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요즘 잠잠해진 거 같지 않아?”
“그러게. 뭔 일 있나?”
“그래도 다른 나라는 여전히 플레이어들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로 시끌시끌하더라.”
은신 마법을 이용해 길거리를 걷고 있던 제로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에 멈칫했다.
유독 대한민국에서만 플레이어들에 의한 사건 사고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제로 때문이었다.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플레이어.
지닌 힘은 강대하나 제멋대로 행동함으로써,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플레이어.
싸이코패스처럼 어느 한 부분이 뒤틀려 일반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플레이어.
제로는 어둠 속에 몸을 숨겨, 그런 플레이어들을 처리하고 그 시체와 영혼을 수집하고 있었다.
제로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허상괴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시체와 영혼을 이용해 망자로 만들고, 그들이 생전 품었던 힘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진다.
다만, 제아무리 인류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서 행동했다고는 하나, 누군가는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제로는 일부러 비밀리에 플레이어들의 시체와 영혼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층 몇과, 신성 같은 십강의 길드 마스터와 랭커급 유저 몇 명뿐이었다.
한편 오늘도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쓸만한 시체와 영혼을 찾고 있던 제로가 걸음을 멈추었는데.
그런 제로 앞으로 한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야?”
은신 마법을 꿰뚫고 자신을 응시하는 플레이어에 제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순백의 사제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런 사제복의 심장 부근에는 다섯 송이의 장미가 얽힌 십자가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은 눈앞의 플레이어가 신성 길드에서도 1군에 속한, 그리고 나름의 지위가 있는 유저라는 것을 알려줬다.
그에 제로는 망설임 없이 은신 마법을 해제했는데, 제로가 나타나기 무섭게 인기척이 없는 골목길에 싸늘한 죽음이 내려앉았다.
“마스터께서 찾으십니다.”
“마스터? 신성이? 날 왜?”
“그건 저도 잘….”
이어진 제로의 질문에 플레이어가 당황했다.
그 또한 신성에게서 제로를 찾으라는 말만 들었을 뿐, 그 외의 어떠한 말도 듣지 못했다.
“알겠어. 가 봐.”
“그럼 전 이만….”
제로의 말에 플레이어가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플레이어가 사라지자, 제로 또한 ‘왜 날 찾는 거지?’라는 생각을 품으며 사라졌다.
그렇게 골목길에서 사라진 제로가 다시 나타난 장소는 서울 강남에 위치한 빌딩 앞이었다.
그 빌딩은 신성 길드가 매입해 길드 하우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늦은 시간임에도 빌딩은 불이 꺼질 줄을 몰랐으며, 그곳을 중심으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지, 무슨 일로 오셨습…! 헙!”
제로가 망설임 없이 빌딩 안으로 들어가자, 경비를 서고 있던 사람이 제로를 제지했다.
허나 곧 경비는 후드 속에 감쳐줘 있던 제로의 얼굴. 심연을 품은 듯한 흑골로 이루어진 그것을 보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경비 또한 한 명의 플레이어였기에, 지구상에서 저런 얼굴과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는 오직 제로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제로 님 아니십니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신성은 있지?”
“마, 마스터는 최상층에 계십니다.”
“수고.”
신성이 있다는 말에 제로는 경비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런 제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경비는 저도 모르게 ‘대박’이라며 중얼거렸다.
한편, 엘리베이터를 통해 최상층으로 간 제로는 하나의 문 앞에 멈춰 서며 노크를 했다.
똑똑.
“들어오…!”
“나 불렀냐?”
갑작스런 노크에 앉아있던 신성이 입을 열었다.
그러한 신성은 갑작스런 제로의 등장에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제로는 그러한 신성의 반응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왜 자신을 불렀는가. 그것에 대한 대답만 들으면 그만인 제로였다.
“빨리 오셨군요.”
“네 부하가 유능한 탓이지.”
제로의 말에 신성이 멋쩍은 미소를 내비쳤다.
“그나저나 난 왜 부른 거냐?”
“아 그게….”
이어진 제로의 질문에 신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어진 신성의 설명을 듣고 있던 제로가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깐, 네 말을 정리해 보자면 이거지? 플레이어들이 하나로 뭉칠 구심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십강의 그 쓰레기들이 협조를 안 해준다?”
“쓰, 쓰레기라고까지는 안 했는데….”
“어쨌든 그거잖아.”
제로의 과격한 단어 선택에 신성은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단어 선택이 과격했을 뿐, 제로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지금 지구는 난세나 다름없었다.
수억의 인구가 플레이어로 각성함으로써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으며. 그런 플레이어들이 모여 만들어진 길드들 또한 현실의 권력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나마 한국이나 미국처럼 십강이 있는 나라는 어느 정도 상황이 좋은 편이었으나, 그런 거대 길드가 없는 나라들은 수십 개의 중소규모 길드 간의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그에 신성은 십강의 길드 마스터들에게 연락을 돌려, 플레이어들을 규합하고, 규칙을 정하기 위한 단체를 만들자고 건의했다.
십강의 마스터들은 그러한 신성의 제안에 동의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만들어질 단체의 머리는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다.
이대로 조금만 시간이 지난다면, 자칫 잘못해 십강에 의한 대규모 전쟁이 발생할지도 몰랐다.
“뭐, 간단한 문제네.”
“간단… 한 문제입니까?”
제로의 말에 신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던 걸까?
