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저벅. 저벅. 저벅.
앞으로 걸어가던 제로가 멈췄다.
첸첸과의 거리는 정확히 30m.
평범한 인간에게는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제로나 첸첸과 같은 플레이어들은 언제 어느 라도 공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렇게 멈춰선 제로가 첸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굳이 피를 봐야겠다 이거냐?”
“제 할 말만 하는 성격은 여전하구나? 정 그 플레이어를 네가 데려가고 싶으면 날 힘으로 찍어 누르고 데려가. 물론…, 가능하다면 말이야.”
첸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로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척! 척! 척!
제로의 등 뒤로 외차원의 창고가 나타나며 망자의 대군단이 걸어 나왔다.
수천의 망자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순순히 포기해. 날 이길 수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확실히 넌 강해.”
제로의 말에 첸첸이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말이야. 군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너뿐만이 아니야.”
스킬 발동, 지식의 수호군단.
파앗-!
첸첸이 스킬을 발동하자, 그녀의 주변으로 빛의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의 덩어리의 숫자는 적확히 1231개.
그렇게 만들어진 빛의 덩어리가 사라지는 순간, 그 자리를 호문쿨루스들이 매꿨다.
첸첸이 소환한 호문쿨루스의 모습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것은 거대한 방패를 쥔 기사였으며.
어떤 것은 두 자루의 단검을 쥐고 있는 어쌔신이었다.
어떤 것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스테프를 쥐고 있는 마법사였으며.
어떤 것은 활과 화살통을 맨 궁수요.
어떤 것은 두 자루의 검을 쥔 검사였다.
다종다양한 호문쿨루스들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첸첸을 호위하듯 둘러싸며 제로를 바라봤다.
“저게 그거구나.”
제로는 모습을 드러낸 호문쿨루스들을 바라보며 묘한 웃음을 내비쳤다.
확실히 각각의 호문쿨루스들에게선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제로가 소환하는 망자들 중, 상급의 망자와 필적하는 강함일 것이다.
하지만….
“고작 천 마리 남짓한 호문쿨루스로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조폭네크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물량으로 압도하여 적을 상대하는 네크로맨서를 뜻하는 단어였는데, 그러한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 제로였다.
제로가 보유한 외차원의 창고에는 아직도 수백만의 망자들이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그 외의 아공간에도 수천만 구의 시체가 잠들어 있다.
그 모든 것을 소환하면 ‘물량’으로 제로를 이길 수 있는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첸첸은 그러한 제로의 말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모조리 쓸어버려!”
첸첸의 명령이 떨어지자 호문쿨루스들이 움직였다.
전사, 기사, 검사, 어쌔신 등의 근접계 호문쿨루스들은 각자의 무기를 뽑아 쥐며 돌진했다.
동시에 망자들의 머리 위로 궁수, 마법사 등의 원거리계 호문쿨루스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지금 제로가 소환한 수천 구의 망자들의 등급은 최하급과 하급.
호문쿨루스들의 공격을 버틸 수 있는 강함을 지니지 못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망자들은 호문쿨루스들의 공격에 갈려 나가고, 박살이 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고작 이정도야?”
첸첸은 자신이 만들어 낸 호문쿨루스들이, 그 악명 높은 제로의 망자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내비쳤다.
한편 제로는….
‘망가지고 있네.’
호문쿨루스와 망자들이 충돌하여 곳곳에서 격한 전투가 벌어지자, 점차 망가지고, 부서지는 옥좌의 홀에 인상을 찌푸렸다.
또한 옥좌의 홀은 제로가 망자들을 소환하기에 너무 좁았다.
그렇다면….
“무대를 바꾸자.”
스킬 발동, 데스 게이트.
제로가 손을 내리그으며 스킬을 발동했다.
그에 옥좌의 홀 바닥이 쩍! 하고 갈라지며, 망자와 호문쿨루스. 제로와 첸첸이 훅! 하고 사라지며 추락했다.
