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룬….”
“오랜만이다? 제로.”
수 킬로미터의 거리를 뛰어넘어,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제로에 룬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런 룬은 특유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걸치고 있었으나….
“네놈. 인간이기를 포기한 거냐.”
겉모습은 인간 그 자체였다.
허나 그런 룬에게서 느껴지는 강대한 정령력의 저편에는, 허상괴 특유의 기운이 숨어 있었다.
“인간을 포기했다라. 뭐, 어떻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겠네. 하지만 말이야. 난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어. 단순히….”
콰가강-!
화살을 꺼내 활에 놓고, 시위를 당겨 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있었음에도 룬의 곁으로 다수의 화살이 나타나며 제로를 향해 쏘아졌다.
하나, 하나의 화살에는 불과 바람. 대지와 물의 정령력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러한 화살들이 제로와 충돌할 때마다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나는 선택받았을 뿐이야.”
룬이 입을 열었다.
그런 룬의 대답에, 폭발에 의해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걸어 나온 제로가 쯧! 하며 혀를 찼다.
“멍청한 놈.”
선택받았다?
틀렸다.
놈은 선택받은 게 아니다.
단순히 백의 대장군 라이트에게 속아 넘어갔을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 룬은 단순한 도구에 불과했다.
룬이 자신을 죽인다면 베스트요, 적어도 힘을 깎아 놓기만 해도 허상괴의 입장에선 이득이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단순히 강해진 힘에 취해 제멋대로 행동하고 지껄이는 룬의 모습은 참으로 꼴불견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네놈을 살릴 생각은 없어.”
츠즛-!
허공에 내뱉어진 목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제로의 육체가 농밀한 죽음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제로에, 룬이 당황하며 흠칫! 몸을 떠는 순간….
“죽어.”
머리 위에서 스산한 살기와 죽음이 감도는 제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다수의 거대한 흑골의 창이 쏟아졌다.
“칫-!”
시야를 가리는 수백, 수천 개의 데스 본 스피어에 룬이 혀를 차며 움직였다.
룬은 양발에 바람의 정령력을 두르는 것으로 이동속도를 대폭 상승시켜 회피를 했으며, 나아가 떨어지는 데스 본 스피어를 향해 불꽃의 정령력이 깃든 화살들을 쏘아댔다.
쾅! 쾅! 쾅!
콰가가강!
제로의 데스 본 스피어와, 룬의 불꽃의 정령력이 깃든 화살들이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고작 이 정도였어? 별거 없네!”
제로의 데스 본 스피어의 폭격을 막은 룬이 웃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룬에게 있어 제로는 드넓은 하늘. 아니, 광활한 우주 그 자체였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압도적인 강함을 지닌 존재.
그것이 제로를 바라보는 룬의 시선이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손을 내뻗어도 닿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제로가, 지금은 조금만 뻗어도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룬은….
스킬 발동, 일점집중.
쉐에에에에엑!
퍼억-!
룬의 활에서 쏘아진 화살이, 제로의 어깨를 꿰뚫었다.
자신의 공격이 제로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에 룬의 표정은 숨길 수 없는 희열로 물들었다.
한편, 제로는 아무리 라이트의 개입이 있었다지만 룬 따위의 공격이 자신의 육체에 닿았다는 것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좋아.”
쿠구구-!
조용히 중얼거린 제로에게서 난폭한 존재감이 터져 나왔다.
확실히 룬은 강해졌다.
놈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네놈이 버러지인 것은 변하지 않아.”
까득!
무심하듯 툭 내던져진 제로의 말에, 룬이 거칠게 이를 갈았다.
자신의 공격에 어깨가 꿰뚫렸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무시하는 듯한 제로의 시선과 말투에 룬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트렸다.
“역시 네놈은 마음에 안 들어!”
콰가가각-!
특유의 유들유들한 미소마저 지워버린 룬이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그의 손이 쾌속하게 움직이자, 손에 쥐어진 활에서 수백, 수천 발의 화살들이 쏘아져 제로를 노렸다.
허나 막대한 정령력이 깃든 화살의 폭격은 제로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저 부유하듯, 제로를 감싸고 있는 농밀한 죽음에 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이다.
“멍청한 놈.”
제로는 거친 분노를 터트리며,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는 룬에 쯧! 하고 혀를 차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와 동시에….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죽음의 탁류가,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죽음의 탁류에 밀려난 대기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친다.
대지는 지진이라도 난 양 우르르 떨리며 밀려났다.
그 속에 있는 룬은….
“크으윽-!”
전신을 두드리는 강대한 충격과, 육체를 잠식하며 생명을 갉아먹는 농밀한 죽음에 억눌린 신음을 터트렸다.
이대로 있으면 생명을 갉아먹는 죽음에 죽게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내가… 죽는다고…?’
그 분에게 선택받아, 인간이란 종의 한계를 뛰어넘고 초월한 자신이… 죽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자신은….
나는….
“나는 죽지 않는다! 으아아아아-!”
콰아아아앙-!
버럭 외친 룬의 전신에서 막대한 정령력이 터져 나왔다.
허상괴 특유의 기운 또한 뒤섞여 있는 그것은 사방을 잠식한 제로의 죽음과 충돌하고, 그것을 밀어냈다.
“허억-! 허억-!”
제로의 죽음을 밀어낸 룬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제로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과 분노가 뒤섞여 단시간에 너무 큰 힘을 사용해 버린 룬의 눈동자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룬은 제로를 향한 살의와 분노를 지우지 않았다.
