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으음…, 과연 그분께서 주의하라 하신 이유가 있었군.”
황의 군단장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청의 군단장은 헬 파이어에 휩쓸려 소멸했다.
무의 군당장은 육체가 산산이 터져나가며 소멸했다.
자의 군단장 또한, 같은 저주를 다루는 이상한 해골에 쫓겨 언제 소멸할지 모를 위기에 처했다.
수많은 병졸들을 거느리며, 그분의 계획 최전방에서 움직이는 군단장이라 불리는 자신들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대로 자신마저 허무하게 소멸해 버린다면….
‘그분의 이름에 누를 끼치게 된다.’
황의 군단장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로가 움직였다.
“너도 그만 사라져.”
스윽.
비어있는 왼손을 들어 올리는 제로의 육신에서 농밀한 죽음이 흘러넘쳤다.
그런 제로가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부유섬의 대지가 파사삭!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망자의 거성이 자리 잡은 부유성 또한 죽음이 깃들어 있지만, 제로가 흩뿌리는 죽음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황의 군단장은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제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지.”
제로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황의 군단장이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황의 군단장의 전신을 뒤덮은 황금빛 비늘이 챠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떨렸다.
“자의 군단장!”
“알고 있다!”
황의 군단장의 외침에 멀리서 자의 군단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압-!”
콰가강-!
자의 군단장이 기합성을 토해내는 순간, 그를 중심으로 저주의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이 일으킨 저주의 폭발에 휘말린 대기가 오염되었다.
저주로 오염된 공기는 한 줌만 들이마셔도 폐를 썩게 만들고, 장기를 오염시킬 것이다.
허나 자의 군단장을 상대하고 있는 존재는 육신이 해골로 이루어진 리치이자, 같은 저주를 다루는 저주왕 데이버그다.
데이버그는 자의 군단장이 터트린 저주를 음미하듯 들이마셨다.
인형이 되었음에도 그 육신에 남은 영혼의 잔류가 그러한 생전의 행동을 흉내 내고 있었다.
그런데 저주를 음미하던 데이버그의 몸이 돌연 움찔! 하고 떨렸다.
저주를 폭발시킨 자의 군단장이 돌연 황의 군단장을 향해 돌진한 것이다.
황의 군단장 또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자의 군단장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들의 모습에 제로는 무언가 깨달은 듯이 외쳤다.
“데이버그!”
끄덕.
제로의 외침에 데이버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였다.
그저 이름을 외칠 뿐이었으나, 그 속에 깃든 제로의 의지가 데이버그의 육신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황의 군단장과 자의 군단장을 향해 펼쳐진 제로의 손에선 죽음의 탁류가 흘러나왔고, 저주왕 데이버그에게선 마찬가지로 저주의 탁류가 흘러나왔다.
잿빛과 자색의 탁류.
그 둘이 군단장들을 덮치기 직전….
“비록 우리들의 자아는 붕괴하겠지만, 하나가 되는 거다.”
“그것으로 그분의 의지를 행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서로 마주한 황의 군단장과 자의 군단장의 육체가 이리저리 얽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과거, 수백의 상급 허상괴가 하나로 뭉쳐 최상급 허상괴가 되었을 때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칫.”
제로는 서로 얽히고설켜 하나가 되어가는 군단장의 모습에 혀를 찼다.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죽음의 탁류와, 저주의 탁류는 그 힘을 잃은지 오래였다.
수백의 상급 허상괴들이 하나가 되어, 최상급 허상괴가 되었다.
그렇다면 군단장급의 허상괴들이 하나가 된다면, 얼마나 강대한 ‘무언가’가 탄생하게 될까?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런 귀찮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중얼거리는 제로의 앞으로, 변화를 끝낸 군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의 하반신은 램프의 요정 지니를 연상시켰으며, 상반신은 인간과 늑대. 도마뱀을 뒤섞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상반신을 뒤덮은, 황색과 자색이 불규칙하게 뒤섞인 비늘이 챠르륵! 울릴 때마다 사방으로 진득한 저주가 퍼져나갔다.
-크르르….
“말조차 잊어버린 거냐?”
하나가 된 군단장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제로를 바라봤다.
그런 군단장의 시선에 제로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날 죽이고 싶냐. 이성 없는 괴물 따위로 전락하면서.”
-크앙!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군단장이 포효를 터트리며 움직였다.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인 군단장은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나타나며 양손을 휘둘렀다.
성인 남성 따위는 손쉽게 찌그러트릴 거대한 손에는 저주로 물든 보랏빛 뇌전이 깃들어 있었다.
[…!]
재빠른 군단장의 움직임에 저주왕 데이버그가 한발 늦게 반응했다.
그는 제로의 코앞까지 다가간 군단장의 거대한 손에 무언가 행동을 취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보랏빛 뇌전이 깃든 군단장의 거대한 손이 제로를 덮쳤으며, 곧이어….
콰직!
콰지직!
기묘한 소리와 함께 제로의 육신이 산산이 찌그러졌다.
전신을 이루는 흑골은 산산조각 나 가루가 되어 군단장의 거대한 손 사이사이로 흘러내렸다.
[…!]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제로를 보며 경악한 저주왕 데이버그가 스태프를 휘둘렀다.
그에 저주로 이루어진 수많은 화살과 창, 탄환 따위가 만들어져 군단장을 향해 쏟아졌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인형임에도 제로를 자신의 ‘주인’이라 여기며, 그런 주인의 위험을 배제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크륵!
-크아아아아!
저주왕 데이버그가 행한 폭격은 군단장이 입을 쩍! 벌리며 터트린 거친 포효에 휩쓸려 방향감을 상실하고, 서로 충돌하며 허공에서 폭발했다.