십강이라 불리는 길드의 마스터에 앉아있는 유저들은 확실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강철 길드처럼 비전투 직업의 유저들이 모인 길드 또한 있었지만, 그럼에도 대다수의 마스터들은 전투용 직업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강한 만큼 그 자존심과 오만함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는데, 그런 인간들이 모두 ‘내가 단체의 장이 되는 게 맞아!’라고 주장하는 지금의 상황을 과연….
‘간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신성이 속으로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제로가 말했다.
“십강의 마스터들에게 연락 돌려. 조만간 이 주제로 한번 보자고.”
* * *
신성과의 만남 이후 3일 뒤.
제로는 스타툰과 스로우를 대동한 체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아직 바다 위나 밑에는 허상괴가 남아 있다.
하지만 최하급에서 하급 정도의 허상괴는 바다를 건너기 위해 소환한 본 드래곤만으로 상대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본 드래곤의 머리 위에 올라타 얼마나 바다 위를 날아갔을까.
스타툰이 제로를 향해 의아함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저희는 어딜 가는 겁니까? 형님.”
스타툰의 질문에 스로우 또한 제로를 바라봤다.
그 또한 말은 하지 않았을 뿐, 자신들이 어딜 가는지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응? 내가 말 안 했던가?”
“말 안했는뎁쇼.”
스타툰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제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십강의 대가리들을 만나러 가고 있어.”
십강의… 대가리…?
그 말은 곧….
“십강의 마스터들을 만나러 간다는 뜻입니까?”
“그럼 누가 대가리겠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스타툰에, 이번엔 제로가 어이없다는 눈을 했다.
“아니, 그들을 왜…?”
“필요하니깐 만나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제로가 입을 다물었다.
그에 스타툰과 스로우는 ‘그러니깐 왜 만나러 가는 거냐고요!’라는 뜻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허나 제로는 그런 둘의 시선을 무시하며 그저 바다를 응시할 뿐이다.
그렇게 왜 자신들이 십강의 길드 마스터들을 만나야 하는 지조차 알지 못한체 움직였을까.
뼈로 이루어진 날개를 펄럭이며 움직이던 본 드래곤이 허공에 멈췄으며, 그러한 본 드래곤의 밑으로는 하나의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무인도로, 나무 한 그루 없이 돌산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워. 전부 플레이어들이에요?”
축구장을 3개 정도 합친것 만 같은 크기의 무인도 곳곳에 플레이어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400레벨 이상으로 보였는데, 그런 플레이어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공통점은 다름 아닌 장비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었다.
그들의 장비에 새겨져 있는 문양은 제각각이었으나, 그러한 문양들은 모두 십강의 일원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즉, 무인도에 모여 있는 플레이어들은 전부 십강 소속의 플레이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플레이어들의 중심에 십강의 마스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려가자.”
제로는 무인도에 도착하기 무섭게 본 드래곤을 역소환 했다.
본 드래곤이 사라지는 순간, 제로와 스타툰. 그리고 스로우는 무인도로 수직하강을 시작했는데, 그들의 강함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 한들 목숨에 위험은 없었다.
한편, 무인도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린 제로와 스타툰. 스로우에 당황한 표정을 내비쳤다.
“모두 모였네?”
제로는 사방에 퍼져 자신을 바라보는 플레이어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제로의 사신의 흉안과 눈이 마주한 플레이어들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플레이어들이 심장을 옥죄이는 공포에 물러나고 있을 때, 그들을 헤치며 십강의 마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무인도에는 십강이라 불리는 열 개의 길드 중, 여덟 개의 길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들은 신성 길드를 시작으로, 헌터. 천둥. 상아탑. 천상. 무황성. 은림. 블러드 문의 여덟 길드였다.
무인도에서 이루어진 집회에 불참한 길드는 강철과 마학자였다.
그렇게 앞으로 나선 마스터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룬이었다.
헌타 길드의 마스터로 있는 그는 특유의 유들유들한 웃음을 내비치며 말했다.
“늦었네?”
허공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제로의 사신의 흉안이 데굴데굴 굴러 룬을 응시했다.
룬 또한 나름 십강의 마스터인지, 그런 제로의 사신의 흉안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응시했다.
허나 제로는 곧 관심 없다는 듯 룬에게서 시선을 돌렸고, 그 모습에 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강철과 마학자는 없군.”
“애초에 그들은 비전투 직업군인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들이 모여 만들어진 길드잖아.”
제로의 중얼거림에 룬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허나 이번에도 제로는 룬의 말을 무시했다.
그에 룬의 미간에 더욱 깊은 골이 자리 잡았다.
한편 제로는, 나머지 여덟 마스터들을 쭉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신성이 건의한 ‘플레이어들의 구심점이 될 단체’의 설립에 찬성한다는 뜻이겠지?”
끄덕끄덕.
제로의 말에 여덟 마스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희들 모두는 각자 자신이 새로이 설립될 단체의 리더가 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어진 제로의 말에 몇몇 마스터들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마스터들은 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뉘앙스를 풍겼다.
한편 제로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마스터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명확히 말하지. 단체의 리더는 내가 하겠다. 불만 있는 놈은 힘으로 증명해라.”
쿠웅-!
그 말을 끝으로 제로의 육신에서 짙은 죽음과 난폭한 존재감이 넘실거리며 터져 나왔다.
그것에 무인도를 감싼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으며, 여덟 마스터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유저들이 크윽! 하는 신음과 함께 몸을 비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