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후….”
변화를 끝낸 무왕이 낮은 숨을 토해냈다.
변화한 무왕의 육체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등에는 인간의 손이 이리저리 얽힌 거대한 날개가 펄럭이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두 개의 뾰족한 뿔이 돋아났다.
두 눈동자는 동공의 유무도 없이, 피처럼 붉은 선홍빛으로 물들었으며.
검은 피부를 가진 전신에는 제로와 비슷하게 붉은 혈관이 돋아났다.
가장 큰 변화는, 무왕의 심장이 있어야 할 장소에 공허한 구멍이 뻥! 뚫려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이 된 기분인가.”
무왕이 변해버린 자신의 몸뚱어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에 제로가 저도 모르게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룬이랑 형제냐? 어떻게 된 게 대사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냐.”
“그런 버러지와 짐을 비교하지 말거라.”
제로의 비아냥에 기분이 상한 것일까?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무왕의 전신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잘 벼려진 한 자루 명검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것은, 무왕을 중심으로 주변에 날카로운 자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좁구나.”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던 무왕이 돌연 손가락을 튕겼다.
검지와 중지가 교차하는 순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며 드넓은 공터가 만들어졌다.
거대한 힘의 파동도,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단순히 손가락을 튕겼을 뿐임에도, 주변의 모든 물질이 믹서기에 들어간 과일 마냥 갈려 나가며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에 제로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무왕의, 천무심공을 익힘으로써 자연스럽게 얻게 된 천상기에 허상괴 특유의 기운이 뒤섞여 있는 그것은 육체가 변하기 전과 비교해 그 힘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다.
허나….
‘힘의 응용이 달라졌다.’
뭐라 해야 할까.
더욱 날카로워졌다고 해야 할까?
혹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해야 할까.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으나, 한 가지 정확한 것은….
‘놈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변화를 끝낸 무왕은 강해졌다.
그것만큼은 제로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짐을 눈앞에 두고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냐? 불쾌하구나.”
흠칫-!
돌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무왕의 목소리에 제로가 몸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제로는 망설임 없이 더미 블링크를 통해 몸을 빼냈으며….
촤자자자자작-!
제로가 서 있던 대지가 날카로운 칼날에 난도질당하듯, 수백 개의 깊은 자상이 새겨졌다.
“흐음. 반응 한번 좋구나.”
“칫.”
수백 미터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제로가 낮게 혀를 찼다.
이제 남은 시간은 1분 50초 정도.
그 이상 힘을 사용하게 된다면, 육체가 붕괴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그리고 육체가 붕괴한다면….
‘나는 더 이상 지구에 남아있을 수 없어.’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제로가 무왕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강해졌다는 것은 잘 알겠어. 그러니…, 나도 조금은 진심을 다해 상대하도록 할게.”
쿠구구구구-!
말을 끝낸 제로의 전신에서 농밀한 죽음과 함께, 난폭한 존재감이 터져 나왔다.
무왕은 인간임을 포기하면서 더욱 강해진 지금의 자신마저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감에 씨익 웃어 보였다.
“좋구나. 어디 한번 발악해보거라.”
츠즛-!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로와 무왕.
둘이 동시에 움직였다.
* * *
콰가강-!
콰아아앙!
콰르르-!
제로와 무왕.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두 개의 거대한 힘이 사방에서 충돌할 때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발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갈려 나가며, 거대한 지진이 발생해 중국 전역을 강타했다.
이대로 싸움을 이어 나간다면 중국에 살아가는 13억의 인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니, 그 피해는 비단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에 인접해 있는 러시아나 북한, 한국 또한 크나큰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 또한 드높았다.
허상괴도 아닌, 스스로의 힘에 의해 인류가 크나큰 타격을 입는다.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는 제로였다.
‘칫. 적어도 부유섬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푸부부북-!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무왕을 향해 수백 개의 거대한 흑골의 창을 날린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대로 싸움이 지속된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할 것이다.
