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지하인가.’
개조된 자금성 내부를 거닐던 제로가 멈춰 서며 중얼거렸다.
발밑을 내려다보는 사신의 흉안에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약동하고 있는 거대한 힘을 감지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힘이 아닌 악의 그 자체였다.
인간이 품은 악의가 뭉치고 뒤섞여, 만들어지는 무언가.
그리고 그것을 품고 있는 존재는….
“무왕.”
“불렀느냐!”
콰가강-!
제로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대지가 폭발하며 무왕이 튀어나왔다.
대지를 헤집으며 튀어나온 그는 자신만의 전용 장비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닮은 푸른 도복을 입고, 그 위에 새하얀 구름이 새겨진 천상포를 걸쳤다.
허리춤에는 무왕이 천무심공을 찾았을 때, 동시에 발견했다 알려진 천무신검이 자리 잡았다.
허나, 그런 무왕은 외형만 ‘인간’이었을 뿐, 그 내면을 들여다보자면 인간도, 괴물도 아닌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네놈도 룬과 마찬가지로 인간임을 포기한 거냐.”
“룬? 아~!”
제로의 물음에 무왕이 큭큭! 비틀린 웃음을 터트렸다.
“놈은 멍청했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더욱 강해질 수 있었을 텐데. 그 멍청함이 결국 놈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너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나는 다르다. 나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진정한 강함을 완성했다. 제로, 네놈 또한 내 적수가 되지 못해!”
츠즛-!
광기와 희열에 찬 외침을 토해낸 무왕이 움직였다.
대지를 박차며 움직이는 무왕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제로의 전신을 막대한 무형의 압력이 짓눌렀다.
“천왕보…, 확실히 쓸만한 기술이야.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내 움직임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
기본적으로 제로는 마법사다.
단순히 막대한 압력을 행사해, 제로의 전신을 짓누르는 것으로는 그 움직임을 봉할 수 없었다.
그 증거로….
스킬 발동, 더미 블링크.
파앗-!
순식간에 접근한 무왕의 천무신검이 휘둘러지는 찰나, 제로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칵! 하며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무왕이 베어버린 것은 단순한 더미에 불과했다.
제로는 자신의 더미의 목을 베어버린 무왕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내며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스킬 발동, 외차원의 무기고.
쩌억-!
제로의 등 뒤로 수천, 수만 개의 신기가 잠들어 있는 외차원의 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쏟아져라.”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듯 무왕을 향해 입을 연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에 등 뒤에 자리 잡은 외차원의 무기고에서 수백 개의 신기가 무왕을 향해 쏟아졌다.
하나, 하나가 농밀한 죽음을 머금고 있는 신기들.
그것들 중 하나에 스치기만 하더라도, 그 상처를 통해 흘러 들어간 죽음이 생명을 갉아먹고, 육체를 붕괴시킬 것이다.
하지만….
“크핫-! 최강자라 불리는 제로의 힘이 고작 이 정도였더냐!”
광기 섞인 외침을 토해낸 무왕이 검을 휘둘렀다.
무왕의 손에 쥐어진 천무신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천상기로 이루어진 수백, 수천 개의 오러가 튀어나오며 죽음의 신기들과 충돌했다.
쾅! 쾅! 쾅!
제로가 쏟아내는 죽음의 신기.
무왕이 만들어내는, 천상기로 이루어진 오러.
그 둘이 충돌할 때마다 사방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나고, 그 둘의 싸움의 무대가 된 자금성은 난장판이 되어 갔다.
건물은 무너지고, 대지는 헤집어진다.
그 싸움의 여파는 비단 자금성 내부에 한정되지 않고, 주변으로 뻗어나가 자금성을 중심으로 강렬한 지진마저 일으켰다.
허나, 그러한 싸움을 벌이는 두 존재는….
“죽어라!”
스킬 발동, 천무심공 천검난무.
촤라라락-!
검이 분열된다.
그러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재빠르게 휘둘러지는 무왕의 천무신검이 제로의 전신을 노렸다.
