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짝. 짝. 짝.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무왕의 육체 뒤로, 공간이 찢어지며 백의 대장군 라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제로를 향해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박수를 치며 나타났다.
“대단하구나. 과연 왕의 대적자다운 강함이었다.”
“지랄.”
백의 대장군 라이트의 칭찬 아닌 칭찬에 제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이번엔 또 무슨 일로 그렇게 음흉하게 훔쳐보고 있었냐?”
“당연한 것 아니겠나? 저것의 강함을 확인하기 위해서지.”
저것.
인간도, 허상괴도 아닌. 그리고 이제는 영혼마저 소멸해 빈 껍데기가 되어 버린 무왕을 가리키며 말하는 백의 대장군 라이트, 그에 제로의 사신의 흉안이 슬쩍 무왕의 시체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저건 나도 필요해서 말이야. 네놈에게 줄 순 없어.”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무왕의 시체는 제로에게도 필요했다.
제로는 허상괴. 아니, 더욱 정확히는 백의 대장군 라이트가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무왕의 시체를 조사할 생각이었다.
그런 제로의 대답에, 백의 대장군 라이트하 ‘크흐’ 하는 웃음을 흘렸다.
“대적자여. 그대가 지닌 육체의 내구성은 이제 한계이지 않은가. 괜한 헛짓거리로 위험을 초래할 생각이더냐? 자네답지 않구나.”
육체의 내구성이 한계에 달했다.
그렇게 말하는 백의 대장군 라이트에 제로의 미간이 미미하게나마 찌푸려졌다.
‘알고 있었던 건가.’
확실히 대장군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일까.
제로는 자신의 상태를 한눈에 꿰뚫어 보는 백의 대장군 라이트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내비쳤다.
“글쎄… 어떨까?”
쿠구구-!
속삭이듯 중얼거린 제로의 전신에서 막대한 존재감이 터져 나왔다.
난폭하게 날뛰는 존재감은 주변의 모든 것을 짓누르는 무형의 압력을 만들어냈으며, 그러한 압력은 백의 대장군 라이트에게 집중되었다.
허나….
“과연. 많이 약해졌구나. 대적자인 그대를 이 정도로 몰아붙이다니. 꽤나 쓸만한 실험체였군.”
백의 대장군 라이트는 자신의 전신을 짓누르는 무형의 압력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라이트의 반응에, 제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확실히 지금 상태에서 놈을 상대하는 것은 위험하군.’
대장군.
인지를 초월한 괴물 중의 괴물.
왕을 제외한다면, 그 강함은 비단 최강이라 하더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회귀 전에도 대장군을 잡기 위해 모였던 수천 명의 최상위 랭커 급 플레이어들이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쓸려나갔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놈을 상대하는 것은 악수나 다름없다.’
허나…, 그렇다 해서 이대로 놈을 놔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인류의 구원자. 인류의 희망.
다소의 희생은 따르겠지만….
‘지금 여기서 놈을 죽인다.’
그것이 제로의 궁극적인 목표.
인류의 구원과 평화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길이었다.
제로의 그러한 각오를 눈치챈 것일까?
백의 대장군 라이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자네는 애초에 이 차원에 속한 존재도 아닐뿐더러, 어찌하여 이런 어리석은 종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인가?”
“글쎄. 나도 한때 인간이었기 때문일까?”
백의 대장군 라이트의 질문에, 제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허나 그 대답은 정확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정확히 모르거든.’
초월자, 오버 데스가 된 지금.
제로에게 있어 인간이란 동족도, 무엇도 아니었다. 굳이 정의하자면 ‘미물만도 못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자신은 이토록 인간들을 지키고, 그들의 평화를 위해 희생하는가?
도대체 왜?
어쩌면….
‘그녀의 말이 나에게 족쇄로 작용한 것일 수도 있겠지.’
자신이 오버 데스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회귀의 영향으로 지금도 그 기억이 흐릿한…, 옛 자신의 연인.
그것은 자신의 불안정했던 정신이 만들어 낸 단순한 환영. 혹은 망상에 불과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니, 아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제로가 백의 대장군 라이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냥 꺼질지 말지. 그것만 딱 정해.”
“크흐.”
싸늘하게 울려 퍼지는 제로의 목소리에, 백의 대장군 라이트가 비틀린 웃음을 내비쳤다.
그의 외형은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분위기의 신사에 가까웠으나. 그러한 비틀린 미소를 본다면 ‘인간’ 이 아닌, ‘괴물’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자네를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그렇구나. 선인. 자네는 선인일세.”
내가… 선인?
백의 대장군 라이트의 말에 제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어디의 무엇을 보고 자신을 선인이라 하는 것일까.
허나, 그런 말을 내뱉은 백의 대장군 라이트의 표정은 지금까지 봐왔던 것들 중, 가장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 애초에 몇 번 보지도 않았지만.’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왕의 대적자여. 나는 자네가 그리 싫지만은 않다네. 혹 기회가 된다면 왕께 진언해 자네를 우리들의 동료로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군.”
“내가 허상괴 따위가 될 것 같아?”
“끌. 미래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모르는 것이지.”
“지랄하지 말고 꺼져.”
“그래,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 허나, 저것은 내가 챙겨가겠네.”
츠즛-!
그러한 말을 내뱉은 백의 대장군 라이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런 라이트의 움직임에 반응한 제로가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는 순간….
“스캐빈저.”
“알겠습니다.”
빈 껍데기가 되어 버린 무왕의 시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라이트가 입을 열었다.
