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스윽.
가장 앞에 있는 플레이어가 손을 들어 올리자, 주변에 퍼져 있던 수백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반갑습니다, 제로 님. 저는 신선조 13번대 부조장 가유키라 합니다.”
가유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그는 검귀라는 이명을 가진 플레이어로, 검사라는 노멀 클래스를 지녔다.
레벨도 480 정도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pvp랭킹은 82위. 어떻게 보면 상당히 낮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노멀 클래스라는 점과 480대의 레벨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제법 높은 수치였다.
그보다 높은 랭크의 플레이어들도, 그보다 낮은 랭크의 플레이어들 모두가 마스터 레벨을 넘긴 것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검귀 가유키가 pvp랭킹 82위에 랭크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피지컬 덕분이었다.
검술에 대해 뛰어난 재능을 지닌 가유키는 현실에서는 무명의 검도가였다.
그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 검술을 홀로 갈고닦아온 그는, 로스트 월드라는 무대에서 피를 토할 정도로 수련해 온 검술을 통해 pvp 랭킹 82위를 거머쥔 것이다.
한편, 가유키는 슬쩍 제로의 뒤를 훑어봤다.
그런 가유키의 시선에는 신선조 13번대의 조장 츠바키가 다크 로드 스타툰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들어섰다.
“제로 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간단해. 너희들은 선을 넘었어. 그렇기에 내가 여기에 나타나, 너희들에게 ‘처벌’을 내리는 거야.”
“선… 을 넘었다라.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저희 신선조는 일본의 국민들을 위해 허상괴와 싸워왔습니다.”
“그건 인정. 그런데 말이야…, 너도 알지? 블루 문이라는 약에 대해서.”
제로의 입에서 ‘블루 문’이 언급되자, 가유키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 또한 13번대의 부조장이며, 검귀라는 이명을 떨치는 플레이어로서 블루 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가유키를 제외한 13번대의 대원들은 제로의 입에서 블루 문이 언급되었음에도, ‘그게 왜?’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13번대의 대원들 또한 블루 문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블루 문은 요즘 들어 플레이어들 사이에 퍼지게 된 마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 내가 몰랐을 것 같냐?”
“어쩔 수 없군요. 그렇다면….”
스윽.
가유키가 주먹을 쥔 손을 들어 올리자, 13번대의 대원들 모두가 각자의 무기를 꺼내 쥐었다.
누구는 검을, 누구는 활을. 누구는 단검을 꺼내 쥔 그들은 일제히 움직이며 제로를 포위했다.
“제로 님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여기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너희들이 날 죽일 수 있을까?”
“제로 님이 강한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존하는 플레이어 중 가장 강하겠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저희 13번대는 ‘강자’를 ‘사냥’하는 것에 있어 프로입니다. 오죽하면 저희 13번대가….”
가유키의 뒷말을 가로채며, 제로가 입을 열었다.
“신선조의 사냥개라 불리는 게 아니지.”
“그렇습니다.”
제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가유키가 손을 내리그었다.
그에 제로를 포위하고 있는 13번대의 대원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제로를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수십 개의 화살이 정확히 제로의 머리. 아니, 더욱 정확히는 미간에 박혀 있는 보석, 라이프 베슬로 ‘착각’하기 쉬운 그것을 노리며 쏘아진다.
검을 쥔 플레이어들은 각자의 스킬을 사용하며 제로에게 붙어,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제로는 자신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가하는 13번대의 대원들에 피식,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흘리며 마법을 사용했다.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가강-!
크윽!
컥!
미친!
제로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죽음의 탁류가, 쏘아진 화살을 박살 내고. 나아가 무기를 휘두르는 13번대의 플레이어들을 튕겨냈다.
몇몇 플레이어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반항했으나, 죽음의 탁류가 전해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건물에 처박혔다.
“음.”
단 일격.
일격에 13번대 대원의 합공을 막아내는 것을 넘어, 역으로 데미지를 가한 제로에 가유키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이곳에 있는 13번대 대원들의 숫자는 정확히 221명이다.
