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으음, 이곳은 언제 와도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블러드가 망자의 거성의 공기를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불렀으면 할 말을 할 것이지.
망자의 거성 내부를 가득 메운 죽음을 느긋하게 음미하고 있는 블러드를 흘기며 제로가 입을 열었다.
블러드는 그런 제로의 말에 씨익 웃어 보였다.
“별거 아닙니다. 그저….”
스칵-!
블러드가 뒷말을 흐리는 순간, 제로가 고개를 젖혔다.
그와 동시에 블러드가 날린 날카로운 피의 칼날이 스쳐 지나가며 벽에 한 줄기 자상을 만들어냈다.
“현실에서 당신과 만난 이래, 쭉 생각해 왔습니다. 당신이라면 저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진정한 주인?”
블러드의 말에 제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 진정한 주인. 로스트 월드라는 게임 속에서는 몰랐지만, 현실에서 뱀파이어가 되니 당신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제로, 당신은….”
“나는?”
“흑골의 탈을 뒤집어쓴 진정한 죽음이십니다.”
콰아아-!
말을 끝마친 블러드의 전신에서 피처럼 짙은 선홍빛 기운이 흘러넘쳤다.
그와 동시에 짙은 피비린내가 대회의실 내부를 가득 메웠다.
블러드 마스터, 블러드.
그는 십강 중 하나인 블러드 문의 길드 마스터이자, 뱀파이어라는 종족을 지닌 이종족 플레이어다.
허나 그는 평범한 뱀파이어가 아닌 엘더 뱀파이어. 흔히 진조라 불리는 종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죽음과 밀접한 종족을 지니고 있는 만큼, 그는 다른 플레이어와는 다소 다른 시선으로 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저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하지요.”
“그래서, 내 강함을 시험해 보겠다?”
“예.”
허허.
블러드의 말에 제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경우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쩌면 이것은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부작용인 것일까? 아니면 본래 이런 성격인 것일까.
아니, 그 무엇이 되었든….
‘십강 중 하나를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
지구의 관리는 더욱 손쉬워질 것이며, 놈과의 대결에서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블러드는 랭킹 10위의 최상위 플레이어 중 한 명이니깐.
물론….
‘날 시험하겠다는 저 생각은 마음에 안 들어.’
그러한 생각을 품은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대회의실 바닥에서 거대한 입이 튀어 올라 제로와 블러드를 집어삼키곤 사라졌다.
그렇게 거대한 입에 집어 삼켜진 둘은 어느새 망자의 거성 밖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텔레포트 계열의 이동과는 사뭇 다르군요.”
거대한 입을 통해 이동한 블러드가 입을 열었다.
제로는 그런 블러드를 바라보며 네크로노미콘을 꺼내 쥐었다.
“네가 날 주인이니 뭐니 하며 어떻게 생각하든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야. 하지만 말이야, 날 시험해 보겠다는 네 생각이 참 마음에 안 드네?”
쿠구구-!
말을 이어나가는 제로의 몸에서 난폭한 존재감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존재감은 무형의 압력을 만들었으며, 블러드는 그 압력에 짓눌리고 있음에도 연신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니 역으로 말할게. 죽지 마. 네가 죽지만 않으면 내 부하로 받아 줄게.”
콰가강-!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로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허공에 거대한 흑골의 창, 데스 본 스피어와 흑골의 화살, 데스 본 애로우. 그 외에 각종 마법이 발동하며 블러드에 쏟아졌다.
하지만 제로의 죽음을 한껏 머금은 흑골의 폭격에도 블러드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가락에 낸 상처를 통해 흘러내리는 피로 거대한 방패를 만들어 제로가 만들어 낸 폭격을 막아낼 뿐이다.
“과연, 제로 님이십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제로의 공격을 막아내는 블러드가 입을 열었다.
그런 블러드의 목소리에는 다소의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저도 방어는 취향이 아니라서요. 그러니…,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 보도록 하지요.”
푸드득-!
