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하는 네크로맨서-165화 (165/200)

제165화

“무시한다 이거지.”

흑골로 이루어진 손가락으로 뼈의 옥좌를 툭! 툭! 건드리던 제로가 중얼거렸다.

무왕과 룬에게 연락을 취한지 벌써 30분이 흘렀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30분 동안 답변 하나 없다는 것은 자신의 호출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힘으로라도 끌고 올까요?”

제로가 불편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자, 그 앞에 서 있던 블러드가 입을 열었다.

허나 룬과 무왕의 직업을 생각해본다면, 블러드라 하더라도 그 둘을 힘으로 제압하기에는 다소 위험했다.

“아니, 내가 직접 찾아가지. 넌….”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가 죽음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워싱턴DC의 고층 빌딩 옥상.

그곳에 농밀한 죽음이 뭉치며, 제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워싱턴DC의 길거리는, 미국의 수도답게 활기가 넘쳐흘렀다.

플레이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목적을 가지고 바삐 움직이는 모습은 허상괴에 의한 공포 따윈, 단 1도 엿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길거리를 내려다보던 제로가 돌연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제로의 몸뚱어리가 훅! 하고 꺼지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고층 빌딩의 옥상에서 갑작스레 떨어지는 제로를 발견한 몇몇 사람들은 흠칫! 몸을 떨며 놀랐으나, 곧 일본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신경을 껐다.

그렇게 땅에 내려온 제로는….

‘우선 대통령부터 만나야겠지.’

워싱턴DC에 자리 잡은 백악관을 향해 걸어 나갔다.

제로의 의지에 따라 죽을 수도 있는 목줄이 채워졌음에도 헛짓거리를 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룬의 협박이 작용했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룬이 만났던 백의 대장군. 그놈이….’

제로가 채워 둔 목줄을 자신이 풀어줄 수 있다 회유했을 가능성 또한 드높았다.

어찌 되었든, 이번 사건은 대통령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어 나가는 제로의 시선에 헌터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다만, 자신이 직접 움직인다는 것은 최대한 숨겨야 했기에, 제로는 다소 강도 높은 환영 마법을 걸쳤다.

겉으로 보기에 제로는 평범 그 자체였다.

그러한 제로의 환영 마법을 꿰뚫어 보기 위해선 최소 700레벨을 넘겨야 한다.

사실상 미국 내에서 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플레이어는 몇 존재하지 않는다.

그 덕분일까?

“정지.”

백악관에 들어가려는 제로를,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가로막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룬이 길드 마스터로 있는 헌터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로, 허상괴로부터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백악관에 자리 잡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제로를 플레이어도 아닌, 평범한 시민으로 착각한 그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제로를 향한 그 목소리는 다소 예의를 갖추고 있었으나, 플레이어 특유의 선민의식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제로에게 말을 건 플레이어를 제외한 나머지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제각각 자신들의 무기에 손을 올렸다.

그런 플레이어들을 바라보며 제로는….

“잠들어.”

털썩-!

제로가 한마디 내뱉기 무섭게, 앞을 가로막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죽은 것은 아니다. 단순히 잠을 재웠을 뿐이었다.

그렇게 입구를 통과한 제로는 당당한 걸음으로 백악관 내부를 거닐었다.

다만….

“흠.”

제로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부산스러운 기척에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그것은 제로를 침입자로 오해한 플레이어와, 대통령의 경호원들이 바삐 움직이는 기척이었다.

“정지! 멈춰라!”

부산스러운 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걸어가던 제로가 백악관의 정문에 손을 올리는 순간, 사방에서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로와 가장 근접해 있는 플레이어들은 방어력이 높은 기사들이었으며, 그 뒤로 헌터 길드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궁수 계열의 플레이어들이 몸을 숨긴 채 활을 겨누었다.

플레이어들 사이사이에는 몬스터들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무기와 방어구를 착용한 경비원들이 뒤섞여 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제로를 막아서기 위해 나타난 플레이어들 중, 700레벨을 넘긴 플레이어는 없었던 것일까?

그들은 정체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제로를 단순히 ‘백악관에 침입한 플레이어.’로 생각했다.

제로는 자신을 포위한 플레이어들을 쭉 훑어보기 무섭게….

“잠들어.”

큭-!

크윽!

마법인가?

입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잠재우고 지나가려 했다.

허나 이번에 나타난 플레이어들의 레벨이 높았던 것일까?

아니면 수면이나 기절 따위의 상태 이상에 내성이 높은 것일까.

그들은 수면 상태에 저항하며, 한껏 긴장감을 드높였다.

제로의 목소리를 듣고 잠들어 버린 것은, 몬스터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다 한들, 플레이어가 아닌 평범한 경호원들 뿐이었다.

한편 제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잠들지 않는 플레이어들에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 목적이 뭐냐!”

“대통령.”

수면 상태에 저항한 플레이어 중 한 명의 외침에, 제로가 담백하게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단번에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암살자인가?

아니, 암살자라면 이렇게 당당히 침입했을 리가 없다.

그럼 누구지?

누구 얼굴을 아는 사람 있나?

그들은 너무나도 당당한 제로의 태도에, 도리어 당황하며 술렁였다.

허나 환영 마법을 통해 만들어진 외형은, 제아무리 헌터 길드에 소속된 그들이라 할지라도 누구 하나 알아보지 못했다.

