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꾸득-!
꾸드득-!
최상급 허상괴를 먹어 치운 루파르의 육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뼈는 뒤틀리고, 부서졌다 새로이 만들어진다.
근육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오밀조밀 압축되었다.
이미 괴물 같은 모습을 한 루파르였으나, 허상괴를 먹어 치운 지금의 루파르는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제로는 아직 변화를 끝내지 못한 루파르를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너희 둘은 무슨 사이냐?”
“무슨 사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저놈이 널 봤을 때 아주 그냥 기겁을 하더라.”
제로의 말에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납득이 된다.
“내가 독일인인 건 알고 있겠지?”
끄덕.
벤의 물음에 이번엔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벤의 국적이 독일이었기에, 플레이어의 각성이 일어났을 때 바로 찾아가지 못했다.
누구 좋으라고 벤 같은 고급 전력을 내버려 뒀겠는가.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품을 때, 벤이 말을 이어나갔다.
“독일에는 이렇다 할 강력한 세력이 없지. 십강도 없고, 그렇다고 대형 길드도 존재하지 않는다. 덕분에 허상괴가 나타났을 때, 내가 직접 움직여 그 혼란을 잠재워야 했었지.”
“흐음.”
벤의 말에 제로가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그래서, 그게 루파르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소리일까?
“그나마 최상위 플레이어인 루파르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난 놈을 만나러 갔지. 그런데….”
“그런데…?”
“놈이 미친 짓을 저지르려 했더군.”
“미친 짓?”
제로의 되물음에 벤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도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지는 벤이었다.
“놈은 한 도시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려 했다. 아니, 정확히는 먹어 치우려 했지. 다행히 사전에 알아차린 내가 막아서긴 했지만…, 놈은 그 뒤로 잠적했더군. 근데 설마 놈이 한국에 있을 줄은 몰랐…!”
오싹-!
말을 이어가던 벤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피부는 닭살이 돋아났으며, 등 뒤로는 연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랬단 말이지.”
한편 제로는 벤의 설명에 여전히 변화하고 있는 루파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놈이 ‘관광 차’ 한국에 놀러 왔다는 말을 전부 믿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루파르, 놈의 강함이라면 손쉽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도 놈이 독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다.
그리고….
“감히 한국을 건드려?”
루파르.
놈은 독일에서 하려 했던, 그러나 벤에게 막혀 못했던 그 미친 짓을 한국에서 해버린 것이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제로는….
“영혼만큼은 윤회의 고리에 넣어주려 했는데. 아예 그냥 소멸시켜버려야겠네.”
루파르의 영혼을 소멸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리고 루파르를 바라보자, 루파르는 어느새 변신을 끝마친 뒤였다.
[그우우우….]
제로와 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루파르가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도, 허상괴도 아니었다.
신장은 4m 정도 되었으며, 전신이 단단한 근육으로 덮여 있다.
양팔은 채찍처럼 유연하며, 양다리는 오직 ‘달리는 것’에 특화된 듯 날렵하면서도 튼튼한 모양새였다.
마지막으로 전신을 뒤덮은 가죽은 상당히 질기고 튼튼해 보였는데, 마스터 레벨의 플레이어의 공격마저 막아낼 듯 보였다.
다만 따로 머리는 없었는데, 최상급 허상괴와 루파르의 얼굴이 그것의 가슴팍에 돋아나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상태가 이상하군.”
벤의 중얼거림을 들은 제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가 이상하다. 아니, 이상한 정도가 아니었다.
루파르가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그것은 시스템의 도움으로 쌓아 올린 거짓된 힘이다.
제로처럼 초월체도 아닌 그가 최상급 허상괴를 먹어 치웠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사신의 흉안으로 들여다본 루파르의 영혼은 최상급 허상괴와 뒤섞여 붕괴해 가고 있었다.
저 괴물 같은 몸뚱어리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영혼처럼 붕괴할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저대로 내버려 두면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해.”