블러드의 몸이 무너지며, 사방으로 수천 마리의 박쥐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뱀파이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킬, 박쥐화였다.
허나 블러드는 엘더 뱀파이어, 진조였다.
수천 마리의 박쥐로 변하는 저것이 단순한 박쥐화 스킬이지는 않을 것이다.
제로가 품은 그러한 생각이 진실이라는 양, 사방으로 퍼져나간 수천 마리의 박쥐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블러드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떻습니까?
“꽤나 쓸만한 스킬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엘더 뱀파이어. 진조라 불리는 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입니다.”
수천의 블러드가 일제히 입을 열자, 제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블러드의 목소리에는 상대의 정신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성질이 깃들어 있었다.
비록 제로의 두터운 정신력을 뚫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성질은 제로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선 숫자를 좀 줄여볼까.”
퍼억-!
제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블러드의 머리통이 산산이 터져나갔다.
“무슨?”
“뭐죠?”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수천의 블러드가 일제히 당혹감을 드러냈다.
마법을 사용한 흔적은 없다.
그렇다고 물리적인 공격을 감행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공격한 것일까?
블러드가 그러한 고민을 하며 당황하고 있을 때, 제로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뼈로 된 제로의 손가락이 블러드를 하나씩 가리킬 때마다, 지목된 블러드의 머리통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시간이 흐를수록 블러드의 숫자가 착실히 줄어들었다.
“일단 움직여.”
“모두 조심해.”
이 이상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
그러한 판단을 내린 블러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블러드는 양손에 블러드 네일을 만들며 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떤 블러드는 피로 만들어진 창과 화살 따위를 쏘아대며 제로를 공격했다.
어떤 블러드는 전신에 핏빛의 기운을 두르며 육탄 돌격을 감행했다.
비록 수천으로 나뉘어 개개인의 전투력은 약화되었을지언정, 그마저도 일반적인 플레이어나 허상괴들은 감당할 수 없는 강함을 지녔다.
그러한 블러드 수천의 합공은 제아무리 제로라 하더라도 위험하다.
‘…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제로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피의 화살과 창.
사방에서 조여오는 블러드 네일과, 핏빛의 기운이 둘러쳐진 주먹 따위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수천으로 나뉘어 약해졌다 한들, 블러드는 블러드다.
하지만… ‘온전한 하나’로 전력을 다해 공격하지 않는 이상….
“날 죽일 순 없어.”
스킬 발동, 퍼펙트 데스 실드.
콰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반투명한 배리어가 만들어지며, 수천의 블러드가 감행한 공격을 모조리 막아냈다.
확실히 저 전투법은 나름 쓸만했다.
하지만 저러한 공격은 ‘절대적인 강함’을 지닌 ‘개인’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공격법이었다.
“이런.”
“단단하군요.”
“확실히 제로 님이십니다.”
피어오른 흙먼지가 걷히며, 긁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제로를 보며 블러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로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블러드에게 입을 열었다.
“수천으로 나뉘었음에도 이정도의 공격력. 확실히 쓸만해. 특히나 수천 명으로 이루어진 합공이라면 스스로보다 강한 존재라 하더라도 우위를 점할 수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너의 이 방식은 절대적인 강함을 가진 개인에게는 통하지 않아.”
와르르-!
그 말과 함께 제로의 신형이 무너져 내리며 사라졌다.
그에 블러드가 당황하며 주변을 훑어보고 있을 때….
“하나가 되지 않으면 위험하다?”
머리 위.
상공 수백 미터 위에서 제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동시에 죽음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컥-!
크악!
끄아악!
데스 본 스피어.
데스 본 애로우.
데스 캐논.
데스 불릿.
데스 웨이브.
그 외에도 기타 등등 다종다양한 마법들로 이루어진 폭격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며 블러드를 덮쳤다.
수천의 블러드는 죽음의 폭격에 제각기 방어 행위를 취했으나, 소용없었다.
