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흠.”
본 드래곤의 머리 위에 올라타, 지상을 내려다보던 제로가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한때 북한이라는 나라가 있었던 지상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북한은 늘어만 가는 허상괴를 감당할 수 없어, 자국에 핵을 퍼붓는 악수를 두었다.
그로인해 대지는 망가졌으며, 핵폭발에 의해 농밀한 방사능이 대지, 대기 할 것 없이 퍼졌다.
저 상태라면 앞으로 수백 년 동안, 그 어떤 생물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로인해 북한은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북한에서 활동하는 존재들이 있었으니….
“역시 여왕이 만들어졌나 보네.”
제로는 망가진 대지 위를 돌아다니는 허상괴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왕.
그것은 상급 허상괴의 일종으로, 최하급과 하급의 허상괴들을 만들어낸다.
본연의 강함은 고작 하급과 중급 사이였지만, 일정 시간에 맞춰 적게는 수십 마리에서 많게는 수천 마리까지 허상괴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매우 위험했다.
회귀 전, 그러한 여왕 수십 마리가 한곳에 모여 한 번에 1만 마리를 상회하는 허상괴들을 꾸준히 토해냈을 때,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숫자의 폭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다만, 한국을 향해 달려드는 허상괴도 마찬가지였지만, 죽음의 땅 위를 활보하는 허상괴들 또한 본래의 모습에서 상당히 달라졌다.
그것은 핵폭발에 의해 퍼져나간 방사능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하게도 허상괴들은 외형만 바뀌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방사능을 흡수해 개별 개체의 무력마저 상승했다.
최하급이었던 허상괴는 하급 정도의 강함을.
하급이었던 허상괴는 준중급 정도의 강함을 가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여간 참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얼마나 움직였을까.
어느새 제로를 태운 본 드래곤은 과거 북한의 수도였던 평양에 도착했다.
도착한 평양은 과거의 영광을 찾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졌다.
허상괴도 허상괴였지만, 수십 개의 핵이 터져버린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의 땅이었다.
“이제 여기에 올 때도 봤는데…, 하필이면 곤충 타입의 여왕이라니.”
한국으로 달려드는 허상괴.
그리고 망가져 버린 북한의 대지 위를 활보하던 허상괴들까지.
그것들 모두가 곤충형 허상괴였다.
그것은 평양에 자리 잡은 여왕 또한 곤충 타입이라 볼 수 있었다.
곤충 타입의 허상괴는 상당히 까다로웠다.
기본적으로 지하에 만들어 놓은 땅굴은 어지간한 미로보다 복잡했으며,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사실이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나 곤충 특유의 외피는 상당히 단단하고 질겨,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생채기 하나 만들 수 없었다.
그렇게 제로가 본 드래곤을 역소환 하며, 땅 위에 내려서는 순간….
콰가각-!
제로를 중심으로 사방의 대지가 터져 나가며 수십 마리의 허상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허상괴는 기본적으로 곤충, 개중에서도 개미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다만, 푸른빛을 띠는 외피에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냉기가 깃들어 있었으며, 딱딱거리는 입은 강철조차 베어버릴 정도로 상당히 날카로웠다.
몸뚱이에 붙어 있는 여섯 개의 다리가 내는 폭발적인 속도는 평범한 인간의 전력 질주보다 빨랐다.
그 덩치마저 허상괴 한 마리, 한 마리는 평범한 개미와 비교해 수백 배 이상 거대했다.
그러한 허상괴 수십 마리가 갑작스레 튀어나와 자신을 포위하고 있으면 플레이어라 하더라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니들 뭐하냐?”
스킬 발동, 망자의 대군단.
척! 척! 척!
애초에 여왕의 싸움 방식은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괴들을 이용한 물량 싸움이다.
그리고 제로 또한 네크로맨서로서, 물량 싸움에는 자신 있었다.
특히나 허상괴들이 방사능에 의해 변이를 일으켰다 한들, 제로가 가지고 있는 망자들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강함에 불과했다.