가뜩이나 세계는 아니, 한국은 구멍에서 쏟아져 나온 허상괴에 의해 크나큰 혼란에 빠져버린 상태다.
그러한 상황에서 저놈까지 난입한다면, 말 그대로 도시 하나, 둘쯤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뭐, 애초부터 죽일 생각이었으니.”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가 한 발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농밀한 죽음이 터져 나왔다.
주변의 모든 것을 죽이며 다가오는 제로에, 루파르가 반응했다.
그는 축 늘어져 바닥에 닿은 양팔을 휘둘렀다.
강맹한 힘으로 휘둘러진 양팔은 마치 채찍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제로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니, 강타하려 했다.
막 루파르의 양팔이 제로의 두개골을 강타하려는 순간, 그 사이에 벤이 끼어들어 막아냈다.
촤악-!
휘둘러진 데스바인더에 루파르의 양팔이 잘려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로는 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짓은.”
츠즛-!
벤을 향해 내뱉은 목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제로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제로가 다시 나타난 장소는 잃어버린 양팔을 재생한 루파르의 뒤였다.
“스스로 자멸할 몸뚱어리지만…, 내가 친히 지워주지.”
스킬 발동, 데스 본 소드.
푸욱-!
제로의 등 뒤로 흑골의 검이 만들어지며 쏘아졌다.
총 열 자루로 이루어진 흑골의 검은 4m에 달하는 루파르가 몸뚱어리 이곳저곳에 틀어박혔다.
[그아아아아아아-!]
흑골의 검에 당한 루파르, 이제는 루파르의 인격조차 사라진 그것이 비명을 내질렀다.
가슴팍에 돋아난 최상급 허상괴와 루파르의 얼굴에 달린 두 눈동자에는 붉고 푸른 피가 흘러내리기도 했다.
“고통스러워? 괴로워? 네가 그러한 감정을 품을 자격이 될까?”
[그아악!]
제로의 중얼거림에 그것이 움직였다.
재생을 끝마친 양팔이 다시 한번 채찍처럼 휘둘러지며, 제로의 사방을 압박해 들어왔다.
그 외에도 전신에 돋아난 털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제로를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소용없어.”
스킬 발동, 퍼펙트 데스 실드.
쩌저저정-!
제로를 중심으로 반투명한 원형의 방어막이 만들어졌다.
제로에게서 흘러넘치는 농밀한 죽음을 한껏 머금은 방어막은 휘둘러지는 양팔과, 그것이 쏘아낸 날카로운 털을 완벽히 튕겨내며 사라졌다.
“이번엔 내 차례지?”
스킬 발동, 데스 캐논.
후웅-!
콰앙!
[그아아악!]
허공에 만들어진 죽음의 탄환이 그것과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죽음으로 이루어진 폭발은, 범위가 미치는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죽여버렸다.
그것은 설령 공기라 하더라도 다를 바 없었는데, 그렇게 죽어버린 공기는 살아있는 무언가가 들이마신다면 폐가 썩어버릴 것이다.
데스 캐논이 일으킨 폭발 속에서 그것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나름 최상급 허상괴와, 최상위 플레이어가 한데 뒤섞인 존재라는 것일까?
데스 캐논에 얻어맞아 스며든 죽음은 피부만 썩게 만들었을 뿐, 그 외에는 멀쩡했다.
“단순히 죽음만 심어서는 죽일 수 없겠네.”
제로는 미친 듯이 달려들며 공격을 이어나가는 그것에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최상급 허상괴 또한 수백의 상급 허상괴가 뭉쳐 만들어지고. 루파르 또한 수백만의 생명을 먹어 치운 존재다.
그런 둘이 한데 뒤섞여 만들어진 저것의 생명력은 어중간한 죽음이 침식할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
스킬 발동, 사신의 시선.
