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쿠구구구-!
지구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양 떨렸다.
이러한 떨림이 생기는 이유는 단 하나.
제로는 망자의 거성 내부, 옥좌의 홀에 앉아 떨림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세 번째 웨이브가 시작된다.”
세 번째 웨이브.
그것은 허상괴의 본격적인 침공을 의미한다.
선봉으로 나섰던 녹의 선봉장 제르빌라. 그 뒤를 이어 지구를 침공했던 적의 군단장 베드리나.
그 둘이 실패했으니, 이번 세 번째 웨이브는 더욱 격렬하고, 더욱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든지 와라. 너희들을 맞이할 준비는 끝나가니깐.”
제로가 뼈의 옥좌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허상괴와의 전투에서 일반인들을 지키기 위한 쉘터는 완성되었다.
플레이어들을 협회라는 기둥 아래 뭉치게 만들었다.
허상괴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 한들, 하나가 된 플레이어들이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위험한 것은 최상급 이상의 허상괴들 뿐.
허나 그들 또한….
“최상위 플레이어들이 달라붙으면 제아무리 최상급 허상괴라 한들 버틸 수 없겠지.”
만일 최상위 플레이어조차 감당할 수 없는, 이를테면 적의 군단장 베드리나같이 군단장급의 허상괴나 왕이 직접 나타난다면….
“그때는 내가 처리하면 그만이야.”
제로 스스로가 움직여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제로 또한 지금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길러왔다.
그렇게 망자의 거성을 빠져나와, 구멍을 바라보는 제로의 눈에 들어선 것은….
“미친.”
수만? 수억? 수십억?
아니다.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허상괴들의 숫자는 만이니, 억이니 하는 단위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등급도 다양했다. 최하급과 하급. 중급과 상급. 마지막으로 최상급까지.
모든 종류의 허상괴들이 뒤섞여 쏟아져 나오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장엄할 정도였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겐 공포로밖에 다가오지 못했다.
적게 잡아도 수백억.
어쩌면 억 다음 단위인, 회귀 전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조 단위일지도 몰랐다.
이대로 두면 위험하다.
아무리 쉘터를 만들고, 아무리 플레이어들을 하나로 집결시켰다지만 저 숫자는 상정 외였다.
“젠장. 아주 그냥 칼을 갈고 나왔네.”
스킬 발동, 외차원의 무기고.
스킬 발동, 외차원의 창고.
스킬 발동, 망자의 대군단.
스킬 발동, 본 드래곤.
스킬 발동, 명왕의 번견.
스킬 발동, 스켈레톤 엠페러.
스킬 발….
네크로노미콘을 쥔 제로에게서 무수히 많은 스킬들이 발동했다.
등 뒤로 공간이 갈라지며 두 개의 거대한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에서는 수백, 수천, 수만 개의 신기가 잠들어 있는 외차원의 무기고가.
다른 쪽에서는 수천만의 망자들이 잠들어 있는 외차원의 창고가 나타난 것이다.
무기고에서는 수많은 신기들이 튀어나와 구멍에서 쏟아지는 허상괴들을 향해 쏘아졌으며.
창고에서는 망자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튀어나와 쏟아지는 허상괴들을 처리했다.
그 외에도 각종 공격 마법들이나 포격이 허상괴들을 덮쳤지만, 마치 대해에 돌을 던지는 것과도 같이 소용없었다.
한 마리의 허상괴를 처리하면 열 마리가, 열 마리의 허상괴를 처리하면 백 마리가 구멍에서 튀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제로가 초월적인 강함을 가지고, 헤아릴 수 없는 망자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가지고 있다 한들 허상괴들의 숫자는 개인이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버렸다.
제로를 도와 121명의 네크로맨서들 또한 허상괴들을 죽여나가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역부족인 것은 사실이었다.
“칫, 어쩔 수 없지.”
쏟아져 나오는 허상괴들을 바라보며 제로는 방법을 바꿨다.
최하급에서 중급. 무리를 한다면 상급의 허상괴까지는 플레이어들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최상급 이상의 허상괴들. 실질적으로 플레이어들에게 가장 큰 위험이 될 그것들의 숫자를 최대한 줄인다.
그렇게 생각한 제로는 마구잡이로 허상괴들을 죽이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허상괴들 틈에 섞여 지구로 내려가는 최상급 이상의 허상괴들을 핀포인트로 저격하는 것을 택했다.
