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저벅. 저벅. 저벅.
제로가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디며 그림자에 숨어 있는 플레이어를 향해 걸어 나갔다.
플레이어는 제로가 점차 가까워질수록, 두 눈동자를 넘어 몸뚱어리마저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 시작했다.
“너는 조금 쓸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까?”
“제로….”
둘 사이의 거리는 고작 50cm 남짓.
말 그대로 코앞까지 다가가 말하는 제로에, 플레이어가 억눌린 목소리로 제로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왜 하필 제로가 여기에 있는 거야!’
플레이어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한창 협회가 설립된 초창기를 지나, 지금에 와서 제로는 한국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한국에 있어야 할 제로가 일본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나 그런 제로가 약, 블루 문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퍼트리기 위해 이용해왔던 길드의 사무실에 나타났다는 것에 더더욱 놀랐다.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 거지? 정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플레이어가 맹렬히 머리를 굴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든 빠져나가고자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대가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제로는 한눈에 보이는, 자신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플레이어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손을 내뻗었다.
일반인이 봤다면 평범한 인간이 손을 내뻗는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300레벨을 넘긴 플레이어의 눈에는 달랐다.
그는 스산한 죽음을 두르고 있는 흑골의 이형이 자신을 향해 손을 내뻗자, 공포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렇게 제로의 손아귀가 점차 가까워지며 목을 움켜쥐려는 순간….
“칙쇼-!”
퍼엉-!
플레이어가 돌연 품에서 하나의 구슬을 꺼내며 바닥에 내던졌다.
그렇게 내던져진 구슬은 사무실의 바닥과 충돌하기 무섭게 펑! 하고 터지며 하연 연기를 뿜어냈다.
“연막탄? 닌자? 에이, 도망쳤네.”
제로는 뜬금없이 등장한 연막탄에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갑작스런 연막탄의 등장에 잠시 얼빠져 있던 틈에, 플레이어가 순식간에 도망쳐 버린 것이다.
그 증거로 닫혀 있던 사무실의 창문이 활짝 열려, 서늘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제로는 플레이어가 도망치자, 등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스타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따라와.”
“예이.”
제로의 명령에 스타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제로와 스타툰. 그 둘의 몸뚱이가 각각 죽음과 어둠에 물들며 무너져 내리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허억-! 허억-!
제로에게서 가까스로 도망친 플레이어가 건물의 옥상과 옥상을 뛰어넘으며 움직였다.
그런 플레이어는 제로에 의한 공포심 때문인지, 호흡이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젠장! 왜 하필이면 그딴 괴물이 튀어나오고 지랄이야!”
일단 조치는 취해놨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속해 있는 13번대의 조장에게, ‘제로가 나타났다’라는 정보를 전한 지 오래였다.
이제는 제로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리고, 비상 상황을 위해 마련해 놨던 장소가 코앞이었다.
이대로 30초 정도만 더 달리면 대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꽤 바빠 보인다?”
그것을 허락할 제로가 아니었다.
제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움직이는 플레이어의 앞에 나타나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런 제로의 그림자에선 스타툰이 꾸물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의 옥상과 옥상을 뛰어넘으며 도망치던 플레이어는 갑자기 제로와 스타툰이 튀어나오자 놀라며 멈춰 섰다.
“괴물… 새끼….”
“괴물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네.”
으득! 이를 갈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하는 플레이어의 중얼거림에 제로가 입을 열었다.
말로는 심하니 뭐니 했으나. 제로의 분위기는 상당히 장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럼, 어디 쓸만한 정보가 있나 한번 확인해 볼까?”
스윽.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등 뒤로 세 개의 흑골의 화살이 만들어졌다.
그 모습에 플레이어는 으득! 다시 한번 입을 갈며 한 자루의 검을 뽑아 쥐었다.
“나, 신선조 13번대 소속 2등 대원, 사…!”
“응, 이름은 안 궁금해.”
쉐에에엑-!
검을 뽑아 쥐며 결연한 표정으로 외치는 플레이어에, 제로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에 제로의 등 뒤에 두둥실 떠 있는 흑골의 화살 세 개가 망설임 없이 플레이어의 머리와 심장, 명치를 향해 쏘아졌다.
나름의 각오를 다지며 말하던 플레이어는, 설마하니 제로쯤 되는 존재가 기습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당황하며 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아아-!”
허나, 제로가 쏘아낸 세 개의 흑골의 화살은 공포에 찬 표정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휘두르는 검을 피하며 플레이어의 머리와 심장, 명치에 틀어박혔다.
아니, 틀어박혔어야 했다.
막 흑골의 화살이 플레이어의 머리와 심장, 명치에 틀어박히려는 찰나….
카가강-!
플레이어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한 자루 카타나가 화살들을 모조리 튕겨냈다.
“넌…?”
뜬금없이 등장한 누군가에 방해를 받은 제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편, 신선조 13번대 소속, 2등 대원의 목숨을 구한 것은….
“조, 조장님!”
플레이어가 도망치던 와중, 정보를 전했던 신선조 13번대 조장, 츠바키였다.
“괜찮나?”
“사,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원의 감사 인사에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츠바키가 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뭐 하자는 짓이지? 제로.”
“글쎄? 음…. 이를테면 ‘처형’이랄까? 죄를 지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지. 안그래?”
“우리 대원이 무언가 실례라도 저질렀나?”
“실례라면 실례지?”
츠바키의 물음에 제로가 씨익 웃어 보였다.
