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키라랏!
천장의 구석.
그곳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건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되, 인간이 아니었다.
전신은 개미 특유의 검게 번들거리는 외피로 뒤덮여 있다.
머리에는 두 개의 더듬이가 꿈틀거렸으며, 강인한 턱은 무엇이든 분쇄해 먹어 치운다.
네 개의 팔은 날카로운 칼과 같았으며, 여섯 개의 다리는 개미의 배 부분을 닮았다.
엉덩이에 돋아나 있는 꼬리는 날카로운 형태를 띠고, 그 끝에 번들거리는 녹색의 액체, 독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저것은 분명 허상괴였지만, 제로조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허상괴였다.
마치….
“그놈을 떠올리게 만드네.”
수백 마리의 상급 허상괴가 하나로 합쳐져 탄생했던 최상급 허상괴.
저것은 마치 그것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키라라-!
한편 갑작스레 나타난 허상괴는 다시 한번 괴성을 내지르며 움직였다.
하반신에 달려 있는 여섯 개의 다리로 벽을 타고 움직이며, 상반신에 붙어 있는 네 개의 팔.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그것을 휘두르며 제로가 소환한 망자들을 쓸어버렸다.
때론 튼튼하면서도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턱을 쩍 벌리며 망자들을 씹어 삼키기도 했다.
허상괴의 강함은 평범한 망자들로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그에….
“짜증 나게 하네.”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앞으로 쫙 펼쳐진 제로의 손에서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왔다.
그러한 죽음의 탁류는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박살 내버리며 허상괴를 덮쳤다.
죽음의 탁류에 휘말린 허상괴는 전신을 뒤덮은 강렬한 타격에 연신 뒤로 밀려났다.
키라라….
겨우겨우 죽음의 탁류에서 빠져나온 허상괴가 낮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런 허상괴의 육체는 정상이 아니었다.
육체를 뒤덮은 외피는 이곳저곳 박살 나고, 갈라져 푸른 속살이 드러났으며. 칼날과도 같은 네 개의 팔 중 세 개를 잃어버렸다.
빠른 기동성을 보여주던 여섯 개의 다리 또한 하반신과 함께 통째로 날아갔다.
그럼에도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허상괴 특유의 ‘핵이 부서지면 죽지 않는다’라는 특성과, 곤충 특유의 질긴 생명력이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이다.
“이만 끝내자.”
제로는 움직이지도, 공격하지도 못하는 허상괴를 바라보며 말했다.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쉐에에에엑!
퍼억!
제로의 등 뒤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흑골의 창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쏘아졌다.
그러한 흑골의 창은 바닥을 기고 있는 허상괴의 머리를 터트리며 바닥에 틀어박혔다.
흑골의 창에 머리를… 아니, 핵을 잃어버린 허상괴의 몸뚱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난생처음 보는 허상괴를 처리한 제로는 여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로가 혐오스런 외형을 가지고 있는 허상괴를 상대할 동안, 여왕은 그 짧은 시간에도 허상괴들을 산란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오직 여왕 홀로 남아 있던 공간에는 어느새 수천 마리의 허상괴들이 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네가 남아 있었지.”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제로의 행동에도 여왕은 여전히 허상괴가 잠들어 있는 알을 산란했고, 이미 만들어진 허상괴는 제로를 흉흉한 안광을 토해내며 바라봤다.
“너도 이만 죽…!”
콰가각-!
여왕을 죽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던 제로의 신형이 돌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제로가 서 있었던 자리에 수십 개의 날카로운 참격이 내리꽂혔다.
“한 마리가 아니었던 거냐.”
3m 정도 떨어진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제로가 후… 하며 한숨을 토해냈다.
방금 전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헤집은 참격은 불과 몇십 초 전, 제로가 죽였던 허상괴와 똑같은 모습을 한 허상괴들의 공격이었다.
사방에서 제로를 포위하고 있는 허상괴들 사이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놈들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수백 마리를 넘어섰다.
하급 정도의 강함을 가진 수천 마리의 허상괴.
그리고 중급에서 상급 사이의 강함을 가진 혐오스런 모습을 한 허상괴가 수백 마리.
그 숫자만 본다면, 어지간한 길드 정도는 흔적도 없이 쓸려버릴 것이다.
키아아아아악-!
한편, 제로가 불쾌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고 있을 때, 여왕이 입을 쩍! 벌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에 여왕의 괴성에 맞물려 허상괴들이 움직였다.
개미의 형태를 하고 있는 허상괴들은 그 거체를 이용해 제로를 깔아뭉개려 했으며, 혐오스런 외형의 허상괴들은 상반신에 달린 칼날과도 같은 네 개의 팔을 휘둘러 날카로운 참격을 쏟아부었다.
스킬 발동, 데스 본 실드.
콰가가강-!
제로는 쏟아지는 참격에 거대한 흑골의 방패를 만들었다.
허상괴들이 쏟아내는 참격은 그러한 흑골의 방패에 막혀 허무하게 사라졌으며.
거체를 이용해 돌진하던 허상괴들 또한 방패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너희들은 숫자가 많은 게 거슬릴 뿐이야.”
그러한 말을 하며 제로가 손을 내리그었다.
그와 동시에….
쩌억-!
쿠웅-!
허상괴들의 머리 위로 공간이 갈라지며 거대한 주먹이 내리꽂혔다.
제로는 한번의 공격으로 수백 마리의 허상괴가 압사당한 모습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명왕의 일격.”
명왕의 일격.
방금 전, 공간이 갈라지며 나왔던 거대한 주먹이 진짜 명왕의 손은 아니었다.
허나 그 위력은 마치 명왕이 공격을 한 것처럼 압도적인 힘을 품고 있었기에, 그러한 이름이 붇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가강-!
