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자네가 여긴 어떻게?”
갑작스러운 백호의 등장에 대통령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호는 대전을 점령한 플레이어들 조사하기 위해 밑으로 내려갔다.
서울과 대전의 거리를 생각해 본다면, 제아무리 백호라 하더라도 단시간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허나 그것은 ‘플레이어’에 대해 무지한 대통령의 착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백호가 이곳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로가 저희를 서울로 올려보냈어요.”
“자네를… 아니, 자네들을?”
백호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 혼자 서울에 온 것이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런 대통령의 의문 어린 되물음에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포함해 스로우와 스타툰이 먼저 서울에 왔어요. 대통령님을 지키라는 제로의 말을 듣고요.”
“스타툰과 스로우. 그 둘 또한 서울에 있다는 건가?”
“그 둘은 지금 서울에 일어난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
콰가강-!
백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스로우가 소환한 골렘들이 허상괴들을 처리하면서 만들어 낸 폭음이었다.
“허허, 그렇구먼.”
그제야 대통령은 털석,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대통령의 표정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상당히 풀려 있었다.
“그보다…, 제로 군은 왜 대전에 남아있는 건가?”
“그게….”
대통령의 질문에 백호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자신이 위험에 처했던 일.
제로의 등장.
150만 명에 육박하는 대전의 모든 시민들이 죽음을 맞이했고, 그 원흉이었던 플레이어는 독일인이었던 것 등등.
그러한 백호의 설명을 들을수록 대통령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 * *
[그아아-!]
콰가강-!
허상괴가 미친 듯이 손톱과 발톱을 휘둘렀다.
그것의 손톱과 발톱이 움직일 때마다, 날카로운 참격이 사방으로 쏘아져 대지를 헤집었다.
허나 그런 강맹한 공격도 맞지 않으면 그만.
허상괴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제로를 스쳐 지나가 이렇다 할 데미지를 입히지 못했다.
“우선 거슬리는 그 목소리부터 처리해야겠네.”
최상급 허상괴는 공격을 가할 때마다 정신을 뒤흔드는 포효를 내뱉는다.
제로라면 몰라도, 아직 대전에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남아 있다.
그들은 제로와 다르게, 허상괴의 포효에 노출될수록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전에 남아 있던 플레이어는 루파르에 동조해 15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놈들이다.
제로가 허상괴의 목소리를 앗아가려는 것은 그런 버러지들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말 그대로 허상괴의 포효를 듣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제로는 그들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 인류의 구원과 평화를 방해한 놈들을 살려둘 정도로 제로의 마음과 심성은 너그럽지 않았다.
그렇기에 제로는 자신과 허상괴와의 싸움의 여파에 휘말려 그들이 죽어 나갔음에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네놈이 불쾌해 참을 수가 없어.”
스킬 발동, 사일런스.
사일런스.
흑마법사가 익히는 매우 기초적인 저주 중 하나이다.
다만, 로스트 월드였다면 일정 시간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라는 효과를 가졌을 그것이, 현실이 되면서 ‘상대의 목소리를 빼앗는다’라는 저주에 걸맞은 효과로 변질했다.
그리고 그 지속시간은 시전자가 풀어주거나, 자력으로 저주에 대항하지 못하는 한 영원했다.
그렇게 제로의 사일런스에 당해 목소리를 내뱉지 못하게 된 허상괴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
허상괴가 입을 뻐끔거리며 벌렸으나, 사일런스에 당해 미약한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
“다음은 그 거슬리는 날개야.”
스킬 발동, 명계의 단두대.
스칵.
[…!]
머리 위에서 거대한 칼날이 떨어졌다.
그것은 조용히. 그리고 매끄럽게 허상괴의 등에 달린 세 쌍의 날개를 잘라버렸다.
갑작스레 날개가 잘려버린 허상괴는 지상으로 추락하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쾅-!
