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여기는…? 그런가. 공허한 섬이로군.]
“공허한 섬?”
룬의 중얼거림에 제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그러하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죽음뿐. 그 공허함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공허한 섬이라 불리지.]
“허, 참.”
룬의 대답에 제로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섬을 어떻게 부르든 그것 또한 상관없었다.
애초에 제로 또한 이 섬을 단순히 ‘부유섬’이라고 부르니깐.
다만….
“우리가 딱히 담소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나?”
[그렇지.]
저벅.
제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룬이 한 걸음 내디뎠다.
지금의 룬은 자연 그 자체. 비록 정령화와 정령 포식을 동시에 사용해, 모든 생명과 자연에 배척받는다고 하더라도, 룬이 품은 힘은 생명력을 지닌 자연 그 자체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룬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그가 딛고 있던 대지의 죽음이 밀려나며 그 틈을 생명이 채웠다.
이대로 룬이 활보하게 된다면, 이 섬은 공허한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을 내가 지켜볼 리가 없지만 말이야.’
그러한 생각을 품은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이는 순간.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후웅-!
제로의 등 뒤로 만들어진 거대한 흑골의 창이 룬을 향해 쏘아졌다.
[소용없다.]
콰앙-!
룬이 오른손에 쥔 삼지창을 휘둘렀다.
막대한 물의 정령력으로 이루어진 삼지창과 농밀한 죽음을 품은 거대한 흑골의 창.
그 둘이 충돌하자, 사방으로 죽음과 자연이 휘몰아치며 데스 본 스피어가 박살 났다.
[나는 신의 힘을 각성했다. 지금의 나는 자연 그 자체. 네놈의 공격은 무엇 하나 통하지 않…!]
퍼억-!
[커헉-!]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던 룬의 상체가 꺾이며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 움직인 것인지, 그런 룬의 앞에 나타난 제로가 주먹을 내뻗고, 그렇게 내뻗어진 주먹이 룬의 배에 틀어박힌 것이다.
“신치고는 별 볼 일 없는데?”
[네… 놈…!]
비아냥거리는 제로에 룬이 격노를 터트리며 삼지창을 휘둘렀다.
후웅-!
묵직한 파공음을 동반하며 휘둘러진 삼지창의 날이 제로의 몸이 닿기 직전….
스킬 발동, 더미 블링크.
제로의 신형이 사라지며 그 자리를 더미가 대신했다.
허공을 가르며 휘둘러진 삼지창은 그러한 제로의 더미를 베어버렸을 뿐이다.
[놈! 어디로 사라진 거…!]
“걱정하지 마. 도망은 안가니깐.”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룬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낸 제로에게서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왔다.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수고, 헤집으며 뻗어나가는 탁류가 룬을 뒤덮었다.
[크으으-!]
전신을 두드리는 죽음의 탁류가 주는 충격과, 생명과 자연을 갉아먹는 죽음.
그 두 가지 힘에 휩쓸린 룬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고작…! 고작 이 정도로 신이 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콰가가-!
죽음의 탁류 속에서 격노를 터트린 룬이 삼지창을 휘둘렀다.
그에 룬의 발밑에서 거대한 해일이 만들어지며 제로가 만들어 낸 죽음의 탁류를 밀어냈다.
제로는 허공에 몸을 띄우며 룬을 내려다봤다.
‘놈은 육체가 없는 정신체. 역병의 힘은 정신체에 통하지 않아. 죽음 또한 놈의 정령력과 생명. 자연력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거….’
상당히 까다롭다.
그것이 지금의 룬에 대한 평가였다.
허나 상대하기 ‘까다로울 뿐’, 이기거나 소멸시키지 못할 상대는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나는 제로. 오버 데스이자, 죽음 그 자체다.”
쿠구구-!
말을 마친 제로에게서 다시 한번 난폭한 존재감이 터져 나왔다.
