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하늘에 열린 구멍 속에서 허상괴들이 쏟아지고,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하던 수많은 유저들이 플레이어로 각성한 지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일주일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구멍은 허상괴를 토해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구 전역에는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플레이어로 각성한 사람들 중, 제 힘에 취해 멋대로 행동하는 이들이 계속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건의 시발점이 된 것은, 일주일 전 센 다이고라는 이름의 플레이어가 미국 대통령을 습격했던 사건이었다.
십강이라 불리는 길드가 나서 그러한 혼란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나 수억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플레이어로 각성한 이상, 제아무리 십강이라 하더라도 지구 전역의 플레이어들을 관리할 순 없었다.
그렇게 지구 곳곳에 퍼져 있는 국가들은 플레이어들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이라 해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그나마 한국은 괜찮은 편이었다.
십강중 상위에 속하는 신성 길드를 필두로, 제로가 직접 움직이며 그러한 플레이어들을 구속하고. 때론 척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쪽이다!”
“1파티는 길을 우회해 놈의 퇴로를 막아! 2파티는 나랑 같이 놈의 뒤를 쫓는다!”
신성 길드 3군에 속한 유저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각성한 능력으로 살인을 일삼은 플레이어의 뒤를 쫓고 있었다.
제아무리 신성 길드와 제로가 있다지만, 그들의 몸뚱어리가 열 개도, 백 개도 아닌 이상 모든 플레이어들을 관리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잊을 만하면 사건 사고가 터져 나왔다.
한편 제로는 구름 속에 몸을 숨기고 신성 길드가 쫓고 있는 플레이어를 내려다봤다.
쫓김을 당하고 있는 플레이어의 이름은 핏빛칼날이었다.
다소 유치한 이름이었지만, 그의 레벨은 300 전후였는데, 그런 핏빛칼날의 강함은 300대 초반의 레벨로는 보이지 않는다.
핏빛칼날이 레벨에 걸맞지 않은 강함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가 보유한 히든 클래스 때문이다.
그가 가진 히든 클래스의 이름은 계약자로, 특정 조건을 이루는 것으로 계약한 존재의 힘을 빌려오는 직업이었다.
그렇기에 계약자라는 직업은 어떤 존재와 계약을 맺었는가에 따라 그 강함이 달라지는, 다소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핏빛칼날은 계약자라는 직업으로, 마계의 중급 마수와 계약을 맺어,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점차 강해져 왔다.
하지만 플레이어로 각성한 순간, 그는 강해지는 길을 잃어버렸다.
지구에는 몬스터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몬스터 대용으로 사냥할 수 있었던 허상괴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허상괴조차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오지나 망망대해에나 있을 뿐이다.
결국 핏빛칼날은 인간에게 손을 대었다.
그렇게 핏빛칼날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와중, 살인 그 자체가 주는 쾌락에 중독되어 버렸다.
그것이 핏빛칼날이 신성 길드의 추격자들에게 쫓기는 이유였다.
“좀 꺼져!”
콰가강-!
골목길 이곳저곳을 누비며 도망치던 핏빛칼날이 크게 손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핏빛칼날의 등 뒤로 그의 닉네임과도 같은, 수십 자루의 핏빛의 칼날이 쏟아져 나와 신성 길드의 추격자를 덮쳤다.
크윽-!
크아아악!
추격대는 갑작스레 덮치는 핏빛의 칼날에 휩쓸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다행히 핏빛의 칼날은 추격자들의 목숨을 앗아가지 못했다.
다만, 목숨을 잃지 않았을 뿐. 추격자들은 곧바로 핏빛칼날을 쫓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타격을 입어 버렸다.
“신성 길드가 십강 중 하나지만, 그래도 역시 3군에 속한 유저들로는 역부족인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나마 신성 길드의 길드원들 대다수가 사제나 성기사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큰 부상만 아니면 곧바로 회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그 좀비 같은 생명력과 재생력 덕분에 핏빛칼날을 이 정도까지 몰아붙일 수 있기도 했다.
하지만….
“슬슬 한계가 보이네.”
제아무리 사제라 하더라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신성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핏빛칼날과의 끈질긴 추격전에 대부분의 신성력을 소모했다.
포션을 사용해도 그만이었지만, 아직 현실의 재료로 포션을 만드는 기술은 개발되지 않았다.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할 때 모아뒀던 재료 또한 한정적이었기에, 포션의 값어치는 급속도로 폭증해 버렸다.
그로 인해 저레벨, 고레벨을 가리지 않고 대다수의 유저들은 최대한 포션을 아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러한 상황이 겹쳐, 핏빛칼날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핏빛칼날의 생존도….
“슬슬 움직여야겠네.”
제로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거미줄에 얽힌 날벌레와도 같아졌다.
