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블러드.”
“부르셨습니까?”
망자의 거성에 나타난 제로가 입을 열자, 뼈의 옥좌가 자리 잡은 홀의 천장에서 블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를 퍼덕이며 나타난 블러드가 박쥐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자 제로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넌 여기가 니 집이냐?”
“하하, 저 같은 언데드에게 있어 마스터의 성은 천국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망자의 거성.
그리고 그것이 자리 잡은 부유섬을 집어삼킨 죽음은, 블러드 같은 언데드에게 있어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제로 또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 신경 쓸 겨를이 아니었기에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너, 생명의 수호자라고 알고 있냐?”
“아, 요즘 한창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핫하신 분 아닙니까? 호주에도 몇 번 나타났었지요.”
“흐음.”
블러드의 대답에 제로의 안광이 날카롭게 뿜어져 나왔다.
“왜 말을 안 했냐고 물어보면….”
“마스터께서 묻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렇지.”
예상했던 그대로의 블러드의 대답에 제로가 낮게 숨을 토해냈다.
뭐, 그래도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고….
“그래서. 생명의 수호자라 불리는 플레이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나이 불명. 국적 불명. 직업 불명. 레벨 불명. 그나마 목소리로 생명의 수호자가 여자라는 것과, 수만 마리의 허상괴들을 이끌고 약소국 하나를 멸망시킨 최상급 허상괴를 단신으로 처리했다는 것 정도? 뭐, 그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는 그녀의 레벨은 최소 730 정도 되겠군요.”
으음….
블러드의 대답에 제로가 다시 한번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결국, 현 지구에서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블러드라 하더라도 생명의 수호자라 불리는 플레이어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순 없다는 것이 된다.
“그나저나 갑자기 그녀는 왜 찾으십니까? 저야 제 혈족 몇이 그녀의 손에 소멸되었기에 개인적으로 정보를 수집해 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만든… 아니, 그녀가 만든 건 아닌가? 어쨌든 생명의 수호자를 추종하는 무리인 생명의 수호자와 협회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고 하더군. 그나저나 추종해서 추종자인가? 네이밍 센스 한번 볼만하네.”
“하하.”
제로의 실없는 농담에 블러드가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어느 정도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을까?
돌연 블러드가 손뼉을 짝! 치며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니깐, 제로 님께선 지금 생명의 수호자를 만나고 싶으신 거죠?”
“그런데?”
“그녀의 주거지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
블러드의 말에 제로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안 그래도 신출귀몰하다는 생명의 수호자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블러드가 그녀의 현 위치를 알아낼 방법을 알고 있다니.
참으로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며칠만 시간을 주시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오겠습니다.”
“부탁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제로에, 블러드 또한 꾸벅. 가볍게 목례를 하며 한 줌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블러드가 사라지자, 제로가 뼈의 옥좌에 몸을 파묻었다.
얼마간을 홀의 천장만 바라보던 제로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죽음, 있어?”
[무슨 일이지?]
제로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 죽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는 알고 있지?”
[…….]
다시 한번 이어진 제로의 물음에 죽음이 침묵했다.
죽음의 침묵에, 제로 또한 침묵을 유지했는데.
그러한 침묵이 채 1분이 흐르기도 전에 죽음의 목소리가 제로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렇게나 이 차원에 애정을 품고 있는 거냐. 이건 네놈답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지.”
뜻을 알 수 없는 죽음의 말에도 제로는 이해했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내비치며 대답했다.
확실히 이러한 것은 자신답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것을 떠나 자신이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이 차원에 남아. 인간들을 지킬 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로 또한 한때나마 지구에 속해 있던 인간이었기 때문에? 허나 그것은 제로가 오버 데스. 즉, 초월자가 됨으로써 연결은 끊어졌다.
애써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제로가 지구에 남아, 인간들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로가 이렇듯 무리를 하는 이유는….
‘속죄… 려나.’
속죄.
누구를 위한 속죄일까?
어쩌면 회귀 전, 지키지 못했던 옛 연인에 대한 속죄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러한 연인이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자신에게 건넸던 말이 하나의 족쇄로 작용해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옥죄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는 옛 연인의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그런 존재가 있었구나…, 그런 존재가 그러한 말을 했구나… 정도만 뇌리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죽음. 네 도움이 필요해. 넌 알고 있지?”
현 시점에서 죽음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육체의 수복은 망자의 거성 내부를 가득 매운 죽음 속에서 며칠 쉬면 완료된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육체를 수복한다 한들, 군단장급 이상의 허상괴를 상대한다면 또 다시 무리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만일 대장군 급의 허상괴. 라이트 같은 존재를 만나게 된다면….
‘승리할지언정, 왕을 상대하기도 전에 육체가 망가져 외차원으로 추방될 가능성이 높겠지.’
그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하는 제로였다.
그런 제로의 속마음과 각오를 눈치 챈 것일까?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죽음이 돌연, 제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허나….]
“왜?”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 라.