비록 피부가 존재하지 않아, 실제로 보이는 웃음은 아니다. 허나 츠바키는 제로가 자신을 향해 비웃음에 가까운 무언가를 내뱉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제로. 아무리 네가 강하다 한들, 이곳은 일본이며, 은림과 신선조의 영역이다. 네놈이 이렇게 멋대로 설치고 다닐 순 없단 말이다.”
“아,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 안 그래도 일만 잘 풀리면 너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제로의 말에 츠바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은림과 신선조를 쓸어버린다.
제로가 내뱉은, ‘일이 잘 풀리면’이라는 말의 뜻을 츠바키는 모른다. 또한 제로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은림과 신선조. 두 길드를 홀로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오만함에 가까운 자신감은 뭐지?’
제로의 목소리에는. 그리고 제로의 행동은 ‘혼자서 두 길드를 쓸어버릴 수 있다’라는 오만함에 가까운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쳤다.
“네놈의 행동에 따라 은림과 신선조 대 신성과의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가? 아니, 네놈의 행동은 자칫 잘못하면 일본과 한국의 전쟁으로 커질 우려가 있…!”
카가각!
말을 하던 츠바키가 카타나를 휘둘렀다.
그에 반으로 갈라진 흑골의 화살이 츠바키를 스쳐 지나가며 바닥에 틀어박혔다.
츠바키는 슬쩍, 자신을 스치며 바닥에 틀어박힌 흑골의 화살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스스로가 선을 넘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선을 넘은 건 너희들이지. 약… 아니, 블루 문. 그걸 만들고 전 세계에 퍼트린 게 너희들이지 않아?”
“…….”
제로의 말에 츠바키가 다시 한번 침묵했다.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블루 문이 신선조. 아니, 더욱 정확히는 은림이 만들었다는 것은 극비 사항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신선조의 조장급 이상의 플레이어와. 은림의 몇몇 플레이어들 뿐.
그 외의 플레이어들은 단순히 ‘돈벌이’에 불과하다… 라는 정보밖에 몰랐다.
“너…, 그걸 어떻게….”
“럭키. 정답이었나 보네? 솔직히 나도 긴가민가했거든.”
다시 한번 씨익 웃으며 말하는 제로에 츠바키가 아차! 하는 표정을 내비쳤다.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츠바키는 이미 제로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단순한 떠보기였다니.
츠바키는 자신이 제로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에. 그리고 실수로 인해 자신들이 블루 문을 만들고 퍼트렸다는 것을 인정해버렸다는 것에 으득! 이를 갈았다.
“죽여주마.”
“네가? 날? 죽인다고? 정말? 가능하겠어?”
비꼬듯 말하는 제로에 츠바키가 움직였다.
그의 직업은… 아니, 신선조 길드의 조장급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무라이’라는 이름의 히든 클래스였다.
흔히 십강 중 하나인 무황성의 길드 마스터, 성주라고도 칭해지는 무왕의 직업인 무인과 비슷하나 그 결은 확실히 달랐다.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카타나 하나뿐.
걸칠 수 있는 갑옷도 중갑뿐이다.
그 증거로 대원을 구하기 위해 나타났을 때부터. 제로를 향해 달려드는 지금까지 사용하는 무기는 날카롭게 벼려진 카타나 한 자루뿐이다.
그 외에도 츠바키의 몸뚱어리에는 흔히 ‘일본의 사무라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갑옷이 걸쳐져 있었다.
“죽어라.”
스킬 발동, 비검-연.
촤라라락-!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도착한 츠바키가 검을 휘둘렀다.
그의 손에 쥐어진 카타나가 허공을 베어 가르며 제로의 전신을 노렸다.
신선조의 조장급 이상의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마스터 레벨을 넘겼다.
그것은 츠바키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그렇기에 츠바키가 휘두르는 카타나에는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둘러쳐져 있었다.
하지만….
“너, 형님에게 뭐 하는 짓이냐?”
카가강-!
제로의 그림자가 꾸물텅거리는 순간, 스타툰이 튀어나오며 단검을 휘둘렀다.
똑같이 오러 블레이드가 둘러쳐진 스타툰의 단검과, 츠바키의 카타나가 충돌하자 사방으로 오러의 파편이 흩뿌려졌다.
“넌…? 설마 스타툰!”
“오랜만이다?”
자신을 알아보며 외치는 츠바키에 스타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서로 일면식이 있는 듯 행동하는 두 사람에 제로가 의아함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서로 아는 사이였냐?”
“뭐, 로스트 월드 때 살짝 악연이 좀 있었죠.”
“네놈이 먼저 시작한 일이다!”
스타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츠바키가 버럭 외쳤다.
아직 로스트 월드가 활발하게 서비스를 하고 있었을 때, 스타툰은 강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직업의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서 ‘암살’이라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런 스타툰의 수련 아닌 수련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길드 중 하나가 바로 신선조였다.
오죽했으면 츠바키가 조장으로 있는 13번대와, 9번대가 합동해 스타툰을 뒤쫓고 있었겠는가.
그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제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잘 알겠어. 그럼 저건 네가 알아서 처리해 봐. 나는….”
그러한 말을 내뱉으며 제로가 뒤를 돌아봤다.
그런 제로의 공허한 눈구멍에서 뒹굴거리는 사신의 흉안에는, 수백의 플레이어들이 내비쳐졌다.
하나같이 신선조 13번대에 소속되어 있는 플레이어들로, 먼저 움직인 츠바키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플레이어들이었다.
“후딱 처리하겠습니다, 형님.”
“천천히 해, 천천히.”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츠바키와 스타툰이 동시에 움직이며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럼 나는 불나방들을 처리해 보실까.”
제로는 스타툰과 츠바키의 치열한 접점을 뒤로하며,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