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제, 제로? 당신이 왜 여기에…?”
갑작스런 제로의 등장에 신성이 놀라 말했다.
당황한 것은 비단 신성뿐만이 아니었다.
신성을 제외한 나머지 마스터들 또한 뜬금없이 튀어나온 제로에 당황하고 있었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룬이 신성을 제치고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제로는 여전히 틱틱거리며 말하는 룬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소환했으니 여기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
“네가…, 이것을 소환했다고?”
“뭐, 약간의 부담은 있었지만 무사히 소환할 수 있었지.”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죽음만이 떠도는 거대한 섬과 거대한 성.
그리고 수백, 수천, 수만 마리의 언데드까지.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소환했다 말하는 제로에 마스터들의 당혹감이 더욱 깊어져만 갔다.
안 그래도 자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자국의 백성들과 정상들이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부유섬이 하늘 위에 나타났을 땐, 마치 허상괴가 튀어나올 때처럼 거대한 떨림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한 떨림 이후 죽음이 감도는 음산한 섬이 모습을 드러냈기에, 아무런 능력도 없는 시민들은 물론.
대부분의 플레이어마저 당황했다.
그렇기에 여덟 마스터들이, 섬의 등장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는데….
죽음이 감도는 섬의 등장이 사실은 제로가 소환했을 뿐이라는 단순한 것이라니.
한편 제로는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마스터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부르려 했는데 잘됐네. 일단 들어와.”
끼이이익.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여덟 마스터들은 천천히 열리는 성문을 통과해 망자의 거성 내부로 들어왔다.
“여기는 도대체….”
“정식 명칭은 망자의 거성. 로스트 월드의 금지 중 한 곳인 죽음의 땅의 주인이었던 아크 리치가 있던 장소야. 뭐, 지금은 내가 접수했지만.”
망자의 거성 내부를 둘러보며 말하는 신성에 제로가 친절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제로의 안내를 받아 망자의 거성에 존재하는 수많은 방 중, 거대한 회의실과도 같은 장소에 도착하기 무섭게 썬더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딴 걸 왜 소환한 거냐?”
“이딴 것이라.”
썬더의 말에 제로가 피식 웃었다.
썬더는 러시아에 적을 둔 플레이어인 만큼, 그 단어 선택이 거침이 없었다.
제로는 그런 썬더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무왕이나 룬처럼 제 주제도, 위치도 모른 채 적의만 드러내지도 않고.
나서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잘 알고 있는 썬더를 그 누가 싫어하겠는가.
“뭐, 간단해. 이곳이 플레이어 협회의 중심이 될 장소니깐.”
플레이어 협회의 중심…?
제로의 말에 모두가 의문 어린 눈동자를 했다.
플레이어 협회.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수억의 플레이어들이 뭉칠 수 있도록 하나의 단체를 설립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이 너무나도 단순하게 ‘플레이어 협회’인 것은 둘째 치더라도, 죽음밖에 없는 이 장소가 그것의 중심이 된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제로 님. 이곳이 앞으로 창설될 플레이어 협회의 중심이 된다는 말은….”
“말 그대로야. 각국에 세워지는 것은 전부 지부. 본부라 할 수 있는 장소는 이곳 망자의 거성이지.”
“그게 무슨 개소리냐!”
제로의 설명에 무왕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버럭 외쳤다.
“이곳은 평범한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아니, 플레이어라 하더라도 한 시간도 채 버틸 수 없어! 그나마 우리 정도 되니깐 이 농밀한 죽음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거다!”
“맞는 말이야.”
무왕의 반박에 제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부유성과 망자의 거성을 감싼 죽음은 평범한 플레이어가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렇기에 각 나라에 지부를 세우겠다는 거 아니야.”
지부를 세운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지부는 십강의 마스터들 혹은 그들이 신뢰하는 플레이어가 맡을 것이다.
만일 십강이 없는 나라라면 최상위 랭커급 플레이어들이 지부장을 겸하게 되며. 그마저도 없다면….
‘뭐, 그때는 나를 따르는 망자들로 관리하면 되겠지.’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신성이 후…, 하며 깊이 숨을 토해냈다.
“알겠습니다. 제로 님께서 무엇이 하고 싶은지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희들에게 언질 좀 하고 일을 행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또 허상괴들이 습격하는 것은 아닌지 한국의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미국도.”
“유럽도 똑같아.”
신성의 말에 몇몇 마스터들이 입을 열었다.
나머지 입을 다물고 있는 마스터들 또한, 말만 안 했을 뿐. 자국의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말입니다.”
“아직도 남았냐?”
“예.”
또다시 말을 이어 나가려는 신성에 제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행동은 궁극적으로 인류의 구원과 평화로 이어진다.
그런데 뭐가 그리 불만이 많단 말인가.
“플레이어… 협회의 창설은 저 또한 찬성입니다. 애초에 제가 먼저 의견을 꺼냈기도 하고 말이죠.”
“그렇지.”
“그런데 말입니다. 협회를 만든다 치면, 플레이어들의 관리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플레이어들은 종잡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저희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힘에 취해 안하무인으로 날뛰거나. 혹은 자신이 가진 직업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플레이어가 없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요.”