제로의 등 뒤로 선홍빛의 사신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신의 눈동자는 제로를 향해 달려드는 그것을 응시하며 흉흉한 안광을 내뿜었는데, 그에 미친 듯이 날뛰던 그것의 전신이 얼어버렸다.
“그리고 다음은….”
스킬 발동, 망자의 폭거.
오른손에 쥐어진 네크로노미콘에 죽음이 뭉치며, 그 형태가 대검으로 변화했다.
그것은 벤이 걸친 갑옷처럼 폭력이라는 개념을 대검의 형태로 빚어낸 것만 같았다.
“죽음에 물리적인 충격을 더해보면 어떨까?”
스킬 발동, 데스 임팩트.
꽈앙!
얼어붙은 그것의 몸뚱어리를 망자의 폭거가 강타했다.
거대한 대검이 강타하면서 주는 충격에 그것이 몸을 비틀거렸으며, 2차적으로 죽음이 폭발하며 일으킨 충격에 뒤로 튕겨 나갔다.
“벤.”
“알고있다.”
제로는 뒤로 날아가는 그것에 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에 벤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데스바인더를 휘둘렀다.
제로의 망자의 폭거에 얻어맞고, 데스 임팩트의 충격에 그것이 날아가는 길목에 어느새 벤이 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벤이 휘두른 데스바인더는 대검답지 않은 날카로움으로 그것의 몸뚱어리를 갈라버렸다.
털썩.
후두둑.
허리가 잘려 이등분이 된 그것의 육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잘려 나간 허리에서는 섞이지 않은 붉은 피와 푸른 피가 흘러내렸다.
다만….
“무식한 생명력이네.”
허리가 잘려 나가 이등분이 되었음에도, 그것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어떻게든 떨어져 나간 하반신에 달라붙어 상처를 재생시키려 했으나, 그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벤과 제로가 아니었다.
“내가 처리할까?”
“아니, 내가 하지 뭐.”
벤의 물음에 제로가 고개를 저으며 움직였다.
한걸음, 한걸음.
‘너무 느긋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속도로 움직여 그것의 앞에 다다른 제로.
“이제 그만 끝내자. 너무 질질 끌었다.”
푸욱!
[그어어….]
망자의 폭거가 그것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깊숙이. 깊숙이 들어간 망자의 폭거는 곧 가슴 한가운데에 틀어박혀 있는 그것의 핵을 부숴버렸다.
아무리 루파르와 합쳐졌다고 한들, 그것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자그마한 핵.
스스로 자멸하고 있었으나, 그 핵이 부서지자 그것의 육체는 더욱 빠르게 부패하고. 더욱 빠르게 붕괴했다.
그렇게….
채 몇 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그것의 육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그럼 난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루파르도 처리했겠다.
벤이 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독일에선 플레이어와 허상괴들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벤 또한 그러한 싸움 속에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제로의 소환에 한국으로 불려왔을 뿐이다.
“고생했어.”
제로는 그런 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역소환했다.
그에 벤은 등 뒤로 갈라진 공간에 빨려들듯 들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럼 나도 이제 돌아가야지.”
* * *
“혀, 형님!”
제로가 도착하기 무섭게 스타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니, 스타툰 뿐만이 아니었다.
수백 마리의 상급 허상괴들이 합쳐져 탄생한 최상급 허상괴.
그리고 그것이 루파르와 합쳐져 탄생한 괴물까지.
그들의 존재감을 느낀 스타툰과 스로우. 신성과 일살. 그 외의 몇몇 플레이어들 모두가 제로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형님.”
“괜찮아.”
그들의 과한 걱정에 제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대통령은?”
“아, 대통령님이라면 백호 누님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쯤 청와대에 들어간 허상괴들의 청소도 끝났을 겁니다.”
“그래?”
스타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제로가 움직였다.
“어, 어딜 가시는 겁니까?”
“그래도 대통령은 만나보고 가야지.”
그 말을 끝으로 제로는 망설임 없이 청와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