지금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 221명이었을 뿐, 신선조는 하나의 대에 천 명의 998명의 대원과, 1명의 부조장, 1명의 조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15개의 대로 이루어진 신선조는 소속된 대의 숫자가 낮다 해서 레벨이 낮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각 플레이어들의 강점을 추리고 추려 만들어진 것으로, 1번대의 대원들이 15번대의 대원들보다 레벨이 높은 것이 아니다.
개중에서 13번대는 가유키가 말했듯, ‘강자’의 사냥에 특화된 사냥꾼들이다.
비록 전원이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221명의 대원들의 합공을 튕겨낸 것으로도 제로의 강함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포메이션 D다!”
하잇-!
가유키의 외침에 플레이어들의 포진이 뒤바뀌었다.
가장 앞에는 자신들의 덩치만 한 방패를 쥔 기사가 앞섰으며, 그 뒤를 검사와 전사 따위가 자리 잡았다.
가장 뒤에는 궁수들이 자리 잡아, 제로를 향해 연신 화살을 쏘아댔다.
“뭔가 했더니, 단순한 전법이네.”
“그만큼 확실하기도 하죠.”
제로의 비아냥에 가유키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제로의 말대로 그들이 취한 포메이션 D는 단순한 전법이다.
하지만 단순한 만큼, 그 위력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가장 앞에 있는 기사들이 전력을 다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낸다.
그런 기사들의 뒤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상대가 공격을 실패해 드러내는 틈을 노리며 무기를 휘두르고.
가장 뒤에 있는 궁수들이 연신 화살을 쏘아대며 시선을 분산시킨다.
이 전법으로 신선조 13번대는 랭킹 697위의 랭커 또한 사냥한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야.”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가가-!
다시 한번 제로를 중심으로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왔다.
제로를 포위한 기사들은, 자신들을 덮치는 죽음의 탁류를 필사적으로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크아아아악-!
아악!
끄아악!
죽음의 탁류가 전해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그렇게 튕겨 나간 기사들의 몸뚱어리가 점차 검게 물들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제로의 공격은 사소한 것 하나, 하나가 모두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아무리 마나를 이용해 방어한다 한들, 제로의 죽음을 온전히 막아낼 순 없는 법.
제로의 공격이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점차 죽음이 잠식되어 생명이 깎여나가게 되는 것이다.
가유키는 단 일격에 전열을 붕괴시켜 버린 제로의 강함에 으음…, 하는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제로는 강하다.
괜히 플레이어 중 가장 강하다고 손꼽히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 생각했군. 모두 폭혈단을 복용한다.”
움찔-!
떨어진 가유키의 명령에 13번대의 플레이어들 전원이 몸을 떨었다.
폭혈단.
복용한다면 그 즉시, 레벨의 한계를 뛰어넘는 강함을 가질 수 있지만. 그 후유증은 막심했다.
운이 좋으면 레벨의 다운으로 그치겠지만,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폭혈단이었다.
그렇게 대원들이 주춤거리며 폭혈단의 복용을 꺼리자, 가유키가 쯧! 하고 혀를 차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유키가 꺼내 든 것은 ‘폭혈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진한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하나의 환약이었다.
“모두 망설이지 마라. 우리들의 목숨은 이미 세이메이 님께 바친 것. 그분을 위해서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한 말을 내뱉은 검귀 가유키가 가장 먼저 폭혈단을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크으으-!”
꽉 다문 가유키의 입술을 비집고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부조장인 가유키가 솔선수범해 폭혈단을 복용하자, 주춤거리고 있던 13번대의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폭혈단을 복용했다.
한편 제로는 가유키가. 그리고 13번대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 폭혈단이라는 의미 모를 것을 복용하는 것에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뭘 먹은 건지 알고 있는 거냐?”
“알고 있…, 크윽. …습니다.”
폭혈단은 로스트 월드 내에서 존재했던 아이템이 아니다.
