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부유섬에서 사라진 제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었다.
협회에 반기를 들도록 선동한 미국… 아니, 더욱 정확히는 룬은 처리했다.
또한 룬에 의해 감금당한 연금술사나 대장장이 직업을 가진 플레이어들 또한, 블러드에 의해 구조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는….
“무왕만 남았나.”
중국의 주석 또한 무왕에게 협박당해 휘둘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무왕과 백의 대장군 라이트의 합작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까지 보왔던 무왕의 욕심과 탐욕이라면 충분히 인간을 배신하고, 허상괴의 편으로 돌아섰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베이징 거리를 걸어가는 제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중국에 자리 잡은 십강 중 하나인 무황성의 길드 마스터이자, 성주라 불리는 무왕.
그리고 중국의 주석이 기거하고 있는 장소인, 개조된 자금성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일반 시민’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으며, 그 빈자를 대신해 무황성 소속의 플레이어. 그리고 협회보다는 무왕을 더욱 따르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자리 잡았다.
그 모습은….
‘내가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건가.’
이것은 명백한 협회에 대한 반란이자, 자신을 적대하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걷고 있을 때….
돌연 제로를 향하는 주변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누군가는 슬그머니 허릿춤에 매어진 검에 손을 올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제로를 향해 은은한 살기를 내뿜었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 플레이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허상괴의 기운이 뒤섞여 있어.’
블루 문을 만들고 판매하던 은림과 세이메이가 사라진 이래, 플레이어들이 허상괴의 기운을 풍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허상괴의 기운이 뒤섞인 마나를 풍기고 있다는 것은….
‘허상괴 놈들. 인간들 사이에 얼마나 깊숙이 스며든 건지 원.’
저들은 어쩌면 실험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었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십강 중 하나인 무황성의 주인, 무왕. 그는 분명 허상괴…, 개중에서도 백의 대장군 라이트와 손을 잡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현상은 일어날 수 없었다.
한편, 그렇게 제로가 점차 개조된 자금성에 가까워지다 못해 입구에 도착했을 때….
주변의 플레이어들은 온통 허상괴의 기운이 뒤섞인 마나를 풍기며 제로를 향해 명백한 적의를 내뿜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제로.”
“넌?”
환영 마법을 걸친 제로의 앞으로, 한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에 청룡이 새겨진 푸른 도복을 걸치고, 허릿춤에 한 자루 검을 매고 있는 플레이어. 무황성의 부성주이자 무왕의 오른팔인, 일검무적이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플레이어였다.
“성주님의 말씀이 옳았군.”
“무왕이 뭐라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윽.
뒷말을 흐리며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등 뒤로 수십 개의 거대한 흑골의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상괴와 손을 잡은 네놈들을 살려둘 가치는 없겠지?”
“웃기는 소리. 우리는 네놈의 폭정에 저항할 뿐이다.”
“폭정은 무슨.”
일검무적의 말에 피식 웃은 제로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에 제로의 등 뒤에 두둥실 떠다니고 있던 수십 개의 흑골의 창, 데스 본 스피어가 일검무적을 향해 쏘아졌다.
허나 일검무적 또한 십강 중 하나인 무황성의 부 마스터이자 700레벨을 넘긴 플레이어.
그는 자신을 향해 쏘아진 수십 개의 데스 본 스피어에도 당황하지 않으며, 허릿춤에 매어진 검을 뽑아 휘둘렀다.
카가각-!
그의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수 개의 반월형의 형태를 한 오러가 쏘아지며 데스 본 스피어와 충돌했다.
오러와 충돌한 데스 본 스피어가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뼛조각들이 흩뿌려지는 것을 시작으로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자금성 내부에 있던 중국 주석과 무왕은,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전투음에 제로가 찾아온 것을 눈치챘다.
“히익! 난 죽었어! 난 죽었다고!”
제로가 직접 찾아왔다.
그 사실에 중국 주석이 겁에 질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마음 같아선 도망치고 싶었으나 또 도망친다 한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중국 주석의 한심한 모습에….
“쯧. 쓸모없는 놈.”
무왕이 혀를 차며 움직였다.
그는 각종 대장장이 플레이어와 마법사들에 의해 개조된 벙커 안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주석의 등 뒤에 멈춰 서며….
스칵-!
단칼에 주석의 목을 베어버렸다.
목이 베이며 바닥을 나뒹구는 주석의 얼굴은 제로에 대한 공포로만 얼룩져 있을 뿐, 자신이 죽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무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주석을 죽여버리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전원에게 전해라. 귀마단을 복용 후, 제로를 죽여버리라고.”
스륵-!
무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구석의 그림자 속에 들어가 있던 플레이어가 사라졌다.
귀마단.
그것은 백의 대장군 라이트가 전해 준 지식을 통해, 납치해 온 연금술사들을 쥐어 짜내 만들어 낸 환약이었다.
어떻게 보면 은림의 세이메이가 만들어 내던 폭혈단과 비슷한 성질의 환약이었으나, 그 성질은 더욱 끔찍했다.
적어도 폭혈단은 몬스터를 통해 만들어졌으나, 무왕이 언급한 귀마단은 몬스터는 물론 인간의 생명마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귀마단의 효력은 폭혈단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특히나 폭혈단의 경우, 복용한다 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하나, 귀마단의 경우에는 복용 즉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한 귀물을 망설임 없이 사용하라 하다니.
무왕에게 있어 인간의 목숨이란. 그것이 설령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부하라 하더라도,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면을 보여줬다.
한편, 그런 무왕의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존재가 있었으니….
‘일이 참 재미있게 흘러가는군. 역시 인간이란 존재는 재미있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백의 대장군 라이트.