농밀한 죽음과, 스산한 살기마저 뒤섞인 그것은 잿빛의 안개로 유형화되어 사방을 잠식하며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크윽-!]
룬이 다시 한번 억눌린 신음을 터트렸다.
주변을 잠식한 룬의 난폭한 존재감이 만들어 낸 무형의 압력에 짓눌린 것이다.
[까득! 제… 로…!]
거칠게 이를 간 룬이 괴성을 내지르며 움직였다.
상반신을 이루는 불꽃이 폭발하듯 터져 나가며 주변의 죽음을 불태운다.
하반신을 이루는 삭풍은 거대한 폭풍이 되어 제로를 중심으로 휘몰아쳤으며.
육체를 감싼 대지의 갑옷에 의해 부유섬의 대지가 용의 형태로 변하며 제로를 향해 그 거대한 입을 벌렸다.
마지막으로 오른손에 쥐어진 삼지창이 휘둘러지자 수천, 수만 개의 자그마한 물의 송곳이 만들어져 제로를 향해 쏟아졌다.
제로를 향한 룬의 공격은, 말 그대로 자연의 분노 그 자체였다.
허나…
“고작 이 정도로?”
쿠구구구-!
제로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죽음이 퍼져나가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죽음을 불태우며 퍼져나가는 작열도.
날카로운 칼날을 품은 폭풍도.
대지로 이루어진 용과, 수만 개의 물의 송곳도.
모든 것이 잿빛의 안개를 이루는 죽음과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룬의 두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 떻게! 나는 신의 힘을 가졌는데! 그런데… 도대체 왜! 왜 널 이길 수 없는 거냔 말이다!]
으아아아아아-!
룬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내지르며 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죽어!]
후웅-!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도착한 룬이 삼지창을 내질렀다.
삼지창이 가진 날카로운 세 개의 칼날에는 대지와 바람. 물과 불꽃의 정령력이 휘몰아치며 오색찬란하게 빛났다.
그 아름다운 빛은 닿는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며 나아갔으나….
“멍청한 놈.”
쿠궁-!
제로의 공허한 눈구멍에서 데굴거리는 사신의 흉안이 룬을 응시하는 순간, 그 움직임이 멈추었다.
사신의 흉안이 자신을 응시하는 순간, 무거운 사슬에 휩싸이듯, 무형의 압력에 짓눌려버렸다.
[크윽! 제… 로…!]
무형의 압력에 짓눌린 룬이 제로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허나 제로에게 완벽히 제압된 룬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했다.
제로는 그런 룬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멍청한 놈.”
제로의 입이 열리며, 스산한 죽음과 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룬의 전신이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그저 인류의 수호자로, 인간을 지키며 살아갔으면 좋았을 것을. 되도 않는 유혹에 빠져 단순한 도구로 전락해버리다니. 참으로 멍청한 놈이야.”
제로는 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무슨 말만 하면 틱틱대고, 적대하는 상대를 좋아하게 바라볼 존재는 몇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네가 인간인 상태로 나에게 반기를 들었다면 널 소멸시키지는 않았을 거다. 세이메이와 은림에 이어, 네놈까지 사라진다면 그 공백을 메꾸는 데 상당한 고생을 하게 되겠지. 그런데 말이야.”
룬을 향해 입을 여는 제로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들어 올려진 제로의 오른손에는, 거대한 대검, 망자의 폭거로 모습을 변한 네크로노미콘이 쥐어져 있었다.
“너도 선을 넘어버렸어.”
후웅-!
스각-!
제로가 무심히 망자의 폭거를 휘둘렀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휘둘러진 망자의 폭거의 날카로운 칼날이 룬의 육체를 훑고 지나가는 순간….
[끄아아아아악-!]
룬의 입에서 고통과 공포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룬의 육체가 부유섬 대지를 나뒹굴었으며, 그러한 몸뚱어리는 점차 죽음에 갉아 먹혀져 사라지고 있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단 말이다! 나는…. 나, 난! 신이 되었는데! 도대체 왜…?]
