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과연! 대적자여, 이것이 그대의 진심인 것인가? 피부가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그냥 죽어.”
후웅-!
콰직!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등 뒤로 만들어진 거대한 흑골의 창이 쏘아졌다.
흑골의 창, 데스 본 스피어는 왕의 조각의 복부에 틀어박히며 박살이 나버렸으나, 그것에 얻어맞은 왕의 조각의 상체가 살짝 숙여졌다.
“크흐. 좋구나.”
파라랏-!
허나 왕의 조각은 지금까지 상대해 온 존재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보유하고 있다.
그것을 증명하듯, 데스 본 스피어에 복부를 얻어맞았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허공에 부적을 흩뿌렸다.
사방팔방으로 흩뿌려진 수십 장의 부적이 불타오르며 사라지는 순간….
콰가강-!
제로의 머리 위로 수십 개의 청뢰가 내리꽂혔다.
제로는 전신을 관통하는 청뢰의 충격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직 멀었다.”
제로에게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생각인 것일까?
아직 제로가 청뢰의 데미지를 전부 털어내지 못했음에도 왕의 조각의 공격이 이어졌다.
왕의 조각은 다시 한번 허공에 수십 장의 부적을 흩뿌렸으며, 그런 부적은 순식간에 불타올라 사라지고….
커흥-!
제로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불꽃으로 이루어진 호랑이가 만들어졌다.
선홍빛 불꽃의 육체를 가진 호랑이들은 커헝-! 하는 울음을 터트리며, 망설임 없이 제로의 육체에 작열하는 엄니를 박아 넣었다.
불꽃의 호랑이, 염호가 내뿜는 열기는 주변의 대지를 흐물흐물하게 녹여 용암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소용없어.”
쩌적-!
쩌저적-!
콰르르-!
허공에 제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선홍빛 불꽃으로 이루어진 호랑이가 무너져 내렸다.
제로의 몸뚱어리에 꽂아 넣은 엄니를 시작으로, 전신이 얼어붙어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왕의 조각은 그 모습에 호오-! 하며 낮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과연 대단하구나. 네놈이 아니었다면 전신이 한 줌의 잿더미도 남기지 못하고 타들어 가 사라졌을 터인데.”
“칭찬은 고마운데…, 필요 없거든?”
스킬 발동, 사신의 시선.
파앗-!
제로의 등 뒤로 나타난 사신의 흉안이 흉흉한 안광읕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사신의 흉안이 터트린 안광에 닿은 모든 것이 얼음 동상으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왕의 조각이라 한들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연기하지 마. 그 정도로 네놈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깐.”
“크흐.”
제로의 말이 울려 퍼지기 무섭게, 왕의 조각이 전신을 뒤덮은 얼음을 깨부수며 걸어 나왔다.
“확실히 본신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군. 허나…, 이 육체가 가진 힘도 꽤나 쓸만하지. 오라, 왕의 첨병들이여.”
파라랏-!
말을 마친 왕의 조각이 허공에 부적을 흩뿌렸다.
흩뿌려진 부적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불타올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그렇게 사라진 부적이 만들어 낸 것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돌연 대지가 우르르-! 떨리며 갈라지고, 그 속에서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 야마타노 오로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위로는 짙은 뇌운이 뭉치며 그 속에서 전신에 번개를 두른 거인, 일본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폭풍신 스사노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외에도 길쭉한 코와 붉은 피부.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요괴 텐구 등등의, 각종 식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의 조각이 소환한 총 6구의 식신들은, 주술왕 세이메이가 아직 왕의 조각에게 집어삼켜지기 전 소환했던 식신들을 아득히 뛰어 넘는 강함을 지녔다.
“아직일세.”
파라랏-!
끼아아아악-!
또 한 번 부적이 흩뿌려지며 타오르고.
이번에는 허공에 귀곡성이 울려 퍼지며 왕의 조각이 소환한 6구의 식신들이 더욱 강화되었다.
제로는 백귀야행에 의해 강화되어, 자신에게 살기를 뿜어내는 6구의 식신들에 키득! 저도 모르게 비틀린 웃음을 내뱉었다.
“왕들의 싸움이다. 잡것들은 잡것들이 상대해야겠지.”
스킬 발동, 외차원의 창고.
쩌억-!
