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5군은 시민들을 쉘터로 대피시켜라!
4군부터는 각자 파티를 짜 허상괴들을 처리하는 거다!
우리들도 질 수 없지!
괴물들을 베어 죽여라!
하늘에서 제로가 군단장과 대치하고 있을 때.
지상에서는 신성을 비롯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허상괴들과 싸우고 있었다.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들은 레벨이 낮은 대로.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은 레벨이 높은 대로 각자의 방식대로 허상괴들을 상대했다.
허나 구멍에서 쏟아지는 허상괴들의 숫자는 끝이 없었으며,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상위의 존재들이 지휘를 하는 허상괴들의 전투력은 실질적으로 한두 단계 더 높았다.
그로 인해 허상괴들과 싸우는 플레이어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허상괴들에 의한 피해가 극심해지자,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던 신성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누나.”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이구나.”
신성의 부름에, 신성 길드의 부 마스터이자 친누나인 일격필살의 루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나에게 맡기고 마음 편히 날뛰고 와.”
“고마워, 누나.”
루나의 말에 신성이 옅은 미소를 내비치며 움직였다.
그렇게 움직인 신성은 빌딩을 타고 점프해 하늘 높이 몸을 띄웠다.
수백 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본 지상은 더욱 난장판이었다.
서울 곳곳에선 허상괴와 플레이어들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들의 전투에 건물들은 무너지고, 길거리는 화염에 휩싸였다.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 시민들은 그런 싸움의 여파를 피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쉘터로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본 신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더 이상… 사람들을 죽이지 마.”
파앗-!
신성이 속삭이듯 중얼거린 순간, 육체가 환한 빛에 휩싸였다.
눈을 멀게 만들 것만 같은 순백의 빛이 사그라들고, 그 속에서 걸어 나온 신성의 모습은 아까와 전혀 달라져 있었다.
등 뒤로 하나의 날개가 펄럭였다.
그것은 보통의 날개처럼 한 쌍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한 짝의 날개가 오른쪽 어깨뼈에서 돋아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날개와 마찬가지로 순백의 링이 두둥실 떠다녔으며.
신성의 두 눈동자는 순백의 안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전신을 뒤덮은 것은 성기사들이나 입을 법한 갑옷이요, 한 손에는 신기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성창 롱기누스’가 쥐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야말로 신성의 진심 모드.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신성은 숨김없이 모든 힘을 드러냈다.
“사람들을 죽이지 마.”
후웅-!
퍼억!
조용히 중얼거린 신성이 손에 쥔 성창 롱기누스를 쏘아냈다.
쉐에에엑!
대기를 가로지르며 쏘아진 롱기누스에 스친 허상괴들은 그 등급을 막론하고 순백의 불꽃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수백의 허상괴들을 불태우며 나아간 롱기누스는 곧 대지에 틀어박혔는데, 그 순간….
파아앗-!
롱기누스를 중심으로 터져나간 막대한 신성력이 서울 전역을 뒤덮으며, 그 대지에 깃들었다.
스킬, 성역 선포.
그것은 하프 엔젤의 모습으로, 성창 롱기누스를 이용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성역 선포의 능력은 아군에게는 막대한 버프와 회복을, 적에게는 막대한 디버프와 데미지를 입히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홀리 그라운드와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허나 그 효과는 홀리 그라운드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한편, 성역 선포가 발동하자 그 위에 있던 허상괴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최하급 허상괴들은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하며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나마 중급의 허상괴들이 어느 정도 버틸 뿐이다.
상급부터는 이렇다 할 데미지를 입지 않았지만, 성역 선포가 주는 디버프에 본신의 무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아직 멀었어.”
신성은 성역 선포에 휘말려 죽어 나가는 허상괴들을 바라보며, 또 하나의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발동, 홀리 그랜드 크로스.
콰앙-!
구름을 찢어발기며 거대한 십자가가 내려와 서울 중심에 내리꽂혔다.
성역 선포가 홀리 그라운드의 상위호환이라면, 홀리 그랜드 크로스는 그랜드 크로스의 상위호환 스킬이다.
이 또한 성역 선포와 마찬가지로 하프 엔젤의 모습일 때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인 만큼, 상당한 효과와 위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신성이 본래의 강함을 유감없이 발휘하자, 서울에 내려앉은 허상괴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한편, 청과 황. 자와 무의 군단장을 처리하고 대지에 내려선 제로는 신성의 활약에 만족스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다만….
“이건 좀 거슬리네.”
제로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현재 제로의 몸뚱이에선 짙은 연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신성의 성역 선포가 제로를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공에서 서울을 훑어보고 있던 신성 또한 연기를 뿜어내는 제로를 확인하기 무섭게 놀라 달려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제로의 종족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외형만 보자면 언데드계다.
성역 선포에 사용된 힘은 일반적인 신성력이 아닌, 신력으로. 기본적으로 언데드에게 신성력 그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기에 신성은 성역에 들어선 제로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닐지. 혹은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지에 대한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이 정도로는 날 어떻게 할 수 없어.”
제로는 자신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신성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서울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지만 다른 곳이 걱정이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형님.”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림자가 꿀렁이더니 스타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신성은 제로의 말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나타난 스타툰의 말에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을 제외한 각 도시에도 플레이어들은 있습니다. 또한 허상괴들은 이상하게도 인구가 밀집된 장소에 더욱 많이 등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서울보다 인구수가 적은 다른 마을이나 소도시 정도는, 그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감당할 수 있겠죠. 물론….”
