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여기가 일본! 여기가 도쿄! 여기가… 덕들의 천국 아키하바라구나!”
6층짜리 빌딩의 옥상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스타툰이 감회에 젖은 눈으로 외쳤다.
허상괴가 나타났음에도 아키하바라의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국적도 다양해 일본인, 한국인, 외국인 가릴 것 없었다.
골목 구석구석에는 메이드 복을 입은 여자들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으며, 건물 내부에는 피규어니, 인형이니, 뽑기 기계니 하는 것들이 널려 있었다.
한편, 그렇게 아키하바라의 거리를 내려다보던 스타툰이 돌연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일본에 와도 되는 겁니까? 이건 사실상 밀입….”
“괜찮아.”
스타툰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사실상 일본에 가기로 했던 배가 귀항한 이상, 제로와 스타툰이 일본에 있는 것은 밀입국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그러면 어떠한가.
어차피 누구 하나 알아보는 사람도 없으며, 알아본다 한들 자신들이 밀입국했다는 증거 또한 없는데.
“뭐, 형님이 그렇다면야. 그런데 말입니다….”
“또 뭐?”
이번에 스타툰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걱정이 아닌 의문이었다.
“왜 하필 아키하바라에 온 겁니까? 신선조 애들을 찾으려면 이곳보다….”
“그냥.”
“예…? 방금 뭐라….”
“그냥 내 취향이라고.”
너무나도 당당한 제로의 대답에 스타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내뱉었다.
사실 알고 보면 자신의 형님, 제로도 오타쿠였던 것일까? 하지만 지금까지 옆에 붙어 있었음에도 그러한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는데.
“실없는 생각 하지 말고 잘 따라와.”
제로가 옥상에서 뛰어내리자, 스타툰 또한 뒤늦게 제로의 뒤를 따랐다.
한편, 길거리를 걷고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두 명의 남자가 떨어지자 다소 놀란 표정을 내비쳤다.
허나 그것도 잠시, 사람들은 곧 제 갈 길을 가기 바빴는데, 그것은 허상괴와 플레이어가 등장한 이래 제로나 스타툰과 같은 행동을 하는 플레이어들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행위는 금방 사그라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전 세계에서 심심하면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한편, 그렇게 아키하바라의 거리에 녹아든 제로와 스타툰은 곧 아키하바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때론 피규어 매장에 들러, 피규어들을 구경하기도, 책방에 들러 만화를 구경하기도.
때론 음식점이나 카페 따위에 들러 일본의 음식이나 디저트를 즐기기도 했다.
스타툰은 약의 출처를 밝혀내기 위해 온 자신들이 이런 여유로운 생활을 해도 되나? 싶은 표정을 지었으나.
그러한 행동을 하는 제로의 표정은 때론 즐거움이, 때론 흥미가 돋아나 딱히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물론 제로가 아무 생각 없이 아키하바라의 거리를 즐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저놈도 똑같네.’
얼핏 보기에도 아키하바라의 거리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 중, 플레이어가 아예 없다는 것도 이상한 일.
그럼에도 누구 하나 제로의 환영 마법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비록 제로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키하바라 거리 한복판에 흑골의 이형이 존재하고, 그것을 꿰뚫어 봤다면 소란이 일어나야 정상이었다.
그 말은즉슨, 아키하바라 거리를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들의 레벨은 모두 300레벨 이하라는 것이며….
‘저놈도. 이놈도. 아키하바라를 돌아다니는 플레이어의 80%가 약에 중독되어 있어.’
수천 명의 플레이어 중 80%가 약, 블루 문에 중독되어 있다.
역시나 일본에서 만들어져 한국으로 흘러 들어오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이 맞았다.
약의 본고장이 아니라면, 이런 많은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블루 문에 중독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만일 이대로 약에 중독된 모든 플레이어들의 괴물화가 진행된다면?’
그렇다면 아키하바라는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블루 문을 통해 괴물이 된 플레이어들은, 통상적인 강함을 훨씬 뛰어넘는 강함을 가지게 된다.
직설적으로 100레벨의 플레이어가 블루 문에 중독되고, 괴물화가 진행된다면 개체차가 있겠지만 최소 150에서 최대 200레벨 그 이상의 강함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약에 중독된 플레이어의 레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강함의 폭이 더욱 넓어진다.
즉, 아무리 아키하바라에 약에 중독된 플레이어가 없다 하더라도, 수천 명의 괴물화가 진행된 플레이어를 막을 순 없다.
물론 일본에는 십강 중 하나인 은림과, 십강에 버금가는 전력을 가진 신선조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기까지,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의 인간들이 몰살당하게 될 것이며. 이곳에 있는 모든 건물들이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제로가 한참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너희들, 한국의 플레이어지?”
골목의 그림자에서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흔히 스킨 헤드라 불리는 머리를 하고 있는 그에게선 미약하게나마 마나의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 나? 아, 아니. 우리?”
“그럼 여기 너희들 말고 한국인이 어디 있는데?”
얼빠진 스타툰의 반응에 스킨 헤드 플레이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그건 됐고, 어때? 죽이는 약이 있는데. 이건 플레이어게도 약발이 잘 듣는다구. 관심 있어?”
스킨 헤드 플레이어의 말에 스타툰이 제로를 돌아봤다.
왜 쓸데없이 아키하바라 곳곳을 돌아다니나 했더니….
‘이게 목적이었습니까?’
제로는 약을 판매하는 브로커에게 자연스레 접촉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스타툰은 제로를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한편, 제로는 자신에게 약을 권유하는 스킨 헤드 플레이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플레이어?”
