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너… 그 말은 우리를 배신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냐?”
“배신… 이라.”
룬의 말에 블러드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딱히 배신 운운할 관계는 아니지 않나?”
까득-!
이어진 블러드의 말에 룬이 거칠게 이를 갈았다.
블러드의 말은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십강이라 불리기에 명목상 동맹의 형태를 맺고 있을 뿐, 딱히 이렇다 할 친분은 없었다.
아니, 도리어 어떻게 보면 서로 경쟁하는 위치라 볼 수 있었다.
“칫.”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던 와중, 룬이 먼저 시선을 돌리며 낮게 혀를 찼다.
지금은 블러드까지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블러드가 적으로 돌아서게 된다면, 자신들의 패배는 불 보듯 뻔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차라리 블러드가 가만히 있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었다.
그에 룬은 블러드에게 관심을 끄고, 제로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블러드 또한 그러한 룬의 행동에 피식 웃으며 제로를 바라봤다.
한편 제로는 십강의 마스터들 중, 네 명의 합공을 동시에 받고 있음에도 이렇다 할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무왕의 날카로운 검은 제로의 육체에 닿지 못하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썬더의 강력한 번개는 그 목표를 잃고 사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 외에도 마도왕의 마법, 룬의 화살, 은림의 마스터 세이메이의 주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공격은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제로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고작 이정도야?”
다섯 마스터들의 공격을 피하던 제로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네놈…!”
속삭이듯 제로를 향해 중얼거리는 무왕의 전신에서 막대한 천상기가 줄기차게 뿜어져 나왔다.
애초에 십강의 마스터들 또한, 인간을 초월한 강함을 가지고 있는 초인들이다.
그런 마스터들은 주변의 피해를 걱정해 의도적으로 힘을 제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로의 조롱과, 아무리 공격해도 닿지 않는 자신들의 공격에 스스로 걸고 있던 제한을 풀어버렸다.
쿠구구구구-!
무왕을 시작으로 썬더와 세이메이. 룬과 마도왕의 기세가 변했다.
그들이 진심을 다 하기로 마음먹자, 섬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섯 마스터와 제로를 중심으로 섬 곳곳이 갈라지고, 무너져 내린다.
대기는 그들이 내뿜는 존재감에 짓눌려 한없이 무겁게 변해갔으며, 머리 위로는 짙은 먹구름이 생기며 연신 낙뢰를 떨궜다.
이곳은 로스트 월드가 아니다.
게임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시스템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로스트 월드였다면, 그들이 진심을 다 해 만들어 낸 피해 또한 시스템이라는 법칙 아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대가 지구가 된다면 말이 달라진다.
진심을 다 하는 다섯 마스터들과 제로가 부딪히게 된다면, 극심한 인명피해 또한 발생하게 될 것이다.
허나 마스터들은 그러한 뒷일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제로를 꺽어 누르고,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뿐이다.
그렇게 다섯 마스터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드러내며 움직이려는 찰나….
“여기까지 하시지요.”
펄럭-!
등에 한쌍 의… 아니, 하나의 날개를 펄럭이고. 머리 위에 순백의 링을 달고 있는 신성이 개입하며 입을 열었다.
신성은 하나뿐인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런 신성의 등장에 모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제 와서 끼어드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뭐? 이제 그만 하라고?”
갑작스런 신성의 개입에 썬더가 불평을 토해냈다.
아니, 말은 하지 않았을 뿐.
신성의 갑작스런 개입에 무왕과 세이메이. 룬과 마도왕 모두가 불만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신성은 그런 다섯 마스터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 이상 싸움을 이어나간다면 극심한 피해가 생길 겁니다.”
“꼴에 한국인이라고 같은 한국인인 제로의 편을 드는 거…! 큭!”
쿠궁-!
신성을 향해 비아냥거리던 룬이 낮은 신음을 터트리며 비틀거렸다.
신성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룬은 전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압력을 느꼈다.
“저와 제로가 같은 한국인인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 싸움을 지속하겠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경고의 의미로 말을 하는 신성의 몸에서 순백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얼핏 보면 신성력과도 같았지만, 신성력이 아니었다.
신성이 다루는 힘의 정체는 신력이다.
신력은 인간들에게서 천사라 불리는 종족, 천족이 다루는 힘이었다. 신성력은 바로 그 신력을 모방하여 인간이 사용할 수 있게 변형한 것이다.
신성이 내뿜는 신력에 노출된 나머지 마스터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신성이… 이렇게 강했던가…?’
신성을 바라보며 마도왕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마도왕의 표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신성의 진정한 힘을 느낀 다른 마스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스트 월드에서의 신성은 ‘자애의 성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사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축복과 방어, 해독과 해주 따위에 특화되 기본적인 전투력이 낮은 것이 그들 모두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신성의 강함은 비록 제로에게 미치지 못하나, 여기 있는 그 어떤 마스터들에게도 꿀리지 않았다.
특히나….
‘저 모습은 또 뭐야?’
가장 놀라운 것은 ‘인간 플레이어’로 알려져 있던 신성이 사실 ‘이종족 플레이어’라는 것이다.
머리 위에 떠 있는 순백의 링과, 비록 하나뿐이지만 펄럭이고 있는 순백의 날개.
그 모습은 말로만 들었던 천사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제로 님도 이제 그만 하시지요.”
등 뒤로 시선을 돌린 신성이 입을 열었다.