그렇게 데스 게이트에 몸이 빨려 들어가는 순간….
“여긴?”
“망자의 거성 밖이야.”
망자의 거성 밖.
부유섬의 영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라면 나도 마음껏 싸울 수 있거든.”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가 다시 한번 외차원의 창고를 개방했다.
그와 동시에….
“나와.”
척! 척! 척!
다시 한번 망자로 이루어진 군단이 외차원의 창고에서 걸어 나왔다.
허나 이번에 나타난 망자들의 강함은, 옥좌의 홀에서 꺼냈던 망자들보다 아득히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챘다는 듯, 호문쿨루스들이 주춤거렸으며. 첸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넌 진짜 짜증 나는 놈이야.”
로스트 월드라는 게임 속이라면 몰라도, 현실에서 저 정도로 시체를 만지다니.
제로의 정신은 첸첸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특히나 네크로맨서로 전직했던 플레이어들 중 몇몇이 현실에서 시체를 만지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제로의 모습은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로 오해하기 딱 좋았다.
“어차피 ‘힘’의 종류에 불과해. 그것보다…, 네 호문쿨루스들이나 걱정하지?”
불쾌감을 여실히 드러내는 첸첸에 제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에 첸첸의 시선이 호문쿨루스들을 향하는 순간….
“칫.”
그녀가 낮게 혀를 찼다.
새로이 나타난 망자들이 자신이 만들어 낸 호문쿨루스와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저 정도로 강력한 언데드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자신의 패배가 확정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에잇-!”
첸첸 또한 나름 여자라는 것일까.
망자의 거성에 있었을 때와는 달리, 다소 귀여운 기합성과 함께 그녀는 포션 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간 포션 병이 망자와 부딪혀 깨지는 순간….
쾅! 쾅! 쾅!
콰아아앙!
사방팔방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작열하는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하나, 하나의 불기둥은 그리 오래 존재하지 못했으나, 사그라드는 불기둥에 휘말렸던 망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직 멀었어!”
포션 병 하나로 수백의 망자들을 쓸어버린 첸첸이 다시 한번 포션 병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망자와 부딪혀 깨졌으며, 어떤 것은 스스로가 소환한 호문쿨루스와 부딪혀 깨졌다.
제로가 소환한 망자와 부딪힌 포션 병은 깨질때마다 작열하는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냉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그에 반해 자신이 만들어 낸 호문쿨루스와 부딪혀 깨진 포션 병은, 그러한 호문쿨루스들에게 강력한 버프를 부여했다.
자신의 망자들은 사라지고, 적의 호문쿨루스는 더욱 강해진다.
그 모습에 제로는 인상을 찌푸리며 쯧! 하고 혀를 찼다.
“귀찮게 하네.”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제로의 등 뒤에 존재하는 외차원의 창고에서 쿵! 쿵! 하는 떨림이 울려 퍼졌다.
“튀어나와.”
크아아앙!
컹컹!
크라라라!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수의 망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제로가 이동용으로 애용하던 본 드래곤이었으며.
하나는 벤과 함께 굴복시켜 사역했던 데스 나이트 킹.
하나는 다종다양한, 수만의 스켈레톤들을 이끌며 나타난 스켈레톤 엠페러였다.
마지막 하나는 케르베로스의 시체로 만들어진, 명왕의 번견이었다.
“가라.”
크아아아-!
컹컹!
크르르-!
덜그럭! 덜그럭!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환된 망자들이 움직였다.
스켈레톤 엠페러가 거대한 덩치에 걸맞은, 거대한 검을 높이 치켜들자 수만 마리의 다종다양한 스켈레톤들이 강화된 호문쿨루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본 드래곤은 뼈의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라 데스 브레스를 쏘아댔고.
데스 나이트 킹은 한자루 묵검을 뽑아 쥐며 양떼 속의 늑대처럼 미친듯이 날뛰었다.