차라리 룬을 상대했던 것처럼 부유섬으로라도 이동하고 싶은 것이 제로의 마음이었지만….
“짐을 상대로 한눈을 파는 것이냐?”
촤라락-!
무왕이 양손을 휘두르자, 제로를 향해 수천 개의 참격이 쏟아졌다.
그에 제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퍼펙트 데스 실드를 전개하며 무왕의 공격을 방어했다.
정령화와 정령 포식.
히든 클래스 중 하나인 정령의 사냥꾼에게 있어, 금기나 다름없는 두 스킬을 발동한 룬마저 무왕처럼 무식하게 강해지지는 않았다.
도대체….
‘그놈이 무슨 수작을 벌였기에!’
백의 대장군, 라이트.
분명한 것은, 무왕에게 접근한 그놈이 무언가 수작질을 벌인 것이 확실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낱 무왕 따위가, 이 정도의 힘을 가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강해진 무왕 외에도….
‘남은 시간도 이제 1분 10초 정도! 시간이 없어.’
육체가 붕괴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1분 10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안에 제로는 무왕을 정리해야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마저 제로의 정신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안겨줬다.
“잡생각이 많구나!”
“칫-!”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내며 공격하는 무왕에, 제로가 낮게 혀를 찼다.
일단은 눈앞의 무왕에게 집중해야 했다.
지금의 무왕은, 이대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싸우기에는 상당히 껄끄러운 상대였다.
“일단 정신부터 뒤흔들어주마.”
스킬 발동, 데스 로어.
크아아아아악-!
제로의 입이 쩍! 하고 벌어지며, 농밀한 죽음이 깃든 포효가 터져 나왔다.
특히나 효과가 미치는 범위를 최대한 압축하고, 압축한 데스 로어의 위력은 로스트 월드 시절, 최강의 존재라 불리는 레드 드래곤 게르슈드리마저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허나….
“음공인가! 허나 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스킬 발동, 천룡후!
무협 소설에는 흔히 수많은 음공들이 등장한다.
허나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열에 여덟은 이것을 꼽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자후였다. 중후한 내공을 지닌 초절정 고수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음공으로, 모든 마를 제압하고 무릎을 꿇리게 만든다는 전설 속의 음공!
무왕이 터트린 천룡후는 그런 사자후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음공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무왕의 포효 속에는 파마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무왕의 천룡후가 제로의 데스 로어와 충돌하는 순간….
콰가가강-!
둘을 중심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두 힘의 충돌로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던 폭발이 잦아들며 드러난 풍경은 경악 그 자체였다.
제로와 무왕.
그 둘을 중심으로 주변의 대지가 마치 거대한 운석이라도 떨어진 양 움푹 파여버린 것이다.
직경 수 킬로미터. 깊이만 수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크레이터의 중앙에 제로와 무왕이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40초.”
“아까부터 뭘 그리 시간을 재고 있는 것이더냐.”
“넌 몰라도 돼.”
말을 마치며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제로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블링크를 통해 무왕의 등 뒤에 나타난 제로는….
스킬 발동, 데스 기요틴.
망설임 없이 스킬을 발동했다.
제로의 손에 쥐어진 네크로노미콘이 파라랏! 하는 소리와 함께 펼쳐지는 순간.
발밑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무왕의 전신을 휘감으며 무릎을 꿇게 만들었으며. 그 머리 위로 서늘한 죽음이 깃든 거대한 날이 튀어나왔다.
“크흠-!”
무왕은 전신을 휘감으며 옥죄여 오는 사슬에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인간임을 포기하면서 강력해진 육체가, 천상기를 깃들여 더욱 강해졌음에도 제로가 만들어 낸 사슬을 끊어낼 순 없었다.
“놈-! 이것을 당장 풀지 못하겠…!”
“죽어.”
흉흉한 안광을 토해내며 외치는 무왕에, 제로가 무심히 입을 열었다.
마치 죄인에게 내리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그것이 울려 퍼지며, 상공에 만들어진 칼날이 떨어졌다.