“지금의 너의 강함은 군단장만도 못해. 차라리….”
‘네가 인간이었을 때가 더 강했을 거다.’
그러한 말을 내뱉으며 제로가 등을 돌렸다.
룬은 점차 멀어져만 가는 제로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영혼마저 소멸해 버린 것이다.
한편, 그렇게 룬을 처리한 제로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만 튀어나오지?”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부유섬.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공허한 섬이라 불리는 그곳에는 이제 제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로가 지닌 사신의 흉안은 허공을 응시하며 움직일 줄을 몰랐다.
“뭐 그리 부끄럼이 많다고 숨어 있냐.”
스윽.
콱가강-!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돌연 허공이 폭발했다.
구름마저 찢어발기며 퍼져나가는 폭발 속에서, 한 존재가 걸어 나왔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순백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그것의 등장에 제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백의 대장군, 라이트.”
“오랜만일세, 왕의 대적자여.”
백의 대장군 라이트.
그는 천천히 대지에 내려오며 입을 열었다.
“날 죽이기 위해 찾아온 거냐?”
“그럴 리가. 마음 같아선 위대한 그분께 대적하는 네놈을 찢어 죽이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네. 지금은 단순히….”
그러한 말을 내뱉는 라이트의 시선이 제르의 뒤를 향했다.
그런 라이트의 시선이 닿은 곳은, 그 편린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해버린 룬이 있던 자리였다.
“저것을 회수하기 위함이었으나 이미 늦었나 보군.”
허나 그러한 말을 내뱉는 라이트에게선 ‘안타깝다’나, ‘아쉽다’라는 기색은 전혀 엿볼 수 없었다.
“뭐, 이미 늦었으니 본인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
그러한 말을 내뱉은 라이트의 신형이 점차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나타나, 뜬금없이 사라진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라이트에 인상을 찌푸린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후웅-!
콰직!
제로의 등 뒤로 만들어진 거대한 흑골의 창, 데스 본 스피어가 쏘아지며 라이트의 가슴을 관통했다.
허나 그 일격은 라이트에게 그 어떤 데미지도 입히지 못했다.
데스 본 스피어는 말 그대로 라이트의 가슴을 통과해, 단순히 바닥에 틀어박힐 뿐이다.
점차 투명하게 변하는 라이트는 그런 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네. 본인이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자네가 언제나 왕의 대적자로 있는 한. 우리의 만남은 필연을 넘어 운명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라이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로는 한때 라이트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 * *
미국 대통령의 죽음.
그리고 이어진 백악관의 소멸까지.
그것은 아직 주술왕 세이메이와, 십강 중 하나인 은림의 괴멸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세간에 또 다른 충격을 안겨줬다.
특히나 미국 대통령의 죽음과, 백악관의 소멸은 각 국가의 정상들에게 무시무시한 공포심을 안겨줬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대통령은 십강 중 하나인 헌터 길드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십강과 같은 전력에게 보호받지 못하는 다른 정상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개중에서 가장 공포에 휩싸여, 불안함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무, 무왕! 나는 괜찮은 것이겠지?”
중국의 주석.
그가 곁에 있는 무왕을 바라보며 외쳤다.
세간에는 미국의 대통령 또한 허상괴에 의해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중국의 주석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대량의 아이템을 매입하고, 각종 플레이어들을 납치하는 등의 행동을 통해 협회에 반란을 꿈꿔왔던 동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국의 주석은 미국의 대통령이 분명 제로에게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확신했다.
한편, 무왕은 공포에 떨고 있는 주석에 쯧! 하며 혀를 찼다.
‘세계의 패권을 양분하는 중국의 주석이란 인간이 이 정도로 겁쟁이일 줄이야. 차라리 죽여버리는 편이 좋겠군.’
무왕이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중국의 주석은 언제 제로가 찾아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