안할 필요는 없다. 나 또한 네놈을 죽이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닌 것이니.”
“흐음…. 무슨 뜻이려나? 아니면 너도 강해지기 위해서 날 죽여야 한다…, 뭐 그런 거냐?”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생명의 수호자에, 이번엔 제로에게서 불쾌하다는 기색이 뿜어져 나왔다.
생명의 수호자는 그런 제로를 행해 검과 방패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놈을 이해시킬 의무는 없다. 다만, 생명의 무게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생명을 희롱하는 네놈은 내가 처단한다.”
콰가강-!
말을 마친 생명의 수호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걸음씩 내디디며 움직일 때마다. 그녀가 자리했던 대지가 폭탄 터지듯 쾅! 쾅! 하며 터져 나갔다.
그렇게 한줄기 순백의 선이 되어 움직이는 생명의 수호자는,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재빠름으로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나타났으며….
“죽어라.”
스킬 발동, 생명의 단죄.
망설임 없이 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휘두르는 검에는 농밀한 생명력이 휘감겨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마스터 레벨 이상의 플레이어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오러 블레이드와 흡사했다.
제로는 생명의 칼날을 휘감으며,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순백의 검에 인상을 찌푸렸다.
“칫.”
스킬 발동, 더미 블링크.
파앗-!
제로의 신형이 환한 빛에 휘감기며 사라지고. 그 자리를 더미가 대신했다.
그와 동시에 생명의 수호자가 휘두른 검이 퍼펙트 데스 실드를 부드럽게 파고들며, 제로를 대신해 놓인 더미의 목을 베어버렸다.
“확실히 나랑 상극이란 말이지. 하지만….”
스킬 발동, 데스 본 개틀링.
투두두두-!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등 뒤로 수백발의 데스 본 애로우가 만들어지며 생명의 수호자를 향해 쏘아졌다.
생명의 수호자는 자신의 머리 위로, 흑골로 이루어진 화살의 폭격이 쏟아지자 왼손에 쥔 방패를 들어 올렸다.
“고작 이 정도로 날 죽일 순 없다.”
스킬 발동, 생명의 수호.
후웅-!
생명의 수호자를 중심으로 미풍이 휘몰아치는 순간, 그녀가 들어 올린 방패의 위로 또 하나의 방패가 겹쳐졌다.
그것은 생명의 수호자가 품은 농밀한 생명력이 방패의 형태를 한 것으로, 그러한 방패는 제로가 만들어 낸 데스 본 개틀링을 막아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되겠냐?”
씨익 웃으며 말하는 제로에 생명의 수호자가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그녀가 만들어 낸 생명의 수호에 구멍이 생기며, 그 틈을 파고든 하나의 데스 본 애로우가 그녀의 안면을 강타했다.
“크윽-!”
낮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젖히는 생명의 수호자.
그녀가 뒤집어쓰고 있던 순백의 투구는 충돌한 데스 본 애로우에 벗겨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드러난 생명의 수호자의 얼굴을 본 순간….
욱씬-!
갑작스레 닥친 두통에 제로는 저도 모르게 두개골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