거대한 흑골의 창이 대기를 가르며 쏘아질 때마다, 한 마리씩 최상급 허상괴들이 핵을 잃고 소멸했다.
한 번에 죽일 수 없다면 수번, 수십 번의 공격을 가하며 제로는 착실히 최상급 허상괴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간 최상급 허상괴들을 저격하며 숫자를 줄여나갔을까.
허상괴들을 끝없이 토해내던 구멍이 점차 잠잠해지며, 쏟아져 나오는 허상괴들의 숫자 또한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치겠네.”
이미 지구에는 너무 많은 숫자의 허상괴들이 내려섰다.
이번 침공을 방어한다 해도, 최소 수십 개의 나라들이 멸망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다.
아니, 그나마 제로가 움직였기에. 그리고 지상에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노력했기에 그정도 선에서 피해가 그쳤을 것이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침공이 벌어졌다면, 수십 개의 나라 수준이 아닌 지구 전역이 초토화되었을 터이니.
“문제는 군단장급의 허상괴들이란 말이지. 특히 너 같은.”
제로가 사신의 흉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사신의 흉안에는 총 네 명의 군단장들이 들어섰다.
모두 제로가 익히 알고 있는 군단장들이다.
모든 것을 얼리는 냉기를 품은 청의 군단장.
모든 것을 파괴하는 뇌전을 품은 황의 군단장.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저주를 품은 자의 군단장.
마지막으로 아무런 이능을 품지 못한, 하지만 그 육체 능력만큼은 그 어떤 허상괴들보다 강력한 무의 군단장까지.
이 정도로 대규모 침공이 감행되었다면, 지구에 나타난 군단장급 이상의 허상괴들의 숫자 또한 수십 마리를 상회할 것이다.
개중, 제로가 찾아내고 막아선 것이 고작 네 마리밖에 되지 못했다.
아니, 저들이 자발적으로 제로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머지 군단장급 이상의 허상괴들이 지구에 숨어 들어갈 수 있도록.
“내가 좀 바쁘거든? 그러니…, 그냥 죽어.”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후욱-!
콰앙!
제로의 등 뒤에서 생겨난 거대한 흑골의 창이 쏘아졌다.
총 네 개의 흑골의 창이 군단장들과 충돌했으나….
그 무엇도 놈들에게 이렇다 할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네놈은 여기서 죽는다.”
“모든 것은.”
“그분의.”
“의지에 따라.”
츠즈즛-!
콰가강!
제로의 앞을 가로막은 네 명의 군단장들이 움직였다.
청의 군단장이 양손을 펼치자, 푸르스름한 냉기가 뭉치며 수백 개의 칼날이 쏘아졌다.
제로의 머리 위로는 황의 군단장이 흩뿌리는 뇌전이 내리꽂히고.
발밑으로는 자의 군단장이 퍼트린 저주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무의 군단장은 안 그래도 거대한 덩치를 더욱 키우며, 망설임 없이 제로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하나, 하나가 최상위 플레이어라 한들 쉽사리 막아낼 수 없는 공격들 뿐이었다.
하지만….
“지랄하고 있네.”
스킬 발동, 퍼펙트 데스 실드.
스킬 발동, 콜 저주왕 데이버그.
콰가강-!
청의 군단장과 황의 군단장. 그리고 무의 군단장의 공격은 제로를 감싼 반투명한 방패가 막아냈다.
자의 군단장이 흩뿌리는 저주는 갈라진 공간 속에서 튀어나온 저주왕 데이버그가 역으로 먹어 치웠다.
“데이버그. 자의 군단장을 맡아.”
끄덕.
제로의 명령에 저주왕 데이버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였다.
그 또한 로스트 월드 내에선 시스템에 의해 움직였던 존재. 현실에서 소환된 지금은 망자의 거성의 성벽 위에서 허상괴들을 요격하고 있는 121명의 네크로맨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자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인형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해.”
아무리 인형으로 전락했다 한들, 데이버그는 데이버그다.
그가 저주왕이라 불리었던 강함을 잃은 것은 아니었기에, 다소 무리는 있을지언정 군단장 하나 정도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그럼 나는….”
저주왕 데이버그와 얽힌 자의 군단장이 멀리 떨어졌다.