제로는 사방에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천상기로 이루어진 강력한 오러에 쯧! 하며 혀를 찼다.
“확실히 예전보다 강해지긴 했네. 하지만, 1에 1을 더한다고 10이 되지는 않아.”
스킬 발동, 퍼펙트 데스 실드.
쩌저저정-!
제로의 전신이 죽음으로 이루어진 막으로 둘러싸이는 순간, 사방에서 쏘아지던 천상기 충돌했다.
퍼펙트 데스 실드와 천상기로 이루어진 수천 개의 오러.
그 둘이 충돌함에 따라,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폭발이 제로를 뒤덮었다.
그 폭발력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대지는 운석이라도 떨어진 양 움푹 내려앉았으며, 하늘을 노닐던 구름은 비명을 내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고작 이 정도…!”
스칵-!
폭발 속에서 무왕을 내려다보며 말하던 제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언제 휘두른 것일까?
아니, 언제 접근한 것일까?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낸 무왕이 휘두른 천무신검의 날카로운 칼날에, 제로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
허공을 부유하다 바닥에 떨어진 제로의 왼팔은, 무왕이 내뿜는 천상기에 불타 올라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방금 뭐라 했더냐?”
잘려 나간 왼팔을 내려다보는 제로를 향해, 무왕이 비틀린 웃음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그런 무왕의 외형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는데, 기본적으로 무왕은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져 상당한 덩치를 지녔다.
그랬을 터인 근육이 지금은 상당히 압축되어, 날카롭다는 느낌을 풍기는 체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제로는 싸늘하게 식은 시선으로 무왕을 바라봤다.
보통의 경우,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것은 제로에게 있어 부상 축에도 들지 못한다.
애초에 내구도가 높은 육체도 아니었을 뿐더러, 잘려 나간다 한들 죽음을 집중시키면 순식간에 복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구도가 약하다고는 해도, 최소 최상급 허상괴의 공격이 아니라면 흠집 하나 나지 않지만 말이다.
헌데….
‘육체의 수복이 되질 않는다.’
무왕이 익힌 천무심공의 천상기.
그리고 그 속에 잡스럽게 뒤섞여 있는, 제로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바라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추악한 기운.
그러한 기운이 잘려 나간 상처에 머물며 육체의 수복을 방해하고 있었다.
적어도 무왕과의 싸움이 지속되는 동안은, 육체를 수복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어떤가? 이제 좀 위기감이 느껴지는가?”
무왕이 비틀린 웃음은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그에 제로는….
“하아-.”
제로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한숨이 토해졌다.
그와 동시에 제로의 전신에서 농밀한 죽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사방을 잠식해 들어갔다.
“인정해. 넌 강해졌어. 그러니… 나도 이제 기분 좀 내볼게.”
레비아탄과의 싸움으로 아직 육체는 불완전하다.
왕과의 일전을 생각해본다면, 불완전한 육체가 붕괴될 법한 큰 힘을 사용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고작 ‘무왕’ 따위에게 상처를 입었다.
그것에 현재 제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제한시간은…, 3분 정도인가.’
제로가 속으로 그러한 생각을 품기 무섭게….
“기분 좀 내보겠다고? 허세는 통하지 않는다!”
타다닷-!
무왕이 천왕보를 발동했다.
대지를 박차며 튀어 오른 무왕이 허공에서 천왕보를 내디딜 때마다 제로의 전신을 막대한 압력이 짓눌렀다.
“소용없어.”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천왕보를 통해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도착한 무왕이 다시 한번 천무신검을 휘두르는 순간, 제로의 전신에서 막대한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왔다.
“크윽-!”
검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죽음의 탁류에 휩쓸린 무왕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놈-!”
제로의 공격이 자신에게 통했다는 것이 그토록 분노스러운 것일까?
무왕이 격노를 터트리며 다시 한번 천무신검을 휘둘렀다.
스킬 발동, 천무심공 천룡일섬.