제로의 등 뒤로 공간이 갈라지며 짙은 심연을 머금은 외차원의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외차원의 창고가 품은 심연에 돌연 수십 쌍의 흉흉한 안광이 번뜩이며, 왕의 조각이 소환한 여섯 구의 식신들과 마찬가지로 여섯의 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걸어 나온 것은 저주왕 데이버그였다.
그것은 전신에 농밀한 저주를 두르고, 그 힘을 과시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뒤를 이어 나타난 것은 피처럼 붉은 망토를 두르고, 한손 에 심연을 머금은 듯한 흑검을 쥔 데스 나이트 킹이었다.
그 외에도 제로가 자가용으로 애용했던 본 드래곤이 농밀한 죽음을 두르며 그 거대한 몸뚱이를 이끌고 튀어나왔으며, 명왕의 번견이 세 개의 입에서 명계의 냉기를 토해내며 당당히 걸어 나왔다.
나머지 두 망자는 수만의 스켈레톤들을 이끄는 스켈레톤 엠페러와, 영체형 망자의 여왕 퀸 레이스였다.
“그리고 이어서.”
스킬 발동, 사신의 축복.
파앗-!
외차원의 창고에서 빠져나와, 제로의 등 뒤에 시립한 여섯 망자들의 머리 위로 죽음으로 이루어진 축복이 내려앉았다.
이것으로 왕의 조각이 소환한 여섯 구의 식신을 상대할 말은 갖춰졌다.
“으음.”
왕의 조각이 제로가 소환한 망자들을 보며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하나, 하나의 강함이 자신이 소환한 여섯 구의 식신들과 비교해 전혀 꿀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소환한 식신보다 더욱 강력할지도 몰랐다.
“참으로 짜증 나는 대적자로구나.”
“뭐, 너도 마찬가지야.”
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각기 소환된 식신과 망자들이 움직였다.
왕의 조각이 소환한 여섯의 식신과, 제로가 소환한 여섯의 망자들은 사방팔방을 누비며 충돌했는데, 그들이 충돌할 때마다 거대한 충격이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대지가 뒤엎어졌다.
그 강대한 힘의 충돌에 휘말린 은림과 신선조의 플레이어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죽음을 맞이했다.
“이 멍청한 놈의 기억에 따르면, 네놈은 인간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 아니었나? 그렇다면 어째서 저들이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지?”
왕의 조각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에 제로가 피식,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아까도 말했듯 저놈들은 ‘선’을 넘어버렸거든. 그보다…. 나에게 집중하지?”
츠즛-!
말을 마친 제로의 신형이 흐릿해지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순간에 제로의 움직임을 놓쳐버린 왕의 조각이 흠칫! 몸을 떨며 주변을 훑어볼 때….
스킬 발동, 데스 임팩트.
쩌엉-!
콰아아앙!
왕의 조각 등 뒤에 모습을 드러낸 제로가 망자의 폭거로 변한 네크로노미콘을 휘둘렀다.
거대한 대검의 형태를 한 그것이 왕의 조각의 몸뚱어리에 꽂히는 순간, 거대한 충격을 만들어내며 왕의 조각을 멀리 날려버렸다.
“크흠-!”
수백 미터를 날아가고 나서야 겨우 균형을 잡은 왕의 조각이 억눌린 울림을 토해냈다.
“그래. 지금은 대적자, 그대에게 집중해야겠지.”
꽈악-!
그렇게 말하는 왕의 조각이 부적을 꽉! 움켜쥐며 주먹을 만들었다.
그렇게 부적을 감싸며 쥐어진 주먹은 순식간에 아다만타이트 그 이상의 단단함을 가진 무언가로 변했다.
“네놈의 몸뚱어리를 으스러트려주마.”
콰앙-!
광철 특유의 번들거림을 지닌 주먹을 움켜쥔 왕의 조각이 움직였다.
그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대지가 산산이 터져 나갔는데.
그 모습은 과연 ‘패왕의 걸음’이라 칭할 정도로 패도적이었다.
한편, 왕의 조각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제로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로의 움직임은 왕의 그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음울하며, 기괴하고 섬뜩하며 조용했다.
그 모습은 마치 ‘죽음은 언제나 조용히 찾아온다.’라는, 누가 말했는지 모를 글귀를 떠올리게 만들 저도의 움직임이었다.