제로는 남아있는 세 군단장. 청과 황. 그리고 무의 군단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2라운드 시작이다.”
* * *
콰가강-!
사방에서 냉기가 폭발하고, 머리 위에서 벼락이 내리꽂힌다.
제로가 움직일 때마다, 딛고 있던 대지에 거대한 주먹이 내리꽂히며 폭발했다.
아무리 제로라 한들 세 명의 군단장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아직 힘들었다.
과거, 회귀 전에도 군단장급의 허상괴들은 최상위 플레이어들이 파티를 맺어 사냥했을 만큼, 그들의 강함은 절대적이었다.
허나 절대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제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선은…, 가장 귀찮은 너부터다.”
스킬 발동, 헬 파이어.
스킬 발동, 헬 파이어.
스킬 발동, 헬 파이어.
스킬 발동, 헬 파이어.
청의 군단장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지옥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나, 하나가 제로의 농밀한 죽음을 머금고 피어오른 불꽃은 주변의 모든 것을 증발시키며 청의 군단장을 향해 쏘아졌다.
“칫.”
청의 군단장은 자신을 압박하며 다가오는 지옥의 불꽃에 혀를 차며 양손을 펼쳤다.
치이이이익-!
헬 파이어의 열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 낸 얼음의 방패가 막대한 수증기를 만들어내며 녹아내렸다.
제아무리 청의 군단장이라 한들, 헬 파이어의 열기는 쉽사리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 약간.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른다면, 청의 군단장은 헬 파이어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증발할 것이다.
“우리를 무시하지 마라.”
콰가강-!
하지만 예고도 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제로의 두개골을 강타했다.
그 강렬한 위력에 제로가 ‘큭!’ 하며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거릴 때….
“놈-! 죽어라!”
퍼엉-!
강렬한 벼락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제로의 척추에 무의 군단장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무의 군단장의 주먹에 얻어맞은 제로의 몸뚱이가 뒤로 튕겨 나가, 망자의 거성을 둘러싼 성벽에 처박혔다.
황의 군단장과 무의 군단장은 무너지는 성벽에 깔린 제로를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허나.
“이게 무…! 크아아아아악-!”
돌연 무의 군단장이 오른손을 감싸 쥐며 비명을 내질렀다.
제로의 육체를 강타했던 무의 군단장의 오른손은 점차 검게 물들며 썩어가고 있었다.
“괴롭지?”
흠칫-!
언제 움직인 것일까?
언제 나타난 것일까?
분명 무너진 성벽에 깔려있어야 할 제로가, 괴로워하는 무의 군단장 뒤에 나타나며 입을 열었다.
“죽음은 모든 것에 평등하지. 그것은 네놈이라 한들 다를 바 없어.”
“크으으…, 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의 군단장이 신음을 흘리며 버럭 외쳤다.
“말 그대로야. 죽음은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난 죽음 그 자체지. 뭐, 단순히 말해서 너랑 나랑은 상성이 최악이란 뜻이야.”
최악의 상성.
그것만큼 정확하게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은 없었다.
제로의 육신은, 흑골이라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속은 죽음 덩어리. 죽음 그 자체였다.
그런 제로를 건드린다는 것은 말 그대로 죽음을 건드린다는 뜻이 된다.
제로를 칼로 건드렸든, 창으로 건드렸든. 혹은 주먹으로 건드렸든.
건드리기만 했다면 제로의 의지를 따라 죽음이 흘러 들어가며 그 생명을 갉아먹게 된다.
즉, 아무런 능력을 가지지 못한. 그저 단순히 육체 능력이 뛰어날 뿐인 무의 군단장은 공격하면 할수록 스스로 죽음을 향해 달려 나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크으으…! 놈!”
콰가강-!
제로의 말을 들은 무의 군단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발악인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의도가 있는 것일까.
뭐, 무엇이 되었든….
“네가 죽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아.”
스킬 발동, 폭발하는 죽음.
콰아아아앙-!
제로를 향해 달려들며, 그나마 멀쩡한 왼 주먹을 내뻗던 무의 군단장의 육체가 산산이 터져나갔다.
제로가 무의 군단장의 육신에 깃들어, 그 생명을 갉아먹고 있던 죽음을 폭발시켜 버렸다.
한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황의 군단장은 그 참상에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