날개를 잃어버린 허상괴가 지상과 충돌하며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다만, 족히 2km의 높이에서 떨어졌음에도 최상급 허상괴는 이렇다 할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2km.
확실히 높다면 높은 거리였다.
허나 그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져 받는 충격은 마스터 레벨만 넘겨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허상괴는 제로에 의해 잃어버린 날개와 목소리만큼은 되찾지 못했다.
그에 허상괴는….
[…!]
아직 남아 있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생명을 앗아가 제로에게 당한 상처를 치유하려는 생각이었다.
움찔!
“뭐, 뭐 이 새끼야!”
“괴물 새끼가 까불지 말라고!”
“죽여버린다?”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며 침을 줄줄 흘리는 허상괴에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허상괴와 눈이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마음 한켠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 공포가 뇌를 장악했다.
[…!]
허상괴가 입을 쩍! 벌리며 소리 없는 포효를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허상괴가 플레이어들을 향해 움직였다.
허상괴가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대지가 펑펑 터져나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파편과, 그 속에 섞여 울려 퍼지는 플레이어들의 비명 소리.
제로는 최상급 허상괴에 육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영혼마저 잡아먹혀 고통에 울부짖는 플레이어들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
최상급 허상괴에게서 도망치는 몇몇 플레이어들은 그런 제로에게 살려달라고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루파르에게 동조해 대전의 시민들을 모조리 죽였을 때.
그때부터 그들의 목숨은 제로에게서 ‘살릴 필요도 없는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은….
“스불재라고 하던가?”
스불재.
스스로 불러온 재앙.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왜 사용했는지 모를 단어다.
다만, 스스로 재앙을 불러온다는 뜻만큼은 제로의 마음에 쏙 들어맞았다.
“그러니 시끄럽게 굴지 말고 그냥 죽어.”
끄아아악-!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플레이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몇 분간 플레이어들이 상처 입은 최상급 허상괴에게 유린당하고, 먹혔을까.
마지막 플레이어를 먹어 치운 허상괴는….
[…!]
트름을 내뱉었다.
여전히 목소리를 내뱉지는 못하지만, 제로에 의해 잃어버린 날개만큼은 되찾았다.
아니, 그것을 되찾았다고 해야 할까.
“더 역겹게 변했네.”
제로는 새로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른 허상괴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허상괴의 등에 달린 새로운 세 쌍의 날개. 그것은 하나같이 인간의 팔이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팔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 끝에는 당연히 손과 손가락이 돋아나 있었는데.
끔찍하게도 그런 손가락 마디 하나, 하나에서 지독한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 슬슬 끝내자. 너무 오래 끄는 것도 싫어하거든.”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쉐에에엑!
퍼억-!
제로의 등 뒤에서 쏘아진 흑골의 창이 최상급 허상괴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그와 동시에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깨에 틀어박힌 흑골의 창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터졌다.
[…!]
흑골의 창이 갑작스레 폭발하며 왼팔을 잃어버렸다.
그 사실에 분노가 담긴, 그러나 여전히 소리 없는 포효를 터트린 허상괴가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막 등에 돋아난 기괴한 날개를 펄럭이며 제로를 향해 달려들려는 찰나….
[…?]
움직임을 멈춘 최상급 허상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지금까지 포식했던 인간의 생명이라면 폭발에 의해 잃어버린 왼팔 정도는 충분히 재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생이 되지 않는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허상괴의 두 눈동자가 의혹과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니, 상처가 재생되지 않는 것만이 아니었다.
마치 독에 중독되었다는 듯, 상처 부위가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하더니, 그것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후둑-!
후두둑-!
썩어버린 육체가 힘없이 떨어진다.
새로이 만들어 낸 날개 또한 예외는 아니었으니, 그렇게 날개를 잃어버린 최상급 허상괴는 다시 한번 지상으로 추락했다.
콰앙-!
또 한 번 크레이터를 만들어내며 지상에 추락한 허상괴가 제로를 올려다봤다.