푸확-!
무왕의 손에 쥐어진 천무신검이 내질러지며, 그 검신에서 푸른 용이 튀어나왔다.
천상기로 이루어진 푸른 용, 천룡이 그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며 제로를 집어삼켰다.
“용이라…, 용 좋지. 나도 드래곤 한 마리 키우고 있거든.”
푸확-!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천룡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여는 제로의 가슴에서 막대한 죽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자리 잡은 보석에서 죽음이 터져 나오며….
-크아아아아!
사룡 덴드로의 대가리가 튀어나오며 역으로 무왕이 만들어 낸 천룡을 집어삼켰다.
찰나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그마저도 일부분만 튀어나왔음에도, 제로를 중심으로 사방 백여 미터의 모든 것이 죽어버렸다.
사룡 덴드로가 흘린 힘의 편린이 주변의 모든 것에게 평등한 죽음을 내린 것이다.
물론….
“허억-! 허억-!”
죽어버린 대지에 유일하게 생명을 품고 있는 존재가 있었으니, 무왕이었다.
허나 무왕마저 사룡 덴드로의 힘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죽어버린 대지에 천무신검을 지팡이 삼아 힘겹게 서 있는 그의 입에서 거친 숨이 연신 터져 나왔다.
“바, 방금 그건 도대체 무엇이냐…!”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던 무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는 일순간 튀어나와 자신이 만들어 낸 천룡을 집어삼키고 사라진 사룡 덴드로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는 듯, 제로를 향하는 그의 두 눈동자가 미미하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내가 키우는 애완 용이야. 힘은 쓸만한데 적아의 구분이 없다는 게 좀 불만이긴 해.”
확실히 사룡 덴드로의 힘이 적아를 구분할 수 있다면, 지구에 퍼져 있는 허상괴들을 쓸어버리는 것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무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제로에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괴물이… 괴물을 키우고 있었구나.”
“괴물이라니. 나? 아니면 너? 솔직히 말해서 너도 충분히 괴물이지 않냐?”
무왕의 중얼거림에 제로가 피식 웃었다.
하늘에 두둥실 떠 제로를 내려다보는 무왕의 외형은 또 한 번 뒤바뀌어 있었다.
그의 전신을 뒤덮은 피부는 검게 물들어 있었으며, 제로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피처럼 붉은 선홍빛으로 번들거렸다.
등에는 인간의 손이 이리저리 얽힌, 기괴한 날개가 돋아나 있으며, 입 안에 숨겨져 있는 이빨은 짐승의 그것과 같았다.
무왕.
그의 육체는 불과 몇 분 전 흡수했던, 귀마단을 복용한 후 죽어버린 플레이어들의 힘에 적응하듯 점차 변화하고 있었다.
저 모습마저 변화의 일부분일 뿐.
흡수한 힘에 온전히 적응하고, 그것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무왕은 다시금 변할 것이다.
“아직이다…. 아직이야…. 내 힘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야….”
푸욱-!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리던 무왕이 돌연 자신의 가슴에 손을 박아넣었다.
가죽이 찢어지고, 살을 파헤치며 들어간 무왕의 손이 스스로의 심장을 움켜쥐며 터트리는 순간….
두근-!
무왕의 육체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맥동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무왕의 전신에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과 존재감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허나….
“이제 2분 남았나.”
제로는 평온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을 체크할 뿐이었다.
* * *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빛의 이면에 몸을 숨겨, 제로와 무왕의 싸움을 지켜보던 백의 대장군이 입을 열었다.
그의 뒤에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군단장급의 허상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확실히 인간의 탐욕은 언제 봐도 추악하군. 별 볼 일 없는 힘을 얻고자, 자신의 근원조차 버릴 줄이야. 뭐, 그렇기에 더더욱 지켜볼 가치가 있는 종족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백의 대장군은 그 근원부터 변화하고 있는 무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왕.
그는…, 진정한 의미로. 그리고 스스로가 ‘인간’임을 버려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