“제로…, 죽인다. 네놈만큼은 반드시 죽여 버리곘…!”
푸부북-!
제로를 향해, 다시 한번 분노 어린 외침을 터트리던 룬의 전신에 흑골의 화살이 틀어박혔다.
룬의 육체에 틀어박힌 흑골의 화살은 농밀한 죽음을 품고 있엇으며, 그렇게 품은 죽음은 곳 틀어박힌 상처를 통해 룬의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끄으으윽-!”
룬은 상처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농밀한 죽음에 다시 한번 억눌린 신음을 터트렸다.
죽음에 생명이 갉아 먹힌다.
자신의 육체를 지탱하는 생명이 점차 잡아먹혀 사라진다.
그리고…, 자신은 점차 죽음을 향해 달려 나간다.
그 사실에 룬의 정신이 점차 공포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허나, 정신을 잠식하는 죽음의 공포마저 밀어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나는… 절대 네놈에게 지지 않아!”
스킬 발동, 정령화.
스킬 발동, 정령 포식.
그것은 제로에게 질 수 없다는 분노였다.
분노가 뒤섞인 외침을 터트린 룬이 두 개의 스킬을 발동했다.
각기 정령화와 정령 포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킬이 발동하자, 룬의 전신에서 막대한 정령력이 터져 나오며 생명을 갉아먹던 죽음을 밀어냈다.
아니, 단순히 죽음을 밀어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터져 나온 정령력.
각기 불과 바람, 대지와 물의 정령력이 뒤섞인 그것은 곧 룬을 집어삼켯다.
정령력에 삼켜진 룬의 육체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에 제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령화. 그리고 정령 포식.
둘 모두 제로 또한 잘 알고 있는 스킬이었다.
정령화는 일정 시간, 스스로의 육체를 정령과 같은 자연체로 뒤바꾸는 스킬이며.
정령 포식은 전직을 통해 계약한 사대 정령을 먹어 치움으로써 단기간에 강력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로스트 월드에서의 효과.
현실에서 사용하게 된다면, 정령화를 사용한 플레이어는 두 번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으며.
정령 포식을 사용한 플레이어는 자연과 생명에게 배척당해, 언데드 그 이상으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 그리고 정령들의 적이 되어버린다.
말 그대로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자폭기였기에, 회귀 전 제로의 연인이었던 플레이어조차 설령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두 스킬만큼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곧 룬은 모든 변화를 끝내고, 전신을 두른 정령력을 찢어발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변해버린 룬의 하반신은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삭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반신은 이글거리는 불꽃으로 변했다.
겉에는 단단한 대지의 갑옷을 두르고, 오른손에는 물로 이루어진 삼지창을 쥐었다.
그 모습은 더 이상 궁수도, 뭣도 아닌. 단순히 정령력으로 이루어진 괴물 그 자체였다.
[크흐-.]
변화를 끝낸 룬이 낮은 울림을 토해내는 순간, 강대한 힘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이것이…, 초월자가 된 기분인가.]
룬이 비어있는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중얼거렸다.
마치 신이라도 된 것만 같은 강대한 힘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이 힘이라면 제로. 아니, 그것을 뛰어넘어 자신이 지구의 신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네놈에겐 고마워해야겠군, 제로. 덕분에 난 모든 것을 초월한 신이 될 수 있었다.]
“신… 이라.”
허공에 웅웅! 울리는 룬의 목소리에, 제로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고작….
“그따위 힘으로 신을 자처하는 거냐? 병신아.”
진정한 의미의 초월체가 된 제로는 잘 알고 있었다.
흔히 인간들이 신이라 부르는 존재는 단순히 자신과 같은 초월체에 불과했다.
진정한 신은 말 그대로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신이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 지금의 제로조차. 아니, 시간을 들여 지금보다 더욱 강해진다 한들 ‘과연 내가 신에게 닿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리고….
‘허상괴의 왕. 그놈 또한 신이 아니야.’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룬이 움직였다.
삭풍으로 이루어진 발이 내뻗어지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진 룬이 제로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죽어라.]
후웅-!
제로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낸 룬이 삼지창을 내뻗었다.
강대한 힘을 품은 삼지창은 주변의 모든 것을 찢어발기며 나아갔는데, 그런 삼지창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
오직 제로의 목숨뿐이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날 죽이겠다고?”
스킬 발동, 퍼펙트 데스 실드.
쩌어엉-!
룬이 내지른 삼지창은 제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죽음의 방패에 막혔다.
그 둘이 충돌하는 순간, 사방으로 거친 충격이 휘몰아쳤으며 수백 미터 아래에 있던 대지가 움푹! 파이며 무너져 내렸다.
단 일합.
일공일방을 주고받았을 뿐임에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백악관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에 제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싸우면 미국이 남아나질 않겠네.’
룬을 죽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룬을 죽이려 한다면, 주변에 막대한 피해가 생기는 것 또한 명백한 진실.
그렇다면….
“잠시 무대를 바꾸자.”
쩌억-!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발 밑으로 공간이 갈라지며 거대한 입이 튀어나왔다.
농밀한 죽음을 머금은 거대한 입은 망설임 없이 제로와 룬을 집어삼키며 사라졌다.
한편, 그렇게 거대한 입에 집어삼켜진 제로와 룬이 다시 나타난 장소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거대한 부유섬이었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롯이 죽음뿐인, 단 한 줌의 생명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 제로와 룬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라면 마음 놓고 싸울 수 있겠지.”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는 인벤토리에서 네크로노미콘을 꺼내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