그에 라이트의 그림자가 꾸물거리더니, 빛의 이면에서 무왕과 제로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허상괴, 스캐빈저라는 이름을 가진 군단장급 허상괴가 모습을 드러내며 제로의 앞을 가로막았다.
“스케… 빈저…?”
제로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군단장급 허상괴의 이름에 인상을 찌푸렸다.
스캐빈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며 씻을 수 없는 불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캐빈저라는 이름은 과거 대전을 점령하고, 140만의 생명을 먹어 치웠던 루파르에게 협력했던 길드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어.”
쿠구구-!
입을 연 제로의 전신에서 다시 한번 난폭한 존재감이 터져 나왔다.
그런 제로의 존재감에 노출된 군단장급 허상괴, 스캐빈저의 표정이 점차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스캐빈저.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이에나를 닮은 수인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허나, 수인과는 명확한 차이를 보이고 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털의 유무였다.
수인은 기본적으로 ‘동물’이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종족인 만큼, 전신이 털로 뒤덮여 있다.
허나 눈앞의 스캐빈저라는 이름의 허상괴는 전신이 털 대신, 번들거리는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또한 나름 백의 대장군 라이트의 수족이라는 것일까?
그렇게 전신을 뒤덮은 비늘은 순백을 띠고 있고 전신이 빛을 반사해 미미하게나마 오색찬란한 느낌을 전해줬다.
“그럼 부탁한다네, 스캐빈저.”
“모든 것은 위대한 왕을 위해.”
무왕의 시체를 챙겨 사라지는 라이트를 향해, 스캐빈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제로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아주 개나 소나 날 무시하는 건 똑같네.”
까딱.
속삭이듯 중얼거린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등 뒤로 거대한 흑골의 창이 만들어지며 스캐빈저를 향해 쏘아졌다.
스캐빈저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흑골의 창, 데스 본 스피어에 양손을 휘둘렀다.
스카가각-!
스캐빈저의 손에 돋아난 날카로운 손톱이 데스 본 스피어를 훑고 지나가는 순간, 단단한 흑골로 이루어진 그것이 수백 조각으로 나뉘며 무너져 내렸다.
제로는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스캐빈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군단장이나 되는 놈이 버림패로 쓰인 것에 아무런 불만도 없냐?”
“모든 것은 위대한 왕을 위해서.”
“하긴, 네놈들이 그럼 그렇지.”
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버리고.
스스로의 목숨을 버림패로 사용하는 것에도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을 스스로 내비친 스캐빈저에 제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죽어.”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제로의 전신에서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제로를 중심으로, 사방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며 퍼져나갔다.
“크흠.”
제로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죽음의 탁류에 휩쓸린 스캐빈저가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전신을 두드리는 강렬한 타격.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농밀한 죽음.
이대로 죽음의 탁류 속에 계속해 있는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품은 스캐빈저는….
그아아아아아-!
쩍! 벌어진 입을 통해 괴성을 내지른 스캐빈저가 움직였다.
스캐빈저의 육체에서 두근! 하는 울림이 터져 나오는 순간, 그의 양 다리의 근육이 비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콰앙-!
스캐빈저가 대지를 박차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음.”
제로는 자신을 중심으로, 초고속으로 이동하며 사방팔방을 누비는 스캐빈저에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스캐빈저.
확실히 군단장 급의 허상괴라 이걸까.
그 육체의 강도는 다른 군단장들과 비교해 보자면 상당히 보잘것없었다.
허나….
‘속도만큼은 꽤 쓸만하군.’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스캐빈저는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할 정도로 유의미하며 막대한 풍압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풍압의 압력은 최상위 플레이어가 아닌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을 정도였다.
단순히 압도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것으로, 그러한 풍압을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놈이 군단장이란 직책을 땅따먹기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겠지.’
또한 군단장급 이상의 허상괴들은 제각기 ‘이능’이라 불릴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가장 빨리 조우했던 녹의 선봉장 제르빌라. 그는 독을 다뤘으며, 그다음으로 조우했던 적의 군단장 베드리나. 그것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꽃을 다뤘다.
그 외에도 저주, 압도적인 육체 능력. 그 무엇도 뚫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단단함. 뇌전 등등.
가장 최근에 상대했던 수의 군단장 레비아탄마저 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선보였다.
그렇다는 것은….
‘저놈도 성가신 이능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름에서 유추해 본다면….’
본디 스캐빈저는 청소 동물이라 불리며, 시체식을 행한다.
스캐빈저라 불리는 동물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죽은 동물의 시체를 포식하는 것이다.
즉, 어쩌면 저놈 또한 시체식을 행하며, 그러한 행위를 통해 강해지는 이능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한 생각을 품기 무섭게, 제로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을 누비던 스캐빈저의 양손에는 어느새 제로가 죽여버린 플레이어의 시체가 쥐어져 있었다.
“과연.”
그 모습에 제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플레이어의 시체를 포식함으로써, 자신의 강함을 더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여유 따위는 주지 않아. 그러니… 그냥 사라져.”
스킬 발동, 데스 터치.
툭.
입을 쩍 벌리며 플레이어의 시체를 먹어 치우려는 스캐빈저의 뒤에 나타난 제로가 손을 내뻗었다.
서늘한 죽음이 감도는 제로의 손이 막 플레이어의 시체를 집어삼키려는 스캐빈저의 몸에 닿는 순간….
“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스캐빈저의 육체에 흐르는 모든 생명이, 농밀한 죽음에 집어삼켜지기 시작했다.
육체가 생명 대신, 농밀한 죽음으로 채워진 스캐빈저는….
“위대하신 왕… 이시여….”
풀려버린 두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며 왕을 향해 중얼거림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