“물론?”
“혹시 몰라 광전사 덴푸라 님. 신궁 일살님. 야수왕 백호님. 그 외의 상위권의 플레이어들이 서울을 떠나 각 광역시를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흠.
스타툰의 말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들이 순순히 스타툰의 말을 들을 존재들은 아니었으니, 스타툰은 자신의 이름을 팔아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뭐, 그래도 아예 손 놓고 있는 것보단 괜찮은 판단이었다.
“좋아. 그럼 나머지 정리하고 성에서 보자. 나머지 십강의 마스터들에겐 내가 따로 연락할게.”
“알겠습니다.”
제로의 말에 신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의 날개를 펄럭여 움직였다.
* * *
“모두 모였지?”
끄덕.
하늘을 떠다니는 부유성에 자리 잡은 망자의 거성.
개중에서도 깊숙이에 자리 잡은 대회의실에 제로와 신성을 포함한, 십강의 마스터 전원이 모여 있었다.
“좋아, 그럼 각자 보고를 시작해 봐.”
“우리가 니 따까리야? 보고는 무슨 보…!”
오싹-!
마치 아랫사람 대하는 제로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룬이 뭐라 중얼거렸다.
허나 곧 제로의 공허한 눈구멍에 데굴거리는 사신의 흉안이 자신을 향하자, 돌연 피어오르는 공포에 부르르 몸을 떨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의 제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허상괴들의 예기치 못한 대대적인 침공에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허상괴들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한들, 이번에 발생한 침공에서 튀어나온 허상괴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몇 개의 나라가 전복되며.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이 사라졌다.
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인류의 구원과 평화를 가장 중요히 여기는 제로에게 있어 씻을 수 없는 불쾌감으로 다가왔다.
“우선 저부터 말하겠습니다.”
제로에게서 시작된 무거운 침묵에,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자 신성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갑작스런 허상괴의 침공에 한국의 플레이어들 중 1% 정도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민들이 재빠르게 쉘터로 피난할 수 있어 그 피해가 경미한 수준입니다. 다만….”
“다만?”
“허상괴들에 의해 발생한 피해를 온전히 복구하기 위해선 못 해도 반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리라 생각됩니다.”
“으음.”
반년.
얼핏 보면 상당히 긴 시간이었지만, 허상괴의 대대적인 침공에 의한 피해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상당히 경미한 피해임이 아닐 수 있었다.
특히나 인명 피해가 경미하다는 것에 제로는 ‘쉘터를 만들길 잘했어’라는 생각을 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진 어때?”
“러시아도 비슷하다. 네 말을 듣고 쉘터를 만들어 놨기에 이 정도 피해로 그칠 수 있던 것이겠지.”
“유럽도 비슷해.”
“일본도 비슷하다.”
이어진 제로의 물음에 썬더와 첸첸. 세이메이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들 또한 제로의 의견대로 미리 쉘터를 만들어 놓았기에, 이번 침공에서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그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별 다를 바 없었다.
헬 나이트 군림이 마스터로 있는 길드, 천상. 그런 천상이 있는 아프리카 대륙은 다소 피해가 있었지만, 그 수치는 그리 크지 않았다.
호주는 애초에 블러드 문과 강철. 십강 중 두 개가 있는 만큼, 그 어디보다 피해가 가장 경미하다 할 수 있었다.
허나….
“미국도 별 큰 피해는 없어.”
“중국도다.”
제로의 시선이 닿자, 룬과 무왕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다.
미국과 중국은 이번 침공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였다.
개중 중국은 한국인인 제로의 ‘쉘터를 만들어라’라는 제안을 대놓고 무시했다. 그 결과 전체 인구의 10%가 몰살당하는 피해를 입어 버렸다.
네 개의 대도시가 몰락하고, 수십 개의 소도시가 사라졌다.
특히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협회가 있음에도 하나로 뭉치지 못한 플레이어들의 피해 또한 극심했다.
“흐음.”
제로가 낮은 울림을 토해내며 그 둘을 바라보자, 룬과 무왕이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대처가 미숙해 피해를 키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알량한 자존심이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을 방해하고, 막아섰다.
제로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침묵했다.
다만, 언제까지고 그들이 막 나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자신과 반발하며, 피해만 가증시킨다면….
‘저놈들을 치우고 망자로 대체해야겠지.’
룬이 있는 길드, 헌터.
무왕이 있는 길드, 무황성.
그 둘을 치워 버리고 망자로 대체할 것이다.
굳이 길드 자체를 지워버릴 필요는 없다.
길드 자체를 지워버리면 그만큼 전투력이 감소하기에, 대가리만 처리하고 그 시체로 최상위 망자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좋아. 그럼 다음 주제로 넘어가지.”
그 말을 시작으로 제로를 포함한 십강의 마스터들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주제는 지구에 남은 허상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현재 제작계 직업군들이 만들고 있는 아이템들의 완성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등등에 대한 주제였다.
1시간 가까이 이어진 대화가 끝을 맺고, 십강의 마스터들이 하나, 둘씩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을 때….
“잠시 시간 되십니까? 제로.”
블러드 문의 길드 마스터, 블러드.
그가 씨익 웃어 보이며 제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