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대한민국 어딘가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플레이어들조차 몇 없는 마을을 갑작스레 허상괴들이 습격했다.
콰가강-!
3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키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상급의 허상괴.
로스트 월드의 오우거를 닮은 그것을 중심으로, 수십 마리의 하급 허상괴들이 날뛰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젠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몇 없는 플레이어들을 지휘하던 리더가 검을 휘두르며 버럭 외쳤다.
그를 포함한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든 허상괴들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들의 노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애초에 상급의 허상괴를 죽이기 위해선, 최소 400레벨 이상의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허나, 이 작은 마을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은 고작 200.
그 숫자마저도 네 명밖에 되지 않아, 오우거를 닮은 상급의 허상괴가 이끄는 수십 마리의 하급 허상괴들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고작이었다.
“이제…, 끝났어.”
한 플레이어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절망 어린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그런 플레이어의 두 눈동자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른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변에서 허상괴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다른 플레이어들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우리 모두 죽을 거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다시 한번 중얼거리는 플레이어에, 그의 동료가 버럭 외쳤다.
허상괴를 한 마리라도 더 죽이기 위해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끝났다느니. 이제 전부 죽는다느니.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동료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허나, 그런 외침을 토해내는 플레이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 마을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자신들의 강함으로는 눈앞의 허상괴들을 모조리 쳐 죽일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허상괴들의 손에 의해 마을 사람들이 유린당하고.
플레이어들마저 그 목숨을 잃어버리려는 찰나….
파아아아앗-!
순간 허상괴 무리의 뒤로, 순백의 빛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과 플레이어들에게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듯한 따스함을 안겨줬으며.
“상처가…?”
허상괴들과의 싸움으로 그들의 몸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상처들이, 순백의 빛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건 도대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네 명의 플레이어 중, 리더로 있는 플레이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신들의 상처 입은 육체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듯한 이 빛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허상괴들이 녹아내린다고…?”
자신들의 상처를 치료해 준 빛이, 역으로 허상괴들을 녹여버리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한편,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따스한 빛이 사그라들며 드러난 풍경은 또 다른 충격을 안겨줬다.
어떻게 하더라도 죽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허상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절망 그 자체였던 상급의 허상괴만이 육체 이곳저곳이 녹아내린 모습으로 겨우 숨만 쉬고 있었었으며, 그런 허상괴의 등 뒤로….
“신… 성…? 아니야. 저분은 신성 님이 아니야.”
한 명의 기사가 저벅, 저벅 하며 걸어 나왔다.
순백의 갑옷을 걸치고, 순백의 투구를 뒤집어쓴 기사.
등에는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은 순백의 망토가 펄럭이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순백의 검을. 왼손에는 거대한 순백의 방패를 쥔 기사.
어떻게 보면 성기사로 보이는 그는, 신성으로 착각할 법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지만, 널리 알려진 신성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으로는, 눈앞의 기사의 등에는 신성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빛의 날개가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순백의 기사는 살아남은 허상괴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가며 무심히 검을 휘둘렀다.
후웅-!
스칵!
무심히 휘둘러진 검이 살아남은 허상괴의 목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허상괴의 목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핵마저 베어졌다는 듯, 허상괴의 육체가 다른 것들과 똑같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압도적인 강함에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생명의 수호자.”
플레이어의 물음에 순백의 기사가 자그마한 소리로 대답을 하며 움직였다.
순백의 기사는 더 이상 이 마을에 볼일이 없다는 듯, 무심히 뒤를 돌며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생명의… 수호자….”
생명의 수호자.
살아남은 플레이어는, 자신들을 살려준 기사가 내뱉은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플레이어들의 표정에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 * *
“아슬아슬했네.”
백의 대장군 라이트가 데려온, 군단장 스캐빈저.
그를 죽인 제로가 자신의 몸뚱어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제로의 육체는 무수히 많은 금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듯 불안해 보였다.
제로는 혹 때러 왔다가, 괜히 혹만 더 붙어버린 듯한 찝찝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백의 대장군 라이트. 그놈은 도대체 뭔 개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자신이 죽여버린 주술왕 세이메이가 만들던… 아니, 더욱 정확히는 십강 중 하나인 은림이 만들던 약, 블루 문.
나아가 룬의 폭주와 무왕의 변화 등등까지.
그 모든 것에는 항상 백의 대장군 라이트가 엮여 있었다.
도대체 놈은….
“원하는 게 무엇이냐.”
플레이어들을 이용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놈의 행동이 절대로 인간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백의 대장군 라이트에 의해 머지않은 미래에 플레이어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가뜩이나 자신의 회귀를 알고 있는 허상괴의 왕 덕분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현시점에서 말이다.
물론….
“그러기 전에 내가 막을 거지만.”
제로에게 있어 그러한 미래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 제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막아낼 것이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제로는 폐허… 가 되어버린 자금성 내부를 떠났다.
그 원형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개조된 자금성.
그곳에서 사라진 제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한국의 수도 서울. 개중에서 여의도에 자리 잡은 신성의 길드 하우스였다.