어떤 블러드가 몸을 빼내며 회피를 취해도, 쏟아지는 공격들은 유도 기능이라도 달려있다는 양 끝까지 따라붙으며 추격했다.
피를 이용해 방패를 만들어도, 그 방패를 뚫어버리며 머리통을 부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수천이었던 블러드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어 어느새 수백이 되어버렸다.
“큭! 모두 모여!”
“이대로 분열해 있으면 당한다!”
“하나가 되는 거다!”
제로가 만들어 낸 죽음의 폭격 속에서 살아남은 수백의 블러드가 뭉치며 다시 하나가 되었다.
허나 하나가 된 블러드의 낯빛은 뱀파이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유난히 창백했으며, 입가에는 한줄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네가 멍청한 거야.”
입가에 흐르는 피를 훔치며 말하는 블러드에 제로가 피식 웃었다.
“예. 이건 제 실수이지요. 상대가 제로 님인걸 알고 있음에도,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적들과 같은 방법으로 처리하려 했다니. 제가 멍청했습니다.”
블러드는 스스로가 멍청했다는걸 인정했다.
그 모습에 제로는 의외라는 시선으로 블러드를 바라봤다.
흔히 랭킹 1000위권 이내의 최상위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강함에 대한 자부심이 유달리 드높았다.
어떻게 보면 오만함이라고까지 보였는데, 그렇기에 눈앞의 블러드처럼 스스로의 실수를 쉽사리 인정하는 모습은 흔치 않은 것이었다.
“넌 뭔가 다르네.”
“그렇습니까?”
제로의 말에 블러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다시 시작하도록 하죠.”
츠즛-!
자세를 잡은 블러드가 한 발짝 내딛는 순간,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순간이동 계열의 스킬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뱀파이어 특유의 핏빛의 기운, 혈기를 이용해 신체능력을 극한으로 상승시키고. 그렇게 상승시킨 육체를 통해 상식을 초월한 스피드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제로는 블러드가 모습을 감추자, 재빨리 사신의 흉안을 움직였다.
하지만….
‘포착할 수 없다.’
오버 데스.
죽음 그 자체인 초월자가 되었음에도 폭발적인 스피드로 움직이는 블러드를 포착할 수 없었다.
그것은 블러드의 신체 능력이 초월자와 비등한 것이 아닌, 단순히 초월자로서의 제로의 강함이 제약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오버 데스가 된 제로는 본디 외차원으로 넘어갔어야 한다.
허나 지구에 남아있기 위해, 제로는 스스로에게 ‘육체’라는 제약을 걸어 지구에 남았다.
즉, 지금의 제로의 강함은 오버 데스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점을 포착할 수 없다면 면을 덮어 버리면 그만.”
콰가가-!
그러한 중얼거림을 내뱉은 제로의 몸에서 막대한 죽음이 터져 나왔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죽음은 거대한 헤일이 되어 부유섬 전체를 뒤덮었으며, 폭발적인 속도로 사방팔방을 누비고 있던 블러드는….
“하하, 실화입니까?”
상식을 초월해버린 제로의 공격과 강함에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 * *
“청과 황. 자와 무가 당했다.”
“알고 있어.”
태양 빛조차 닿지 않는 심해 깊숙한 어딘가.
그곳에 다수의 허상괴들이 모여들었다.
심해에 모인 허상괴 하나하나의 강함은 지금까지 제로가 죽여왔던 군단장급이었으며. 몇몇 허상괴들은 그런 군단장급조차 상회하는 강력함을 가지고 있었다.
“놈의 눈을 피해 이 차원에 발을 들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어.”
끄덕.
한 허상괴의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이렇듯 우리들이 멀쩡히 강림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솔직히 말해서 놈의 강함은….”
이런 약소 차원에 묶여있을 만한 강함이 아니었다.
놈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스스로에 제약을 걸어두면서까지 남아있는 것일까?
아니,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제아무리 놈이 강하다 한들, 왕께서 강림하신다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기 위해서….
“그럼 슬슬 움직이도록 하지.”
“모든 것은….”
“왕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