제로 또한 그러한 허상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해? 간단해. 내가 다루는 힘은 죽음. 아무리 네가 허상괴라고 하지만, 생명을 품은 존재. 생명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죽음을 피할 순 없어.”
허상괴의 육체를 갉아 먹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다.
아까 전, 데스 본 스피어가 어깨에 파고들었을 때, 죽음이 최상급 허상괴의 육체에 스며들었다.
한번 스며든 죽음은 제로가 회수하지 않는 이상. 혹은 자력으로 밀어내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생명을 갉아먹는다.
그것에서 도망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있다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 뿐이려나.”
신.
혹은 초월체.
그렇게 불리는 존재들만이 지금의 제로가 다루는 죽음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
[…!]
[…! ……!]
점차 죽음이 가까워진다.
그 사실에 최상급 허상괴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휘둘러지는 손톱에서 튀어나온 참격이 대지를 헤집고.
미친 듯이 내딛는 발에 주변의 모든 것이 터져나갔다.
허나 그러한 행동은 스스로의 죽음을 더욱 빨리 불러들이는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최상급 허상괴가 날뛰기 시작하자. 그것의 육체가 더욱 빨리 붕괴하기 시작했다.
“괴로워?”
[…!]
언제 움직인 것일까?
하늘 위에 있어야 할 제로가 허상괴의 뒤에 나타나며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그런 제로의 속삭임에 허상괴가 상체를 비틀며 손톱을 휘둘렀지만….
“뭐하냐?”
제로는 여전히 하늘 위에 떠 있을 뿐.
허상괴의 손톱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로지를 뿐이다.
뭐, 그런 허상괴의 자랑과도 같은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운 손톱 또한 스며든 죽음에 부패되어, 그 단단함과 날카로움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
후두둑.
후둑.
허상괴가 제로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침식한 죽음에 이미 육체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기도 힘든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지만, 허상괴는 제로를 죽이겠다는 일념과 원한만으로 육체를 움직였다.
“그렇게 내가 원망스럽냐.”
[…!]
제로의 질문에 허상괴의 입이 뻐끔거렸다.
제로는 그런 허상괴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스불재. 네놈에게도 이 말이 통하겠네. 그러게 누가 지구로 넘어오래? 넌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다 자업자득이다.”
그 말을 끝으로 제로는 몸을 돌렸다.
허상괴는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수 분 내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게 몸을 돌린 제로는 대전 시청의 밑에 자리 잡은 지하공간으로 이동했다.
아니, 이동하려 했다.
막 제로가 움직이려는 찰나 돌연 대지가 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떨리며….
콰앙-!
폭발과 함께 땅 밑에서 두 괴인이 튀어나왔다.
한 명은 죽어가는 허상괴와 마찬가지로 끔찍한. 온갖 종류의 생물을 뒤섞어 만든 듯한 키메라의
모습을 한 루파르.
나머지 한 명은 폭력을 형상화한 듯한 갑옷을 걸치고, 한 손에 거대한 대검. 최흉최악의 마검 데스바인더를 쥐고 있는 벤이었다.
“아직도 처리하지 못했어?”
“곧 끝난다.”
제로의 물음에 벤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편, 벤에게 당한 듯, 전신이 난도질당해 있는 루파르는 다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무언가라도 먹어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 루파르가 먹어 치울 만한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죽어가는 최상급 허상괴에게 먹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찾았다!”
단 하나.
루파르가 먹어 치울 존재가 남아 있으니 그것은 제로에 의해 다 죽어가는 최상급 허상괴였다.
“잘 먹겠습니다!”
최상급 허상괴에게 달려든 루파르는 망설임 없이 그것의 육체에 이빨을 박아넣었다.
우걱우걱.
쩝쩝.
루파르의 입이 움직일 때마다 썩어 무너지는 최상급 허상괴의 몸뚱이가 점차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