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난장판이네.”
뒤늦게 도착한 청와대는 난장판이라는 단어가 그 무엇보다 어울릴 정도로 엉망이었다.
청와대 곳곳은 허상괴와 플레이어들의 싸움에 무너져 내리고, 박살이 나버렸다.
그러한 잔해 속에는 어떻게든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플레이어들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아, 제로 군.”
그러한 상황 속에서 대통령은 제로를 확인하기 무섭게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대통령은 백호에게 전해 들은, 대전에서 벌어진 참사.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어 나간 플레이어를 떠올리며 표정을 굳혔다.
그런 대통령의 반응에 제로가 입을 열었다.
“살아남은 것에 감사해. 그나저나 백호가 전부 설명을 끝냈나 보네.”
백호는 슬쩍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제로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한순간에 150만 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특히나 그녀의 마음 속에는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이 들어앉아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그렇다면 150만 명의 대전 시민들이 그런 개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한 생각들이 백호의 마음과 정신을 갉아먹고 있을 때, 제로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그래도….”
“잘못한 건 대전 시민들을 몰살시킨 루파르라는 버러지야. 네가 괴로워 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명심해. 허상괴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상, 모든 사람들을 구할 순 없다는 걸.”
그러한 제로의 말에 백호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뭔가 마음과 정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돌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한편, 백호를 위로한 제로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 행동에 백호는 물론, 대통령마저 당황해 입을 열었다.
“어, 어딜 가는 건가?”
“설마… 독일로 가는 건 아니죠?”
포식자 루파르.
그의 국적은 독일이다.
그에 백호는 제로가 이번 사건의 책임을 물기 위해 독일에 찾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그 생각은 틀렸다.
제로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대통령과 백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협회를 설립하려고.”
협회.
제로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플레이어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의 이름이다.
그것을 위해 태평양의 무인도에서 십강의 마스터들과 만남을 가지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빨리 만들 생각은 없었다.
세계는 아직도 혼란에 빠져 있으며, 제로가 만들 협회는 나라의 위상을 뛰어넘는 무언가다.
혼란이 채 가라앉지 않은 지금 만들었다간,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할 위험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제로가 협회의 설립을 진행하려는 이유는…,
‘플레이어들이 하나로 뭉쳤으면, 이번 사태를 더욱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어.’
갑작스런 허상괴의 침공 때문이었다.
만일 하나의 중심 아래 플레이어들이 뭉쳤다면? 그렇다면 이번처럼 극심한 피해를 입었을까?
아니었다.
또한, 그 외에도 루파르 같은 놈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 또한 없었기에, 제로는 최대한 빠르게 플레이어들의 목에 목줄을 걸 생각을 품었다.
적어도 제약을 걸어 두면, 지금처럼 미친놈 마냥 날뛰지는 못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제로는 본 드래곤을 이용해 하늘 높이 올라갔다.
펄럭! 펄럭-!
뼈로 이루어진 날개를 펄럭이는 본 드래곤이 멈춰서자, 발 밑으로 새하얀 구름이 펼쳐졌다.
그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은 사람의 마음과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으나, 제로는 관심도 없다는 듯 그저 네크로노미콘을 꺼내 쥐었다.
펼쳐진 제로의 오른손 위로 죽음이 뭉쳐드는 순간, 그로스테한 외형의 네크로노미콘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선은….”
우우웅-!
제로의 전신에서 농밀한 죽음이 피어 오르자, 공간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로에게서 피어 오르는 죽음에 공간의 떨림이 극에 달하는 순간….
쩌엉-!
기묘한 소리와 함께 공간이 무너져내렸다.
무너진 공간 너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어둠뿐이었는데, 제로는 그런 붕괴한 공간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우웅-!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갈라진 공간이 다시 한번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큭-!”
돌연 제로가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지금 제로가 하고 있는 행동은 ‘무언가’를 소환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제로가 소환하려 하는 것은 과거, 로스트 월드가 아직 섭종을 하지 않았을 때 획득한 망자의 거성이다.
제로는 새로이 설립될 협회, 그 이름도 단순한 플레이어 협회의 중심을 망자의 거성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허나 아무리 제로라 하더라도 거대한 망자의 거성을 소환하기란 손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그것이 이제는 넘어갈 수조차 없는 로스트 월드 속에 존재했던 건축물이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제로는 포기하지 않았다.
망자의 거성을 현실로 불러들이려는 이유는, 플레이어 협회의 본부로 사용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그리고 다른 이유는 망자의 거성에 속해 있는 네크로맨서들과 언데드를 전력의 일부로 사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들이 허상괴와의 전쟁에 투입된다면, 조금 더 쉽게. 조금 더 빠르게 전쟁을 끝마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인류의 구원과 평화를 이룩할 수 있게 된다.
쿠구구구구-!
점차 망자의 거성이 현실로 넘어오고 있는 것일까?
붕괴한 공간이 다시 한번 떨리기 시작하며, 주변에 거대한 금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제로는 그런 공간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콰아앙-!
명령하듯 외친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간이 폭발하며 더욱 크게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붕괴한 공간 너머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섬과 망자의 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뼈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망자의 거성은 마치 중세시대에서나 볼법한 성의 모습을 했다.
특히나 거대한 망자의 거성이 자리 잡은 섬은 한 줌의 생명조차 찾아볼 수 없는.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롯이 죽음으로 이루어진 안개로 뒤덮였다.