그렇게 제로의 등 뒤로 공간이 갈라져 외차원의 창고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 심연 속에서 수만 구의 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앞에는 거대한 방패로 전신을 가리는 방패병이.
그 뒤로는 기다란 장창을 쥔 창병과, 검을 쥔 전사. 활과 화살을 맨 궁병과 해골마에 올라타 있는 기병 등등.
마치 중세시대에서나 나올법한 병과들로 이루어진 망자의 대군단이 처음으로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키릭?
키리릭!
끼에에엑!
제로를 포위하듯 둘러싼 허상괴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수만 구의 망자들이 역으로 자신들을 둘러싸자, 당혹감 어린 괴성을 내질렀다.
“쓸어버려.”
딱딱딱-!
끼헤헤헤!
끼아아아악!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망자들이 허상괴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신이 흑골로 이루어진, 수만의 망자들이 동시에 움직이자 대지 위에는 검은 해일이 만들어졌다.
수십 마리의 허상괴들은 수만의 망자들로 이루어진 해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급 정도는 되어 보였는데, 역시 숫자의 폭력 앞에는 장사 없지.”
제로는 순식간에 허상괴들을 쓸어버린 망자에 만족스런 미소를 내비쳤다.
“자, 그럼 본 게임을 시작해 볼까?”
속삭이듯 중얼거린 제로의 시선이 땅 밑을 향했다.
제로의 공허한 눈구멍에 자리 잡은 사신의 흉안은 땅속을 꿰뚫어 보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지하에 허상괴들이 만들어 놓은, 미로와도 같은 통로를 훑어봤을까.
데굴거리며 움직이던 사신의 흉안이 멈추며….
“찾았다.”
제로는 허상괴들을 만들어내는 허상괴, 여왕을 찾을 수 있었다.
여왕은 미로 가장 끝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장소는 제로가 서 있는 자리에서 수백 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특히나 여왕은 여전히 산란을 통해 허상괴들을 만들어내고 있어, 조금만 지체한다면 한국에 허상괴들의 두 번째 침공이 시작될 것이다.
“그 전에 처리해야지.”
스윽.
음음! 하며 고개를 끄덕인 제로가 손을 내뻗었다.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내뻗어진 손에서 뿜어진 죽음의 탁류가 대지를 뒤엎으며, 미로로 향하는 입구를 만들었다.
“땅 밑에 있는 모든 허상괴들을 죽여버려.”
그게게겍!
제로가 눈앞에 나타난 입구를 가리키며 말하자, 망자들이 움직였다.
통로 아니, 미로 또한 거대해진 허상괴들이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상당한 넓이와 크기를 자랑했다.
그렇기에 수만 마리의 망자들이 한 번에 들어갔음에도 움직이는 것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키에에엑!
끼엑!
미로에 퍼져있던 허상괴들이 갑작스런 망자의 습격에 괴성을 내질렀다.
사신의 흉안으로 살펴봤을 때, 이 미로 속에 남아있는 허상괴의 숫자는 대략 3000마리.
수만의 망자들이라면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는 숫자였지만….
“시간을 주지 마라.”
제로는 재빨리 허상괴들을 쓸어버리라 명령을 내렸다.
여왕은 그 개체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곤충 타입의 경우 대략 3분에 수백 마리씩 허상괴들을 만든다.
자칫 잘못하면 3000마리였던 허상괴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역으로 망자들이 당할 가능성 또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제로가 소환한 수만의 망자들과, 허상괴들의 죽고 죽이는 싸움. 아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콰가강!
콰강!
키에에에엑!
사방에서 폭발음과 함께 비명이 난무했다.
망자들의 무기가 허상괴들의 단단한 외피를 뚫고 들어가 내부를 헤집었으며.
허상괴는 날카로우면서 단단한 턱을 이용해 망자들을 찢어발겼다.
특히나 허상괴들은 괜히 개미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사방의 벽을 뚫고 튀어나와 기습적인 공격마저 감행했다.
하지만….
“소용없어.”
제로는 허상괴에 망자들이 당할 때마다, 외차원의 창고에서 새로운 망자들을 꺼냈다.