무왕은 정확히 자신의 목을 향해 떨어지는, 서늘한 죽음이 감도는 기요틴의 칼날에 인상을 찌푸렸다.
“노옴-! 고작 이따위 공격으로 짐을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우득-!
우드득-!
기요틴의 칼날이 목을 베어버리기 직전, 무왕의 등뼈가 뒤틀리며 한 자루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기요틴의 칼날은 무왕이 만들어 낸 검과 충돌하며 튕겨 나갔다.
“흡-!”
촤자자작!
무왕이 기합성을 토해내자, 그의 등에서 튀어나온 새하얀 검이 홀로 휘둘러지며 육체를 구속하고 있던 사슬을 베어버렸다.
“흐음. 주인의 변화에 맞춰, 천무신검 또한 변화한 것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무왕은 허공에 두둥실 떠다니는 새하얀 검, 천무신검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본래의 천무신검은 하늘을 닮은, 푸른 검신을 지닌, 일반적인 청강검에 가까운 외형을 지녔다.
허나 기요틴의 칼날을 튕겨내고, 무왕을 구속하고 있던 사슬을 베어버린 천무신검의 외형은, 무왕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변해 있었다.
검신부터 손잡이까지.
모든 것이 새하얗게 물들어 있는 그것은 뼈를 갈아 만든 것만 같은 느낌을 풍겼으며, 그 외형 또한 평범한 청강검에서 벗어나 ‘마검’ 그 자체였다.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마.”
무왕이 제로를 향해 천무신검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제로는 그런 무왕을 바라보며 ‘흐음.’하는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20초. 뭐, 충분하겠지.’
다급하고, 초조했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의 제로는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제로는 ‘변해버린’ 무왕의 강함에 대한 적응을 끝낸 지 오래였다.
무왕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면서 얻은 강함은 단순히 육체의 강화. 그리고 더욱 정밀해진 기운의 컨트롤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변해버린 무왕은, 변하기 전과 비교해 수십 배. 혹은 수백 배 이상 강해졌다.
또한….
“이만 끝내자. 너무 질질 끄는 것도 꼴불견이다.”
“놈! 천무신검을 꺼낸 짐에게 더 이상 네놈의 힘은 통하지 않…!”
쿠궁-!
제로를 향해 난폭한 외침을 토해냄과 동시에 한 걸음 내딛으려던 무왕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그와 동시에 무왕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며 무언가에 ‘저항’하듯 미친 듯이 천상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노오옴! 짐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너는 지금까지 자신이 죽여온 생명의 숫자를 기억하고 있어? 아, 내 질문은 로스트 월드에서 죽여온 생명 또한 포함해서야.”
“그 무슨…?”
뜬금없는 제로의 질문에 무왕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모르겠지. 모른다고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어. 그 누구도 지금까지 자신이 죽여온 생명의 숫자를 기억하지는 못하니깐. 하지만 말이야…,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했든. 그렇게 죽여온 생명이 품은 원념의 무게는 상당히 무거울 거야.”
권능 발현, 원념의 무게.
쿠구궁-!
무왕에게 가해지던 압력이 미친 듯이 증가하기 시작하며.
무왕의 두 눈동자에는 보일 리 없는 ‘무언가’가 내비쳐 보였다.
그것은….
“이, 이것들은 무엇이란 말이냐!”
지금까지 무왕이 죽여온 원념이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무왕의 두 눈동자에는 처음으로 ‘공포’가 자리 잡았다.
“머, 멈춰라! 당장 멈추란 말이다!”
“싫어. 그리고 내 권능은 한번 발동하면 멈출 수 없거든. 그러니…. 그냥 조용히 사라져.”
그러한 말을 내뱉는 제로의 귀로, 수억의 원념에 휩싸여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무왕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편, 제로는 수억의 원념에 잡아먹혀 영혼이 소멸된, 이제는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무왕의 육신 너머를 내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튀어나오지? 언제까지 지켜만 보고 있을 생각인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