특히나 섬 곳곳에는 장식용으로 세워 둔 것인지 모를,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는데, 죽음의 안개와 어우러져 더욱 스산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허억-! 허억-!”
한편 망자의 거성을 현실로 소환한 제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제로가 초월체라고는 하나, 오버 데스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지닌 격으로 차원과 차원을 뛰어넘어 거대한 섬과 성을 소환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행동이었다.
만일 그 대상이 로스트 월드처럼 이미 멸망한 차원이 아닌, 차원의 주인이라 할 만한 주신이 존재하는 곳이었다면 역으로 공격 받아 소멸할 수도 있었다.
“내려가자.”
숨을 고른 제로가 입을 열자, 본 드래곤이 뼈의 날개를 펄럭이며 섬에 내려섰다.
“돌아가.”
섬에 내려오기 무섭게 제로는 본 드래곤을 역소환 하고, 망자의 거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망자의 거성은 차원과 차원을 뛰어넘어 소환되느라 군데군데 박살이 나고, 무너진 것이 보였으나 대체적으로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파 정도로 예상했었는데 말이지.”
그러한 말을 중얼거리며 제로는 망자의 거성 내부로 들어갔다.
끼이이익-.
성벽에 자리 잡은 거대한 문이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열리며 펼쳐진 정원은 황량함 그 자체였다.
성벽 밖에는 그나마 말라비틀어진 나무라도 있었지, 성벽 안쪽의 정원은 말 그대로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한 줌의 생명조차 찾아볼 수 없는 대지는 이리저리 쩍쩍 갈라져 있었다.
특히나 이렇다 할 장식물조차 자리 잡지 않은 이것을 과연 성의 정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제로는 정원을 지나쳐 들어간 성 내부는 ‘성’이라는 이름에 부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천장에는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거대한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내뿜는다.
성 내부 곳곳에는 기사, 전사, 궁수, 마법사 따위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바닥에는 다 헤지고 너덜너덜해진 붉은 융단이 깔려 있으며, 뼈의 왕좌가 놓인 홀로 들어온 이들을 안내했다.
끼이익.
융단을 따라 걸어 도착한 홀 내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았다.
아니, 그들을 과연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그냥 인형이네.”
제로는 다시 한번 뼈의 왕좌까지 이어진 융단을 걸으며 중얼거렸다.
융단으로 이루어진 길의 양옆에는 로스트 월드에서 영원한 충성을 맹세 받은 네크로맨서들이 서 있었다.
허나 그들은 제로의 말대로 인형 그 자체였다.
로스트 월드에서는 시스템에 의해 ‘인간’처럼 보이게 행동했을 뿐.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지구에 넘어온 그들은 영혼조차 없는 단순한 인형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들이 품은 강함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의 손실은 있을지언정 네크로맨서들은 허상괴와의 전쟁에서 크나큰 활약을 펼칠 것이다.
그렇기에 제로가 그들의 맹세를 받아들인 것이고.
터벅터벅 걸어가 뼈의 왕좌에 앉은 제로가 그들을 쭉 훑어봤다.
영혼이 존재하지 않아 시체와도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켠에서 절로 오싹해질 정도였다.
“무릎을 꿇어라.”
척척척!
뜬금없는 제로의 명령에 네크로맨서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홀에 있는 네크로맨서들의 숫자는 정확히 121명.
평균 레벨 400의 121명의 네크로맨서들은 상당한 전력이 될 것이다.
비록 능동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었지만, 121명의 네크로맨서 전력을 얻은 것만으로도 제로는 나름 만족스런 미소를 내비쳤다.
그리고….
“돌아가도록.”
저벅. 저벅. 저벅.
다시 한번 떨어진 제로의 명령에 121명의 네크로맨서 전원이 홀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행동에 제로는 명령 체계에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고향에 온 느낌이네.”
네크로맨서들이 빠져나간 홀.
그 안에서 홀로 뼈의 왕좌에 몸을 파묻은 제로가 중얼거렸다.
망자의 거성과, 그 거성이 자리 잡은 섬은 말 그대로 죽음뿐이다.
오버 데스라 불리며, 죽음 그 자체인 제로에게 있어서 이곳은 말 그대로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제로가 뼈의 왕좌에 몸을 파묻으며 쉬고 있었을까.
돌연 성 밖. 아니, 더욱 정확히는 성벽 밖에서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것들은 또 뭐야!
허상괴들 중에 언데드도 있었던 거야?
아 진짜! 거슬려 죽겠네!
들려오는 목소리는 정확히 8명으로,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과 기운은 압도적이었다.
제로는 갑작스런 침입자들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성벽 위에 올라선 제로의 눈에 들어선 것은, 섬 곳곳에 숨어있던 언데드와 싸우고 있는 십강의 마스터들이었다.
망자의 거성이 자리 잡은 부유섬 곳곳에는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다수의 언데드가 숨어있다.
그러한 언데드들은 제로의 허락 없이 섬에 발을 들인 십강의 여덟 마스터들을 적으로 착각하고 기습을 가했다.
허나 그들 또한 십강이라 불리는 대길드의 마스터들.
제아무리 수많은 언데드가 기습에 가까운 공격을 가했다고 한들, 그들의 털끝 하나 스칠 수 없었다.
특히나 언데드에게 있어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신성의 존재 덕분에, 언데드들은 그들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여덟 마스터들이 망자의 거성을 둘러싼 성벽에 다다르는 순간….
“너희들 뭐 하냐?”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제로의 목소리에 여덟 마스터들이 당황한 표정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