명왕의 일격의 뒤를 이어 죽음의 탁류가 허상괴들을 덮쳤다.
허상괴들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죽음의 탁류에 휩쓸리며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남은 허상괴는 여왕과, 겨우 살아남은. 허나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타격을 입은 허상괴 몇 마리뿐이었다.
“날 그렇게 죽이고 싶으면 네가 직접 움직이…!”
츠즛-!
콰가각!
불쾌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왕에 제로가 입을 열었다.
허나 제로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더미 블링크를 통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제로가 서 있던 자리에 남겨진 더미가 사방에서 쏟아진 참격에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도대체 저건 얼마나 만들어놓은 거야?”
제로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천장에는 예의 칼날과도 같은 네 개의 팔을 단 허상괴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수백 마리를 처리했음에도, 그 숫자는 여전히 많았다.
시야 가득 들어찬 그것들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200마리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저것들은 또 뭐하냐?”
제로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허상괴들은 분명 제로를 향해 적의를 내뿜고 있지만,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심도 엿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있는 허상괴들에겐 이미 제로를 향한 공포심이 각인되어 있었다.
지금 드러내고 있는 적의 또한, 여왕이 내지른 괴성. 그 속에 깃든 명령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허상괴들은 각인된 공포심과, 여왕의 명령이 충돌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기세 좋게 기습해 놓고, 이제 와서 뭐 하자는 거냐?”
스킬 발동, 명왕의 일격.
헛웃음을 터트린 제로가 허상괴들을 바라보며 손을 내리그었다.
그에 아까와 마찬가지로 공간이 갈라지며 명왕의 주먹이 허상괴들의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아까와 달리 천장을 향한 그 일격은 마치 어퍼컷과도 같았다.
그렇게 마무리를 한 제로는 이번에야말로 여왕을 처리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돌아간 제로의 사신의 흉안에 들어온 모습은….
“진짜 가지가지 한다.”
제로는 두개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여왕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러한 구멍 옆에는 여왕의 배와 이어져 있던 산란관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이름뿐인 여왕이라지만, 그래도 여왕이라 불리는 존재가 도망을 치냐?”
여왕의 등급은 상급.
하지만 그 강함은 하급에서 잘 쳐줘야 중급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왕은 제로의 압도적인 강함에 겁을 집어먹고, 자신의 의무마저 내팽개치며 도망을 쳤다.
지금까지 여왕은 단순히 허상괴를 만들어 내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제로는 갑작스런 여왕의 도망에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봤자….
“언제까지고 도망만 다닐 순 없어.”
스킬 발동, 명왕의 번견.
크르르!
컹컹!
크아앙!
제로의 등 뒤로 공간이 갈라지며,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케르베로스. 명왕의 번견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왕의 번견은 외차원에서 베드리나의 불꽃에 당한 상처를 모조리 회복했다는 듯 쌩쌩한 모습이었다.
“그래그래.”
제로는 자신의 뼈를 핥는 번견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도망간 여왕을 먹어 치워버려.”
크르!
컹컹!
크아아앙!
제로의 명령에 명왕의 번견이 울부짖으며 움직였다.
그것은 망설임 없이 여왕이 만들어 낸 구멍을 통해 사라졌다.
그렇게 명왕의 번견이 구멍으로 들어가길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끽해봐야 1분? 아니, 30초도 지나지 않아….
끼아아아악!
콰가강!
땅 밑에서 여왕이 비명을 내지르며 튀어나왔다.
그런 여왕의 밑에는 명계의 냉기를 토해내고 있는 명왕의 번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끼아아악!
끼에에엑!
끼라라라라!
번견이 물어뜯고, 할퀴고. 명계의 냉기를 토해내는 등의 공격을 가하자, 여왕이 다시 한번 비명을 내지르며 날뛰었다.
작은 언덕과도 같은 크기의 여왕이 날뛰자 미로가 무너질 듯, 우르르 떨렸다.
이대로 여왕을 내버려 두면, 미로가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한들 높은 확률로 무너질 것이다.
그렇니….
“난 생매장 당하긴 싫거든.”
제로는 여왕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공격을 가하는 명왕의 번견을 역소환하며 입을 열었다.
명왕의 번견이 사라지고 나서야 여왕은 날뛰는 것을 멈추며 제로를 바라봤다.
그런 여왕의 두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심이 아른거렸다.
“그러니 이만 죽어. 너무 질질 끌었다.”
스킬 발동, 데스 이레이저.
여왕을 가리키는, 뼈로 된 손가락 끝에서 회색의 빛줄기가 튀어나왔다.
끼아아-!
회색의 빛에 휩싸인 여왕의 몸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제로의 손가락 끝에서 튀어나온 빛줄기는 말 그대로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대가 누구든,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죽음의 빛은 자신에게 닿은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다.
그렇게….
중급 이하의 허상괴들을 만들어 내던 여왕은 그 덩치에 비해, 참으로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만 돌아갈까.”
제로는 사라진 여왕. 그리고 데스 이레이저에 의해 일직선으로 만들어진 구멍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북한의 모든 허상괴들을 처리한 것은 아니다.
아직 북한에는 수십만 마리의 허상괴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변수로 작용할 여왕을 처리한 이상, 그것들은 북한 곳곳에 자리를 잡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역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왕이 강림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왕이 강림한다면, 영역이고 뭐고 허상괴들은 닥치는 대로 인간들을 죽일 것이다.
그것이 왕의 의지였으니.
그렇기에 미궁에서 빠져나온 제로는….
“네놈 뜻대로는 안 될 거다.”
하늘 위에 자리 잡은 부유섬, 망자의 거성.
그 옆에 뚫려 있는 거대한 구멍. 허상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그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