신선조가… 아니, 은림이 현실에서 만들어 낸 것으로 그 성질은 블루 문과 비슷했다.
다른 점은 블루 문이 극한의 쾌락을 전해준다면, 폭혈단은 보다시피 극강의 강함을 선물해 준다.
물론 그 끝은….
“이성도 없이, 반복하는 것이라곤 오롯이 살육과 파괴뿐인 괴물로 전락해가면서까지 날 죽이고 싶은 거냐.”
“모든 것은 우리들의 주인, 세이메이 님을 위하여.”
“하….”
가유키의 말에 제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정 죽고 싶다면 내가 죽여줄게. 너희들이 괴물이 되어 날뛰기 전에 말이야.”
쿠구구구-!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에게서 난폭한 존재감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 존재감은 무형의 압력을 만들어, 폭혈단을 복용한 가유키. 그리고 13번대의 플레이어들 전원을 짓눌렀다.
하지만….
“소용없…, 습니다.”
폭혈단을 복용한 그들은 제로의 난폭한 존재감이 만들어 낸 무형의 압력을 우습다는 듯 찢어발기며 움직였다.
확실히 폭혈단을 복용하기 전과, 복용한 후의 그들의 강함은 차원이 달라졌다.
제로의 육체에 흠집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약했던 공격들은, 자그마한 생채기 정도는 낼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가장 위협적인 것은, 검귀 가유키의 검에 깃들어 있는 선홍빛 오러였다.
짙은 혈향을 풍기는 그것은, 평범한 마나로 만들어낸 오러 블레이드 그 이상의 파괴력과 절삭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것을 한 번이라도 허용하게 된다면, 생채기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소용없어.”
전보다 비약적으로 강해진 플레이어들이지만, 그들의 공격은 무엇 하나 제로의 몸에 닿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은 폭발적으로 강해졌다.
허나, 그들의 공격은 스스로가 힘을 제어하는 것이 아닌, 힘에 끌려다니는 듯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 어수룩한 공격, 백날 천날 해봐야 제로의 몸에 닿지 않는다.
“크으-!”
한참 동안 맹공을 펼치던 가유키가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점차 폭혈단의 기운에 잠식당해, 괴물화가 진행되어 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유키 뿐만이 아닌, 폭혈단을 복용한 다른 플레이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증거로 그들의 육체에 점차 괴물의 특징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5분. 아니. 못해도 3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다면 저들은….
‘모두 괴물로 변해버리겠지.’
그렇다면…, 그 전에 죽여버리는 편이 편하다.
“날 너무 원망하지 마라. 이 모든 것은 너희들이 쌓아온 업보이니깐.”
스킬 발동, 사신의 시선.
번쩍-!
제로의 등 뒤에 나타난 사신의 흉안이 푸르스름한 안광을 터트리는 순간, 달려드는 플레이어들이 순식간에 얼음 동상이 되어버렸다.
“이어서.”
스킬 발동, 쇼크 웨이브.
콰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거대한 충격파가 얼음 동상이 되어버린 플레이어들을 덮쳤다.
그 막강한 충격에 플레이어들의 육체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단 두 개의 스킬.
그것만으로 폭혈단을 복용한 221명의 플레이어 전원이 즉사를 면하지 못했다.
그나마….
“괴물화가 진행된 영향인가. 설마 이런 상태로도 살아있을 줄이야.”
가유키만이 바닥을 나뒹굴면서도, 그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허나 저것을 과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반신은 산산조각 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상반신 또한 왼쪽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나마 폭혈단의 효과와, 사신의 흉안에 의해 온몸이 얼어붙어 목숨을 이어갈 수 있을 뿐이다.
“괴물…, 이군요.”
가유키가 미약한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제로는 그런 가유키의 앞에 멈춰 서며 입을 열었다.
“그만 가라.”
“하하, 세이메이 님에게 영…!”
콰직-!
제로의 발이 떨어지며, 뭐라 외치던 가유키의 머리를 박살 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