장문으로 이어진 신성의 말에 나머지 마스터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불린다.
지금이야 플레이어로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럽기에 가만히 있을 뿐.
현 상황에 익숙해지고, 적응한다면 신성의 말마따나 범죄를 저지르는 플레이어가 나타날 것이다.
아니, 이미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맞는 말이야.”
제로 또한 신성의 말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규칙을 세우는 거지.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마라. 이러이러한 짓도 하지 마라. 만일 규칙을 어긴다면….”
“어긴다면…?”
뒷말을 흐리는 제로에 신성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사신이 찾아가 목숨을 앗아간다… 라는 공포를 심어줘야지.”
사신…?
제로의 뜬금없는 말에 모두가 고개를 의문을 내비쳤다.
뜬금없이 사신이라니. 무슨 중2병 걸린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곳이 로스트 월드라면 ‘아! 사신이라는 몬스터가 있구나!’라고 이해라도 하겠으나, 이곳은 현실이다.
비록 플레이어와 허상괴라는 소설 속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벌어졌지만, 사신은 또 다른 영역의 문제였다.
마스터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신성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사신이라는 것이 제로… 당신을 지칭하는 단어는 아니겠지요?”
“왜? 나름 잘 어울리지 않아?”
신성의 질문에 제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비록 사신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대낫은 아니었지만, 오른손에 네크로노미콘을 쥐며 양팔을 펼치는 제로의 모습은 상상속의 사신과 잘 어울렸다.
“설마 제로, 네놈이 직접 죽이러 다니겠다는 말인가?”
이번에 말을 한 것은 무왕이었다.
비록 반강제적이긴 했으나, 협회의 장이라 할 수 있는 제로가 그런 허드렛일을 한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치가 위치라고, 만일 제로가 그러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게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협회의 이미지가 망가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마스터들 또한 동의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네놈들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어. 근데 말이야. 내가 협회의 대가리가 되는 것은 맞지만…, 난 그걸 밝힐 생각이 없는데?”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지구의 사람들. 그것이 설령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내가 협회의 리더라는 사실은 알 수 없다고.”
제로의 말에 모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아니, 그럴 거면 뭐하러 자신이 협회의 장이 되겠디고 나선 것일까?
“겉으로는 너희 십강의 마스터들이 공동으로 협회의 리더가 되는 걸로 알려지겠지. 나는 이른바…, 숨겨진 흑막이라고 해야 할까?”
“중2병….”
제로의 말에 신성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에 제로의 공허한 눈구멍에 자리 잡은 사신의 흉안이 데굴데굴 구르며 신성을 응시했다.
“응?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신의 흉안이 자신을 응시하자, 신성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 신성의 반응에 제로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뭐, 일단 그렇게 알고 있고.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해 보자고.”
“회의…?”
“앞으로 협회에 소속될 플레이어가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한 제로의 말을 시작으로.
여덟 마스터들이 각자 의견을 제시했다.
비록 이곳에 강철과 마학자가 없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들은 애초에 ‘너희들이 정한 것을 따르겠다’라는 포지션이었기 때문이다.
* * *
두 번째 침공이 시작된 이래,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지구에는 수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점차 플레이어와 허상괴의 존재를 받아들였으며, 그들과 같이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개중에서 개장 큰 변화를 꼽자면 백이면 백,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플레이어 협회의 창설… 이라고.
플레이어 협회.
이름 그대로 플레이어들이 소속되어 있는 단체다.
그 어떤 나라의 간섭도 받지 않는 그것은 십강이라 불리는 열 개 대길드의 마스터들이 모여 만들어진 단체였다.
특히나 플레이어 협회는 치외법권의 영역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렇기에 처음 만들어졌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품었다.
법의 심판을 받지 않는 플레이어들이 날뛰거나, 사람을 죽이는 등의 범죄를 저지르면 어떡하지?
그렇다면 그들을 누가 심판하는 거지? 라는 의문과 걱정을.
허나 그러한 걱정과 의문은 단 3일 만에 해소되었다.
플레이어들 중, 협회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제 꼴리는 대로 행동하던 플레이어들이 하나, 둘씩 조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플레이어들 사이의 단순한 도시 괴담이었을 뿐이지만.
몇몇 플레이어들이 대중들 앞에서 순식간에 죽어버리고, 그 시체마저 남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사실로 받아들였다.
누가, 어떻게, 언제 그들을 처리하고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반복될수록, 플레이어들은 협회가 정한 규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협회에 가입하고, 규칙을 따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당연 최상위 플레이어와 관련하여 일어난 일이었다.
사건의 주인공인 랭킹 93위의 플레이어는 1200명의 플레이어들이 가입된 길드를 이끌고 있었는데, 한 나라를 무단으로 점령해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행위는 협회의 규칙상 금지되어 있으나, 랭커는 ‘누구든 와라! 모조리 죽여주마!’라고 말하며 자신의 강함을 과시했다.
그 결과….
랭킹 93위의 길드는 단 하룻밤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소속된 모든 플레이어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협회에 의해 대대적으로 알려진 그 사건을 통해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플레이어 협회에는 ‘사신’이 잠들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