더욱 정확히는 십강 중 하나인 신성이 길드 하우스로 사용하고 있는 빌딩의 최상층이었는데, 그곳에는 신성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앉아 있었다.
“넌 또 왜 이렇게 죽상이야?”
“오셨습니까. 상당히 치열한 전투를 벌였나 보군요.”
“딱히 치열하지는 않았어.”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신성에 제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제로의 반응에 신성 또한 피식 웃었다.
“무왕… 이겠죠? 그와 제로 님이 충돌했다는 것은 어지간한 플레이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강렬한 힘의 충돌은, 그 어디에 있든 간에 플레이어라면. 아니,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 시민들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거든요.”
“그러냐?”
괜히 숨길 필요 없다는 듯 말하는 신성에 제로가 두개골을 긁적였다.
확실히 무왕과의 충돌로 인해 퍼져나간 힘의 편린은 평범한 사람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농밀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자신과 무왕이 충돌할 때마다 중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지진을 생각해 본다면, 모르는 것이 더욱 이상할 것이다.
“그나저나…, 무왕이 강하긴 강했나 보군요. 제로 님의 육체가 그 정도로 손상이 난 것을 보니.”
신성이 제로의 전신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제로의 전신에는, 아직 가리지 못한 전투의 흔적이 여실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개중 가장 큰 것이 바로 흑골로 이루어진 전신에 새겨져 있는 무수히 많은 금이었다.
육체에 새겨진 손상을 치유하기 위해선, 적어도 망자의 거성에서 며칠 휴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별거 아니야. 며칠 푹 쉬면 회복될 정도니깐. 그나저나 아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골치 아픈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또 뭔데?”
하나의 사건을 정리하면, 두세 개의 사건이 연달아 터져 나온다.
그것에 제로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제로 님께선 ‘생명의 수호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생명의… 수호자…?”
신성의 입에서 그러한 호칭을 듣는 순간, 제로는 무언가가 떠오를락 말락 하는 느낌을 받았다.
허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떠올리려 했는지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제로는 그 불쾌감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으며, 신성은 그런 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생명의 수호자. 그는… 아니, 그녀는 플레이어입니다. 아마도”
“그녀?”
“새하얀 투구를 뒤집어쓰고, 새하얀 갑옷을 걸치고. 등에는 아무런 문양도 없는 새하얀 망토를 휘날리며, 오른손에는 새하얀 검을. 왼손에는 새하얀 거대한 방패를 쥔 기사. 그 외형은 성기사를 연상시키지만, 그가 다루는 기운은 성기사 특유의 신성력과는 무언가 다르다고 하더군요. 참고로 생명의 수호자를 ‘그녀’라 지칭한 것은 그 목소리가 여인의 것이었다 하더군요.”
“그래?”
신성의 설명에 제로가 흐음…,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생명의 수호자라는 호칭.
백의 대장군 라이트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장비들이 순백으로 물들어 있는 기사.
그리고, 다루는 기운마저 신성력과 매우 흡사하다는 정보까지.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본다면….
‘기억났다.’
제로는 저도 모르게 무의식 저편에 처박아뒀던 기억 하나를 억지로 끄집어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로스트 월드가 멀쩡히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던 시절, 망자의 연구실에서 만났던 한 명의 플레이어.
그 플레이어의 장비들 또한, 신성이 묘사한 생명의 수호자라는 존재와 닮았으며, 그 플레이어가 다뤘던 기운 또한 신성력과 한없이 비슷했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였다.
그렇다면….
‘그때 만났던 그놈이 생명의 수호자였던 건가?’
그나저나….
“그래서, 생명의 수호자인지 뭔지 하는 플레이어의 뭐가 문제인데?”
“그녀의 행동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비록 협회가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그 한계는 존재하는 법. 생명의 수호자라 불리는 플레이어는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협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럼 좋은 거 아니야?”
“그렇죠. 그런데…,”
그런데…?
뒷말을 흐리는 신성에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제로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플레이어들 사이에 그녀를 신봉하는 단체가 만들어졌습니다. 스스로를 생명의 추종자라 칭하며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죠.”
“그게 왜?”
신성의 말에 제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로운 단체가 설립되든 말든, 그 목적이 허상괴의 처단과 시민의 보호라면 딱히 말릴 필요는 없었다.
허나….
“그게, 생명의 추종자와 협회 사이에 마찰이 좀 있었습니다. 특히나 추종자 쪽에서 협회에 소속된 고레벨 플레이어들을 섭외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협회에 반감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많은 만큼 사사건건 방해를 하고, 시비를 걸고 있더군요.”
후-.
신성의 말에 제로가 한숨을 토해냈다.
“장난이 과한데. 그 생명의 수호자라는 플레이어와는 대화 해 봤어?”
“그게,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더군요. 정보원들이 미행을 해도,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면 눈앞에서 사라져 있다고 합니다.”
“흠.”
신성의 대답에 제로가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알겠어. 그 건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