죽음의 물음에 제로가 돌연 피식, 웃음을 내비쳤다.
“내가 후회할 이유가 없잖아?”
후회를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제로의 각오가 담긴 목소리에 죽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알려줄게. 네가 지금 이상의 강함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그리고….]
그러한 죽음의 말이 이어질수록, 제로의 표정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 * *
죽음과의 대화 이후, 제로가 망자의 거성에 자리 잡은 뼈의 옥좌에 몸을 맡긴 지 어언 3일.
서늘한 죽음이 감도는 홀의 중앙에 돌연 핏빛의 기운이 뭉치며, 블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블러드. 생명의 수호자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냈어?”
“예. 덕분에 세 명의 혈족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냈습니다.”
블러드가 혈족이라 칭할 정도라면, 평범한 뱀파이어는 아닐 것이다.
그러한 뱀파이어가 세 명이나 희생되었다니.
하지만….
‘그러한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그러한 생각을 품은 제로가 블러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생명의 수호자가 현재 있는 위치는?”
“마스터와 상당히 연이 깊은 장소에 있더군요.”
“너와 연이 깊은…?”
블러드의 대답에 제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과 연이 깊은 장소라니.
지구에 그런 장소가 있었던가?
제로가 그러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블러드의 입이 다시 열렸다.
“생명의 수호자. 그녀는 지금 한국에 있습니다.”
* * *
“무슨 일이십니까?”
자신의 집무실에 업무를 보고 있던 신성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제로에 의아한 표정을 내비쳤다.
제로는 그런 신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생명의 수호자가 있는 위치를 특정했다.”
제로의 말에 신성이 벌떡 일어섰다.
그런 신성의 표정과 두 눈동자는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협회의 내로라하는 추격자들마저 그녀의 현 위치를 특정해내는 것에 실패했다.
그것은 랭킹 800위의 추노꾼 노비 또한 마찬가지.
‘제로 님과 헤어진 지 고작 3일. 이 짧은 시간에 그녀의 위치를 특정했다고? 도대체 어떤 마술을 부린 거야?’
학살자 제로.
그 외에도 다양한 이명이 따라붙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플레이어.
알려지기로는 제로가 한국인이라는 점과, 인류의 구원과 평화에 광적으로 집착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플레이어들이 그를 적대해도, 홀로 모든 플레이어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강함을 지녔다는 것 정도지.’
그럴 텐데…, 설마 이런 정보력 또한 지니고 있을 줄이야.
이 정보력의 원천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언데드인 것일까?
아니면….
신성의 생각이 점차 깊어지고 복잡해져 갈 때, 제로가 입을 열었다.
“뭔 생각을 그리 깊게 하냐?”
“아, 아닙니다.”
제로의 말에 신성이 고개를 털었다.
어찌 되었든, 제로는 자신들의. 아니, 더욱 정확히는 인류의 적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인류의 적이었다면 이러한 ‘연극’을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허상괴와는 또 다른,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겠지.’
그러한 말을 속으로 집어삼킨 신성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현재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한국. 그것도 제주도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더군. 정확한 위치는 나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어. 제주도로 넘어가서 한번 찾아봐야지.”
“제주… 도….”
설마하니 그런 장소에 있었을 줄이야.
아니, 그렇다며 어떻게 추격자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걸까?
제주도는 섬이다. 크기가 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숨을 장소가 한정되어 있고. 발각되면 도망칠 장소도 없는 한정된 공간이다.
그렇기에 신성은 더욱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생명의 수호자라 불리는 플레이어는 어떻게 몸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그녀의 뒤를 따르는 생명의 추종자의 도움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지금까지 수집해 온 정보에 따르면, 추종자들 또한 그녀와 접촉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뒤를 따라 움직이고, 그녀를 흉내 내 사람들을 구해낼 뿐.
그들과 생명의 수호자 간의 무언가 연결고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생각을 품는 신성의 고민이 다시 한번 깊어지고 있을 때….
“넌 어떻게 할 거냐?”
“저… 말입니까?”
“그래.”
제로의 물음에 신성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는 저의는 무엇일까?
단순한 호의? 아니면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일까?
한번 시작된 부정적인 생각이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그에 신성은 저도 모르게 양 뺨을 내리쳤다.
그 모습에….
“뭐하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말하는 제로에, 신성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신성의 반응에 제로 또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같이 따라갈 거야, 말 거야?”
“이번에는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처리해야 할 업무도 쌓여 있고.”
마음 같아서는 제로와 따라가고 싶은 신성이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를 따라 제주도로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드네.’
그러한 속마음을 집어삼키는 신성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라. 그럼 나 혼자 다녀오지 뭐.”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가 뜬금없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에 신성이 놀라는 순간….
펄럭-!
열린 창문 너머로 광풍이 휘몰아치며, 순백의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드래곤.
본 드래곤이 제로를 태우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갔다.
“부디… 아무 일 없기를.”
신성은 구름 너머로 사라져가는 제로와 본 드래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