마지막으로 명왕의 번견은 세 개의 입에서 명계의 냉기를 토해내고,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는 등 하며 데스 나이트 킹과 함께 날뛰기 시작했다.
“이익-!”
첸은 갑자기 나타난 언데드가, 자신이 직접 강화한 호문쿨루스들을 압도하자, 조바심에 입술을 질끈! 물어뜯었다.
“고작 언데드 주제에!”
쾅! 쾅!
콰아아앙!
화르륵!
콰가가!
첸첸이 수십, 수백개의 포션 병을 다시 한번 던지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다시 작열하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기둥을 만들고.
어떤 것은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냉기의 폭풍을 불러 일으켰다.
어떤 것은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칼날의 폭풍을 만들고.
어떤 것은 원 형태의 뇌전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이룩했다.
허나, 그러한 첸첸의 공격에 당한 것은 스켈레톤 엠페러가 이끄는 스켈레톤 대군단 뿐이다.
데스 나이트 킹이나 본 드래곤. 명왕의 번견이나 스켈레톤 엠페러 본인의 경우, 그러한 첸첸이 던져대는 포션 병 따위에는 당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항복하지?”
“이익!”
제로의 말에 첸첸이 억울하다는 듯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만들어 낸 공격용 포션과 호문쿨루스로 처리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적이라도 버프용 포션으로 호문쿨루스들을 강화시키고, 공격용 포션들로 융단폭격을 가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처리해 온 첸첸이었다.
그러한 공격이….
드래곤마저 죽일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자신의 포션들이….
“어째서 통하지 않는 거야!”
결국, 참다 못한 첸첸이 버럭 외치며 주저앉았다.
이미 호문쿨루스들은 모조리 망가져 전투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인 것은….
“어째서 내 호문쿨루스들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은거 야?”
제로가 다스리는 언데드들은 호문쿨루스들의 육체를 망가트렸지만, 그 핵마저 부수지는 않았다.
그저 단순히 전투를 속행하지 못하게 할 뿐, 완전히 부수지는 않는 것이다.
그것에 의문을 품은 첸첸이 질문을 던지자, 제로가 ‘당연한걸 왜 묻냐?’라는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네 호문쿨루스들은 허상괴와의 전쟁에서 큰 힘이 되기 때문이지. 솔직히 말해서 난 평화롭게 해결하려 했어. 네가 먼저 싸움을 걸었을 뿐이지.”
“으윽.”
제로의 말에 첸첸은 별다른 반박을 내뱉지 못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제로는 끝까지 자신을 설득하려 했으나, 자신이 고집을 부려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알겠어.”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첸첸은 소환했던 호문쿨루스들을 모조리 역소환 했다.
다소 망가지기는 했지만, 자신의 아공간 속에 일정 시간 지나면 모조리 복구될 것이다.
“네가 어떤 플레이어를 데려가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해.”
“딴말하기 없기다?”
“나 첸첸이야! 첸첸! 십강 중 하나인 마학자 길드의 길드 마스터임과 동시에 로열 알케미스트라 불리는 첸첸이라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아!”
“그래, 그래.”
역정을 내는 첸첸에 제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의 격렬했던 싸움이 사그라들고.
제로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본 드래곤의 머리 위에 올라타는 순간, 첸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 길드에 소속되어 있던 플레이어는 왜 데려가려는 거야? 솔직히 네 옆에서 키워보겠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그리고 한국에도 뛰어난 연금술사 플레이어는 많잖아?”
“아, 그거 말이야? 왜, 궁금해?”
끄덕끄덕.
제로의 물음에 첸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제로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발견한 플레이어가 ‘지구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포션을 만드는 것에 성공했거든.”
그 말과 함께 제로가 올라탄 본 드래곤이 뼈의 날개를 펄럭이며 부유섬에서 멀어졌다.
첸첸은 멍하니 점차 사라지는 제로를 바라보다 버럭 외쳤다.
“야이 개새끼야! 그걸 왜 지금 말해! 아니, 그 플레이어를 왜 니가 데려가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