제로의 아공간에 잠들어 있는 시체의 숫자는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았고, 외차원의 창고에 잠들어 있는 망자의 숫자 또한 시체와 마찬가지로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애초에 제로가 주변의 피해나 시민들의 안전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허상괴와의 전쟁에 임한다면, 상급 이하의 허상괴들은 그 숫자가 얼마가 되든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제로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류의 구원과 평화’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선, 문명 또한 존속되어야 했기에 제로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는 상당한 제약이 뒤따랐다.
그래도….
“착실히 진행되고 있네.”
이곳 지하에 자리 잡은 미궁은 신경 쓸 인간도 없고.
지상에는 이렇다 할 문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제로는 거침없이 움직였으며, 허상괴들은 그러한 제로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여왕이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허상괴들마저 제로의 앞을 가로막았기에, 제로는 수만 마리의 허상괴들을 처리하고 나서야 여왕이 자리 잡은 미로의 끝에 다다랐다.
끼에에에에엑-!
제로의 등장에 여왕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한 여왕은 여전히 허상괴들이 잠들어 있는 알을 산란하고 있었는데, 턱 밑까지 죽음이 들이닥쳤기 때문일까.
허상괴들이 잠들어 있는 알의 산란이 한층 더 가속되었다.
허나….
“소용없어.”
제로는 꾸준히 허상괴들을 만들어 내는 여왕을 바라보며 손을 까딱였다.
그에 망자들이 여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로의 끝까지 오면서 망자들의 구성은 상당히 뒤바뀌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 알에서 기어 나오는 허상괴들을 처리하는 것은 망자의 광전사였으며. 여왕을 직접 노리는 것은 망자의 궁기병과 망자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달려들자 사방에 퍼져있는 알은 빠른 속도로 파괴되었고, 곧 여왕마저 질긴 목숨을 잃었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막 망자의 궁기병들의 화살이 여왕의 몸에 틀어박히고.
망자의 기사들이 휘두른 검이 여왕의 몸을 난도질하려는 순간….
콰가각-!
어디선가 쏟아지는 참격에 망자들의 몸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저건…?”
제로는 망자들을 박살 내는 참격이 쏟아져 나온 장소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 *
흐압!
죽어! 괴물 놈들!
콰가강!
콰강!
끼에에에엑!
한국과 북한의 경계 곳곳에서 플레이어들의 외침과 폭음. 허상괴들의 괴성이 한데 어울려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한국을 습격한 허상괴들의 숫자는 수백만 마리에 가까웠다.
허나 그런 허상괴들을 막아서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숫자 또한 수십만 명! 그와 더불어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은 250을 상회한다.
제아무리 허상괴들의 숫자가 많다 하더라도, 한데 뭉친 플레이어들이라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범위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플레이어들이 날뛸 때마다 허상괴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으며.
몇몇 강력한 상급의 허상괴들은 신성을 포함해 전선에 나와 있는 최상위 플레이어들이 처리했다.
특히나 신성이 신성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지쳐 쓰러지거나, 허상괴들에 당한 플레이어들은 좀비처럼 몸을 일으켰다.
신궁이라 불리는 일살의 활에서 화살이 쏘아질 때마다 수십 마리의 허상괴들의 몸에 거대한 구멍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이어진 플레이어와 허상괴의 전쟁은, 플레이어 쪽으로 승기가 기울었다.
“그나저나 제로는 어디에 간 거야?”
백호 위에 올라타 테이밍한 맹수형 몬스터들을 지휘하고 있던 백호가 입을 열었다.
그에 신성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북한 쪽으로 넘어가면서 ‘무언가 확인할 것이 있다’라고는 했는데…, 그 외에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제로 또한 무언가 생각이 있겠지.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면 그만이다.”
신성의 대답에 백호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을 내비치자, 신궁 일살이 입을 열었다.
그런 일살의 말에 두 자루의 배틀 엑스를 휘두르며 미친 듯이 날뛰고 있던 덴푸라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