제로는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조용히 물러난다면 죽이지 않을게.”

“웃기는 소리.”

제로의 말에 포위한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버럭 외쳤다.

정체는 모르겠으나, 그 목적은 대통령이라 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대로 제로를 순순히 보내기에는 상당히 위험했다.

“악감정은 없다. 허나 무단으로 백악관에 침입한 네놈의 행동을 원망해라.”

까딱.

그러한 말을 내뱉은 플레이어.

이곳에 모여있는 플레이어들의 리더로 보이는 중년인이 손을 까딱이자, 주변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근접 계열 직업군 플레이어들의 무기가 휘둘러지고, 머리 위로는 각종 화살과 마법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소용없어.”

스킬 발동, 데스 본 실드.

콰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뼈의 방패가 그들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냈다.

“네크로맨서…?”

제로를 향해 공격을 가했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닐 것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백악관에 침입한 적이 네크로맨서일 줄은 몰랐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플레이어나, 자신들과 같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경비원들을 한 번에 재운 것으로 미루어, 그들은 제로를 수면 따위의 상태이상에 특화된 히든 클래스를 가진 플레이어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한편 제로는 멍 때리고 있던 플레이어들을 쭉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지?”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오며 사방을 휩쓸었다.

주변의 플레이어들은 대지를 헤집으며 자신들을 덮치는 데스 웨이브에 으득! 이를 갈며 무기를 휘두르며 방어했다.

허나 방어가 무색하게 제로가 만들어 낸 죽음의 탁류, 데스 웨이브는 그들을 덮치고.

데스 웨이브와 충돌한 플레이어들은 한 움큼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 나갔다.

그나마 궁수나 마법사 따위의 원거리 계열 직업군의 플레이어들만이 데스 웨이브에서 멀쩡할 수 있었다.

“다음….”

“그만하시게.”

마무리를 가하려던 제로의 등 뒤로 문이 열리며, 한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갑작스런 중년인의 개입에 쓰러져 있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놀라 외쳤다.

“대통령님! 도망치십…!”

“괜찮네.”

플레이어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대통령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신원미상의 플레이어, 제로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자네가 올 것임을 예상했다네, 제로.”

…!

대통령의 입에서 ‘제로’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주변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의 두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한편, 제로는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대통령에 피식 웃으며 환영 마법을 거두어들였다.

그에 평범했던 인간의 외형은 사라지고, 스산한 죽음을 두른 흑골의 이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제로가 미국의 대통령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대화 좀 해볼까?”

씨익 웃으며 말하는 제로에, 대통령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러니깐, 룬의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네.”

백악관 내부에 자리 잡은 집무실.

그곳에서 미국 대통령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들은 제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와서 난 자네와 척을 질 생각이 없네.”

“흐음.”

이어진 대통령의 말에 제로가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대통령이 내뱉는 말이나, 그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는 진심으로 자신과 대적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이 남자를 본 적이 있어?”

쫙 펼쳐진 제로의 손 위로 백의 대장군 라이트의 환영이 만들어졌다.

그런 라이트의 모습을 본 대통령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 남자는…!”

“본 적이 있구나.”

“룬과 같이 날 찾아왔었네. 그리고….”

그리고…?

“잘은 모르겠으나 그 남자와 만난 이후, 룬은 변해버렸네.”

변했다… 라.

대통령의 말에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엇이 변했다는 것일까?

제로가 봐왔던 룬은, 자기중심적이며 상당히 이기적이었다.

스스로에게 이득이 된다면 무슨 짓이든 했으며, 한번 가지겠다 마음을 먹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했다. 흔히 말하는 소시오패스에 가까웠다.

특히나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비협조적이고, 틱틱대며 적대적이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딱히 뒤늦게 변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말이야.’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품기 무섭게, 대통령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제로, 자네가 그를 어떻게 보는지는 모르겠으나. 룬은 언제나 나름대로 미국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네. 허상괴라는 괴물들이 미국에서 날뛸 때, 가장 먼저 움직였으며 위험에 처한 시민을 못 본 척 무시하지도 않았지.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영웅이나 다름없었다네.”

‘이미지 메이킹을 참 잘했네.’

나름 사람 보는 눈이 있어 보이는 대통령마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룬이 자신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잘 만들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헌데…. 히어로 그 자체였던 룬이…. 자네가 보여줬던 백발의 늙은이와 만난 이후 변했다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으며, 협박과 회유를 통해 나에게 대량의 아이템을 매입하게 만들었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루…!”

퍼억-!

대통령이 입을 여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벽을 부수며 대통령의 가슴을 꿰뚫었다.

화살에 관통당한 대통령의 가슴에는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구멍이 뻥! 뚫려버렸다.

“커… 헉-!”

가슴에 구멍이 뚫려 버린 대통령이 한 움큼 붉은 피를 토해내며 쓰러졌다.

제로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대통령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룬.”

대통령의 가슴을 뚫어버린 화살이 만들어 낸, 무너진 벽 너머를 내다보는 제로의 시선에 한 명의 플레이어가 내비쳐졌다.

불꽃과 바람. 땅과 물의 4대정령을 대동하고, 강대한 정령력을 물씬 풍기는 플레이어, 룬.

그가 제로와 눈이 마주치며 씨익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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