서로 상반되는 움직임으로 이곳저곳을 누비는 왕의 조각과 제로가 충돌할 때마다, 거대한 충격이 사방을 휘몰아쳤다.
그 강렬한 충격에 휩쓸린 플레이어들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운 없게 충돌에 휘말린 망자. 혹은 식신들마저 그 몸뚱어리가 망가지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괜찮은 것이더냐?”
“뭐가?”
한참 검과 주먹을 맞대던 와중, 왕의 조각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네놈은 육체를 구성함으로써 힘에 제약을 만들고. 그것으로 이 차원에 존재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헌데, 이렇게 격렬히 움직이다 그 육체가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네놈은 꼼짝없이 이 차원에서 추방되는 것 아닌가?”
“걱정도 팔자셔.”
왕의 조각의 말에 제로가 키득키득!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본체도 아닌, 고작 정신의 일부분만 깃든 그따위 인형으로 내 육체를 박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쿠우우우우-!
입을 여는 제로의 몸뚱어리로부터 음울하면서도 섬뜩한 죽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잿빛의 안개와도 같은 형태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죽음은 제로를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죽여 나갔다.
생명을 품은 것은 그 생명을 집어삼키고.
죽음을 품은 것은 그 죽음을 더욱 증폭시킨다.
특히나 죽음으로 이루어진 잿빛의 안개는 제아무리 왕의 조각이라 한들 우습게 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네놈이 온전히 강림했다면 이 정도쯤은 손쉽게 무시했겠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아?”
“크흠.”
제로의 말에 왕의 조각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 말이 맞았다.
고작 ‘조각’의 상태로는, 눈앞의 대적자 제로가 만들어 낸 죽음으로 이루어진 안개에 닿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다.
하지만….
“닿으면 위험하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허나, 다르게 말하자면 ‘닿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던가?”
푸확-!
그러한 말을 내뱉은 왕의 조각이 등에 돋아난 뼈의 날개를 펄럭였다.
뼈로 이루어진 날개가 한번, 한번 펄럭일 때마다 사방으로 광풍이 휘몰아쳤는데, 왕의 조각은 그것으로 죽음의 안개를 밀어낼 생각이었다.
불과 몇 분 전, 제로가 토해냈던 역병의 숨결을 밀어낼 때와 마찬가지로.
허나…
“뭐하냐?”
뼈의 날개를 펄럭이며 광풍을 만들어 내는 왕의 조각에 제로가 입을 열었다.
고작 저따위로 자신의 죽음을 밀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그렇다면 참으로 어이없는 발상이었다.
이것은 그 형태만 안개일 뿐, 죽음 그 자체다.
제로의 지배하에 놓여있는 이것은, 단순히 광풍이 휘몰아친다 해서 평범한 안개처럼 흩어지거나 밀려나지 않는다.
그것을 뒤늦게 눈치챈 왕의 조각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칫! 왕의 첨병들이…!”
상황이 위험하게 흘러간다.
그에 왕의 조각은 자신이 소환한 식신들을 불러들였다.
아니, 불러들이려 했다.
“무엇…!”
왕의 조각이 불러들이려는 식신은 이미 완벽하게 망가진 지 오래였다.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식신, 야마타노 오로치는 갈기갈기 찢겨 대지에 나뒹굴고 있었다.
폭풍의 신 스사노오는 가슴에 심연을 품은 듯한 흑검이 꽂혀 있다.
텐구는 등에 달린 양 날개가 찢어져 있으며, 양팔과 다리 또한 기괴한 각도로 꺾여 바닥을 나뒹군다.
그 외의 나머지 세 식신들 또한 제로가 소환한 망자들에 망가져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 모습에 왕의 조각이 당황하고 있을 때….
푸욱-!
언제 움직인 것일까?
등 뒤에 모습을 드러낸 제로가 죽음을 두른 손을 내뻗자, 그것이 왕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다.
“쿨럭-!”
왕의 조각은 꿰뚫린 상처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죽음에, 한 움큼 검은 피를 토해냈다.
“크흐. 이거 방심했군.”
“방심은. 단순한 힘의 차이일 뿐이야. 그러니…, 이만 사라져라.”
“크흐흐.”
제로의 말에 왕의 조각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 왕의 조각의 몸뚱어리는 점차 죽음에 잠식당하며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대적자여. 그대는 두 번째 기회를 잘 즐기고 있는가?”
왕의 조각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 것을 마지막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