그런 신성의 말에 제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로 되묻는 제로에 신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이상 싸움을 이어나간다면 자신이 지키고 싶은 인류에게도 크나큰 피해가 끼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그러한 생각을 품은 신성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제로라면 그 사실을 이미 깨우치고도 남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싸움을 더 이어나가려 하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을 품은 신성이 제로를 바라봤다.
제로는 ‘왜 싸움을 이어나가려는 겁니까?’라고 물어보는 듯한 신성의 시선에 쯧! 하며 혀를 찼다.
“저놈들이 꼴받게 하잖아.”
자신보다 약한 놈들이 꼴에 자존심만 있어 가지고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린다.
그 모습만큼 보기 싫은 것이 또 있을까.
또한 십강의 마스터들을 제대로 컨트롤하기 위해선 지금 힘의 격차를 보여줘야 한다.
그나마….
‘저 둘은 어느 정도 머리가 굴러간단 말이지.’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는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두 마스터를 바라봤다.
블러드 마스터 블러드와 헬 나이트 군림.
이 둘은 신성과 마찬가지로 이종족 플레이어다.
블러드는 언데드계 종족 중, 언제나 상위 랭크에 꼽히는 뱀파이어였으며 헬 나이트 군림은 ‘마인’이라 불리는 종족이었다.
하나같이 성장 과정에서 힘의 논리를 깨닫기에 적합한 종족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제로와 자신들간의 힘의 격차를 미리 깨우치고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특히나 블러드의 경우, 다른 마스터들과는 다르게 제로에게 동질감… 아니, 경외감을 품고 있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로는 죽음 그 자체다.
밤의 귀족이니 뭐니 하며 불리는 뱀파이어지만, 그 본질은 죽음 속에서 탄생한 존재.
죽음 그 자체인 제로를 거스를 순 없었다.
“정말 이대로 계속하실 생각이십니까?”
“못할 것도 없지?”
신성의 질문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신성이 후… 하며 낮은 숨을 토해냈다.
다른 십강의 마스터들은 자신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제로는 아니었다.
제로의 강함은 자신이 손을 쓸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났다.
아니, 그 누구도 제로를 억압할 수 없다.
로스트 월드에서도 그랬지만, 현실에서도 제로는 모든 것을 초월한, 말 그대로 ‘초월자’였다.
그와 동시에….
‘저들도 아직 싸울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신성은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듯 후…, 하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나머지 두 마스터, 블러드와 군림이 나서 준다면 어찌어찌 상황을 진정시켜 볼 만했다.
하지만 저들은 오롯이 ‘지켜만 볼 뿐’, 이 상황을 정리하겠다는 의도는 내비치지 않았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시작은 단순히 지구의 균형을 맞추고, 플레이어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단체를 설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십강이라 불리는 길드의 마스터들을 보자면, 인류의 평화니 균형이니 하는 것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저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곤 오롯이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뿐이다.
차라리….
‘허상괴라도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신성은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허상괴라도 나와 줬으면 싶었다.
공공의 적이 생긴다면 이 의미 없는 싸움은 적어도 소강상태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물론, 신성이 바란다고 허상괴가 ‘아이고 그러십니까! 그럼 저희가 나서 줘야죠!’ 하며 등장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신성이 마지막 질문을 내던졌다.
이 만남은 단순히 새로이 설립될 단체의 장을 뽑기 위한 자리였는데,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그러한 생각을 하며 물어보는 신성에 제로가 입을 열었다.
“간단해. 저놈들이 스스로의 약함을 인정하고, 물러나면 그만이야.”
“이 개새끼가 그래도 계속!”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제로의 언행에 무왕이 버럭 외쳤다.
그런 무왕의 전신에선 천상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있으며, 날카로운 살기가 제로에게 집중되었다.
허나 무왕의 농밀한 살기가 집중되었음에도 제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서 있었다.
제로는 그런 무왕을, 그리고 불쾌감을 여실히 드러내는 나머지 마스터들을 훑어본 뒤,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대가리가 되는 건 너희들에게도 좋은 일이야.”
“그게 무슨 개소리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제로에 무왕이 또 한 번 버럭 외쳤다.
그런 무왕의 성난 외침에 제로의 시선이 그를 향해 고정되었다.
“말 그대로야. 새로 단체를 만든다 치자. 그 뒤는? 수억의 플레이어들을 관리하고, 그에 걸맞는 인재들을 찾아내고. 플레이어들에게 적용될 공정한 규칙을 만들어내고. 그 외의 기타 등등. 너희들이 과연 이걸 처리할 수 있을까?”
으음….
제로의 말에 마스터들 전원이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마스터들은 단순히 이익과 권력에 눈이 멀어 스스로가 리더가 되고자 나섰다.
하지만 막상 생각해 보면, 단체의 리더란 그만큼 막중한 의무가 부여된다.
특히나 제로의 말대로 수억의 플레이어들을 관리하고, 그들이 지켜야 할 공정한 규칙을 새로이 설립하는 등. 그러한 것들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제로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때?”
쐐기를 박는 듯 말하는 제로에 마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마도왕이 한발 물러나자, 나름 머리를 굴린 썬더와 세이메이 또한 뒤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물러나지 못한 것은 뒤틀린 자존심과 아집에 사로잡히고.
다른 누구보다 제로를 ‘강렬하게 싫어하는’ 무왕과 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