그 모습에 저주왕 데이버그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한편 군단장은 그런 데이버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그런 군단장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것은 마치 ‘다음은 네놈 차례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데이버그는 그러한 군단장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다시 한번 스태프를 뒤흔들었다.
그에 또 한 번 데이버그의 등 뒤로 저주로 이루어진 화살과 창, 탄환 따위가 만들어지며 군단장을 향해 쏟아졌다.
-크아아아앙!
군단장은 또 다시 하울링을 토해내며 양손을 휘둘렀다.
그에 보랏빛 뇌전이 파지직! 거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곧이어 데이버그가 만들어 낸 폭격을 집어삼키는 것도 모자라, 데이버그 그 자체를 덮쳤다.
이대로 1초. 아니, 0.1초만 흘러도 데이버그는 보랏빛 뇌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허나, 그것을 용납할 제로가 아니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
파지직!
콰가가강!
허공에 제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데이버그의 육신 위로 반투명한 방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군단장이 쏘아댄 보랏빛 뇌전은 그러한 반투명한 방패, 퍼팩트 데스 실드와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발밑에 깔린 구름이 수 킬로미터 밖으로 밀려날 정도로 거대한 충격을 만들었던 폭발이 사그라들고.
그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한 모습의 제로가 걸어 나왔다.
저주왕 데이버그는 어느새 역소환되어 그 모습을 감추었으며. 그 대신 나타난 것은….
[크르르….]
한 마리의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의 덩치는 드높은 산과 같았으며,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는 수백 미터에 달한다.
두 눈동자는 명계의 냉기를 품어 푸르스름하게 빛났으며, 입에는 연신 죽음으로 이루어진 검은 안개가 흘러넘쳤다.
전신을 뒤덮은 잿빛의 비늘은 상당히 질기고 단단해 어지간한 공격 따위는 통하지도 않아 보였다.
“사룡 덴드로. 꽤나 쓸만해 보이지?”
사룡 덴드로.
제로의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심장의 본래 주인이자, 명계의 파수꾼이라 불리었던 존재.
그 강함은 비록 초월자에 미치지 못하지만, 충분히 반신의 영역에 이르렀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숨결은 모든 것을 죽음으로 인도하며, 그 시선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원초적인 공포심을 각인시킨다.
비록 중간계의 드래곤처럼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육체 능력은 에이션트급 드래곤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특히나 제로의 가슴에 박힌 심장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제로와 동격. 혹은 그 격이 더욱 드높은 초월자가 직접 공격하지 않는 이상 소멸하지 않는다.
아무리 파괴되어도 시간이 지나면 육체를 복원해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이 사룡 덴드로라는 괴물이었다.
다만, 제로 또한 사룡 덴드로를 직접 소환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스트 월드가 이렇게 빨리 섭종하지 않았다면, 한두 번 정도는 꺼내 봤겠지만….
“솔직히 지상에서 이놈을 꺼내기엔 여간 무리가 아니란 말이지.”
사룡 덴드로가 흩뿌리는 죽음과 공포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덴드로가 소환되는 그 순간, 지상은 일반 시민, 플레이어 가리지 않고 패닉에 빠지게 된다.
신성이나 신궁 일살. 혹은 다른 십강의 마스터들과 같은 최상위 플레이어라면 모르겠지만, 그 외에는 패닉에 의해 스스로 자멸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여긴 그런 플레이어나 평범한 시민들이 없거든.”
이 싸움은 상공 수 킬로미터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다.
주변 눈치 볼 것 없이, 마음껏 날뛰어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한편 군단장은 죽음을 흩뿌리며,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흉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룡 덴드로에 주춤거렸다.
황의 군단장과 자의 군단장.
그 둘이 하나가 됨으로써 자아는 붕괴되었지만, 그에 반등하듯 극한까지 올라간 본능이 사룡 덴드로의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제로가 그런 군단장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사룡 덴드로. 먹어 치워 버려.”
[크아아아아!]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룡 덴드로가 움직였다.
그것은 군단장을 향해 돌진하며 거대한 입을 쩍! 벌렸는데, 그러한 입 내부에는 날카롭고 단단해 보이는 이빨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나 그러한 이빨, 하나하나에는 농밀하면서도 순수한 죽음이 깃들어 있다.
만일 사룡 덴드로의 이빨에 조금이라도 스치는 순간, 생명을 품은 모든 것에 평등한 죽음이 내려앉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가 된 군단장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허나 사룡 덴드로의 움직임은 군단장의 도망을 허용하지 않았다.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움직이는 사룡 덴드로의 속도는 거대한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게 재빨랐다.
찰나라는 단어가 있다.
흔히 눈 한 번 깜빡일 때 쓰이는 단어이기도 했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시간은 75분의 1초. 즉, 0.013초이다.
사룡 덴드로의 움직임은 그러한 찰나보다 더욱 빨랐으며, 말 그대로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 하나가 된 군단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사룡 덴드로가 먹어 치워, 이미 그 입에 감돌고 있는 죽음에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무력이긴 했지만….
“확실히 이놈은 사용하기 까다롭겠어.”
사룡 덴드로가 있었던 자리.
그리고 움직이며 지나쳤던 공간까지.
그 모든 공간이 사룡 덴드로가 자연스레 내뿜은 죽음에 물들어 죽어버렸다.
그 강함은 쓸만하지만, 이렇게 주변의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흩뿌리는 성질은 평상시에 사용하기에는 상당한 제약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저놈들이 문제지.”
사룡 덴드로를 역소환 하며, 제로는 구멍을 바라봤다.
이미 수백억 이상의 허상괴들이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간 지 오래였다.
“지금부터가 진짜 전쟁의 시작이야.”
제로는 슬쩍 지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