“보고도 몰라?”
“그렇구나.”
스킨 헤드의 대답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의 향기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미약해 제로마저 긴가민가했다.
아마도 스킨 헤드의 레벨은 고작해야 20 언저리. 아니, 어쩌면 직업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10레벨 미만의 플레이어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잡일이나 하는 거겠지.
“좋아.”
한편, 제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골목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자, 말을 걸었던 스킨 헤드가 비릿한 웃음을 내비쳤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이 플레이어인 것을 과신하고, 세상에 자신의 적수가 없다고 여기는 멍청이들이.
‘물론 조만간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되겠지만 말이야.’
속으로 그러한 말을 중얼거린 스킨 헤드는 비릿한 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제로의 뒤를 따라 골목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밖의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골목의 어둠에 들어왔을 때….
스킬 발동, 데스 본 애로우.
퍼억-!
제로의 손 위에서 만들어진 흑골의 화살이 쏘아지며 스킨 헤드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죽여버려도 되는 겁니까?”
스타툰이 툭툭, 죽어버린 스킨 헤드의 시체를 발로 건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는 스킨 헤드의 죽음에 이렇다 할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제로 또한 별다른 말 없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런 제로의 손에는 일반인에겐 보이지 않는, 방금 죽어버린 스킨 헤드의 영혼이 쥐였다.
“흠. 쓸만한 정보는 없네.”
스킨 헤드의 영혼에 새겨진 정보를 훑어본 제로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놈은 말단 중의 말단으로,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도. 그 질도 처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블루 문과 연관된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기에, 죽여버린 뒤. 그 영혼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제로였다.
“어떻게, 더 돌아다녀야 합니까?”
“딱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래도 놈들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정도는 알아냈으니까.”
“그렇습니까.”
제로의 말에 스타툰이 고개를 끄덕이며 툭툭, 죽어버린 스킨 헤드의 시체를 발로 건드렸다.
스타툰 또한, 스킨 헤드의 죽음에 이렇다 할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럼 움직이자.”
“예.”
그 말을 끝으로, 제로와 스타툰은 골목의 어둠에 녹아들며 사라졌다.
* * *
언데드다!
시발! 습격인가?
주변에 네크로맨서는 없었잖아!
아키하바라 구석에 사무실을 둔 야쿠자 길드, 카라스.
일본어로 까마귀를 뜻하는 그들은 갑작스런 언데드의 습격에 당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타 조직의 습격인 줄 알았으나, 근처에는 이렇다 할 조직도. 길드도 없다.
또한 일본인 플레이어 중, 네크로맨서를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기에 카라스에 소속된 야쿠자들의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렇게 야쿠자들이 혼란에 빠져 당황하고 있을 때….
“이 멍청한 놈들! 뭣들하고 있는 거야! 단순한 스켈레톤과 좀비뿐이잖아!”
카라스의 길드 마스터이자 야쿠자 두목인, 한 중년인이 버럭 외쳤다.
그는 우락부락한 근육을 과시하는 복장에, 등에는 까마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직업은 무투가였는지 그의 양손에는 흑철로 만들어진 너클이 끼워졌다.
“멍청한 놈들!”
다시 한번 버럭 외친 그는 망설임 없이 언데드들의 한복판에 뛰어들며 양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주먹이 한번,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주먹에 얻어맞은 스켈레톤이며 좀비 따위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한편, 중년인의 기세에 얼타고 있던 나머지 조직원들 또한 제각기 무기를 뽑아 쥐며 언데드를 죽이기 시작했다.
비록 레벨은 낮아도, 그리고 야쿠자라 하더라도 카라스는 엄연히 플레이어들이 모여 만들어진 길드다.
조직원 전원이 100레벨을 넘겼기에, 단순한 스켈레톤이나 좀비 따위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 어떤 미친놈들이 감히 우리 조직을 습격해?”
마지막 좀비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중년인이 한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아그들…!”
뒤를 돌아보며 말하던 중년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던 동생들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사무실 곳곳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 시체의 중심에는….
“네가 오야붕 맞지?”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
극히 평범한 외형의 플레이어 한 명과, 척 보기에도 상당히 고레벨로 보이는 어쌔신 플레이어 한 명.
제로와 스타툰이 서 있었다.
제로는 발밑의 시체를 툭툭 건드리며 입을 열었는데, 그런 제로의 질문에 중년인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어디로 숨어 들어온 거지?
아니, 그것보다 불과 몇 초만 에 십여 명에 달하는 부하들을 모조리 죽이는 게 가능한 건가?
그것도 전원 플레이어인 부하들을?
중년인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뭐,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는 네 영혼만 있으면 그만이거든.”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가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중년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에 덜덜 몸을 떨었다.
머리는 어떻게든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었으나, 몸뚱어리는 그런 뇌의 명령을 무시했다.
은연중 내뿜어지는 제로의 죽음에 짓눌려버린 중년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중년인, 카라스 길드의 길드 마스터이자 카라스 조직의 두목인 그는 머리통이 터져 나가며 죽음을 맞이하고.
제로에 의해 영혼에 새겨진 기억을 모조리 빨려버렸다.
“이놈도 별다른 정보는 없네. 그럼….”
나름 한 조직의 보스임에도 쓸만한 정보가 없다는 것에 제로가 입맛을 다시며 사무실 구석을 바라봤다.
“너는 좀 쓸만한 정보가 있으려나?”
씨익 웃으며 말하는 제로에, 사무실 구석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한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마치 닌자와도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제로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너, 내가 누군지 아는구나.”
제로가 더욱 짙은 미소를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