그가 빛의 이면에 몸을 숨긴 채 , 무왕을 바라보며 음험한 미소를 흘렸다.
* * *
“그건 또 뭐냐?”
자금성 내부를 활보하며 플레이어들을 상대하고 있던 제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을 뒤쫓던 플레이어들이 잠시 멈칫하더니, 품에서 하나의 환약을 꺼내 삼킨다.
그와 동시에 육체가 괴물의 그것으로 변하며, 풍기는 기운이 더욱 증폭되었다.
특히나 괴물이 되어버린 플레이어들이 풍기는 기운은 이제 허상괴라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은….
“크으으-!”
강대한 힘에 취해 억눌린 목소리를 내뱉는 일검무적 또한 다를 바 없었다.
환약을 먹고 강해진다.
다만,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는 대신 괴물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불과 며칠 전, 일본에서 만났던 신선조의 플레이어들이 먹어버린 폭혈단과 비슷한 효과였다.
허나, 제로는 무황성의 플레이어들이 먹은 환약이, 은림과 신선조의 플레이어들이 먹은 폭혈단 이라는 이름의 환약보다 더욱 질이 안 좋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꺼냈던 환약에는 억울하게 죽어버린 인간의 원령이 덕지덕지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세이메이를 주축으로 만들어졌던 폭혈단의 경우에는 인간의 원령 따위는 뒤섞여 있지 않았다.
“무왕. 네놈은 역시 살려두지 말았어야 했어.”
그래도 십강 중 하나인 무황성의 성주였기에 최소한의 배려를 통해 그를 억압하거나, 그의 행동에 제약을 거는 등의 행위는 취하지 않았다.
헌데, 그러한 자신의 배려를 무시하고 이런 개짓거리를 벌이다니.
차라리 십강이고 뭐고, 놈을 죽여버리고 그 빈자리를 망자로 대처해야 했었다.
제로가 그러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크아아아-!”
인간의 언어마저 잊어버린 것일까?
일검무적을 필두로, 괴상한 약을 먹고 괴물이 되어버린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신채 능력을 사용해 달려드는 그들의 속도는 상당히 재빨랐다.
특히나 700레벨을 돌파했으며, 기묘한 환약에 의해 그 강함이 더욱 증가한 일검무적의 경우.
눈 한번 깜빡이기 무섭게 제로의 코앞에 당도하며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특히나, 괴물이 되어버린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너희도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거냐.”
블루 문에 의해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괴물이 되었음에도 플레이어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스킬을 사용해다.
그 증거로 일검무적이 휘두르는 검에는 검게 물들어 버린 뇌전이 깃들어 있었다.
일검무적.
그는 로스트 월드에선 흔히 뇌룡검왕이라 불리었다.
드래곤 나이트라는 히든 클래스를 가진 그는, 썬더 드레이크와 계약을 맺어 그 힘을 다룬다.
특히나 그가 다루는 뇌전의 경우, 십강 중 하나인 천둥 길드의 길드 마스터, 썬더에는 비할 바 못하나. 그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런 뇌전이, 기묘한 환약에 의해 강화되어 죽음을 뚫고 제로의 몸뚱어리에 내리꽂혔다.
콰가강-!
강대한 힘을 품은 검은 뇌전이 떨어지며, 대지가 검게 그을리고 사방에 검은 스파크를 튀긴다.
어지간한 플레이어라 하더라도 일검무적이 흩뿌린 뇌전에 직격당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어 보이는 위력이었다.
허나….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상당히 짜증 나 있는 상태거든? 그러니….”
죽어.
파앙-!
데스 로어를 응용해, 죽음을 담은 제로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제로의 입을 통해 퍼져나가는 목소리에 닿은 수천 명의 플레이어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는데, 1초. 아니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털썩.
괴물이 되어버린 수천의 플레이어들의 몸뚱어리가 일제히 쓰러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그들의 육체에는 더 이상 한 줌의 생명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고작 한마디.
단 한마디로 괴물이 되어버린 수천의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다.
“참 쓰레기같은 짓을 벌였…!”
죽어버린 플레이어들의 시체를 뒤로하며, 무왕을 향해 걸어가던 제로가 돌연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공허한 눈구멍에서 데굴거리던 사신의 흉안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들을 응시했는데….
“허. 단순히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약이 아니었다 이거냐?”
괴물이 되어버린 수천의 플레이어들의 시체가 점차 미라로 변하며, 그들에게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한 검은 연기에는 괴상한 약을 먹어버린 플레이어들의 기운이 담겨 있었는데, 그러한 것은 어느 한 점을 향해 이동했다.
저것들이 이동하는 도착점에는….
“무왕이 있겠지.”
이제 와서 저 검은 기운들의 이동을 막기에는 늦었다.
이미 대부분의 기운들이 무왕에게 이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검은 기운을 흡수한 무왕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지녔겠지.
하지만….
“그래봤자지.”
그러한 중얼거림을 내뱉은 제로는 망설임 없이 무왕을 향해 이동했다.
한편, 제로의 예상과 한치의 다름도 없이 무왕은 죽어버린 플레이어들에게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다.
애초에 플레이어들이 먹은 귀마단의 진정한 효능은, 그것을 먹은 플레이어들이 죽었을 때 품고 있던 힘을 무왕 본인이 흡수하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검은 기운이 흡수될 때마다, 점차 무왕의 육체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고.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변하기 시작했다.
“크흐-. 오너라, 제로여.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전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강대한 힘에 취한 무왕이 기묘한 웃음을 터트리고.
그러한 무왕을 빛의 이면에 몸을 숨긴 라이트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