제로가 신성 길드의 추격대를 뿌리치고 달려 나가는 핏빛칼날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제로의 등 뒤로 수십 개의 흑골의 화살이 만들어지며 쏘아졌다.
퍼버버벅!
푸욱-!
“크윽!”
한창 도망에 열중이던 핏빛칼날이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그를 중심으로 사방에는 제로가 쏜 흑골의 화살이 틀어박혀 있었으며.
핏빛칼날의 허벅지에도 이미 두 개의 흑골의 화살이 꿰뚫었다.
평범한 네크로맨서들이 사용하는 뼈 마법의 재료는 흑골이 아닌 보통의 백골이다.
즉, 흑골로 이루어진 공격이 가해졌다는 것은….
“제로….”
핏빛칼날이 머리 위를 올려다보며 으득! 이를 갈았다.
그런 핏빛칼날의 눈에는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제로의 모습이 내비쳐졌다.
“고작 나 하나 잡겠다고 네놈이 튀어나와?”
핏빛칼날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버럭 외쳤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제로는 수억의 유저들 중, 유일하게 800레벨을 돌파한 플레이어라 알려져 있다.
그 소문이 거짓이라 해도, 최소 700레벨 이상의 플레이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에 반해….
‘내 레벨은 고작 332란 말이다!’
운좋게 계약자라는 히든 클래스를 가져, 남들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핏빛칼날이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 한 시간은 고작 4개월 정도다.
고작 4개월 만에 300레벨을 돌파한 것만 봐도, 계약자라는 직업이 주는 강함을 잘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제로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아니, 지구라는 자그마한 행성과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만큼이나 크나큰 격차가 존재한다.
한편 제로는 억울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핏빛칼날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자신보다 약한 플레이어…. 아니, 플레이어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 네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이익-!”
제로의 지적에 핏빛칼날은 이렇다 할 반박을 내뱉지 못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로스트 월드와는 다르다.
아무리 죽어도 약간의 페널티만 지불하면 부활할 수 있는 로스트 월드와 달리 한 번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핏빛칼날은 의도적으로 다른 플레이어들을 피해 왔다.
아무리 자신보다 약하다고 해도, 플레이어는 플레이어다.
어떤 힘을 가졌을지 모를 플레이어를 사냥하기보다는, 차라리 안전하게 평범한 인간들을 사냥하는 편이 좋았다.
다만 평범한 일반인을 죽이는 것이기에 성장폭은 상당히 낮다는 부작용이 생겨버렸다.
“그, 그게 뭐 어떻다고! 우리는 영웅이야! 평범한 사람들을 괴물로부터 지켜주는 영웅이라고! 아무 쓸모도 없는 목숨으로 그러한 영웅이 강해질 수 있다면 놈들은 기쁘게 죽어…!”
쓸모없는 말을 지껄이는 핏빛칼날에 제로가 움직였다.
데스 부스터를 통해 순식간에 핏빛칼날의 앞에 도착한 제로가 일권을 내뻗었다.
퍼억-!
“커헉!”
제로의 주먹이 핏빛칼날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핏빛칼날은 복부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끔찍한 충격과 고통에 꺽꺽거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핏빛칼날을 향해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넌 선을 넘어버렸어.”
“내가… 선을 넘었다고?”
제로의 말에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핏빛칼날이 되물었다.
선을 넘었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존재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니면 저 말에 어떠한 속뜻이 있는 것일까?
허나 아무리 고민해도 핏빛칼날은 제로의 말이 품은 속뜻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내가 널 죽이는 이유는 간단해. 선을 넘었다. 그것뿐이야.”
“그러니깐 그 선이 도대체 뭐냐고!”
계속해서 뜬구름 잡는 말만 하는 제로에 핏빛칼날이 버럭 외치며 손을 내질렀다.
제로의 미간을 노리며 내뻗어진 핏빛칼날의 손에는 붉은 피의 칼날이 덧씌워져 있었다.
또한 그렇게 내뻗어진 칼날의 속도는 평범한 300레벨 플레이어의 속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소용없어.”
제로의 신형이 흐릭해지는 순간, 핏빛칼날이 내지른 회심의 일격이 허망하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혼신의 힘을 다 한 기습이 실패하자, 핏빛칼날이 허망한 표정을 내비쳤다.
제로는 그런 핏빛칼날의 얼굴을 향해 손을 내뻗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플레이어들이 강해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넌 강해지는 방법을 잘못 선택했어.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인류의 구원과 평화거든.”
으아아아아악-!
흑골의 손에 얼굴을 붙잡혀 떠오르는 핏빛칼날이 비명을 내질렀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무섭다.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죽기 싫어-!”
자신의 얼굴을 붙잡은 흑골의 손에서부터 죽음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핏빛칼날은 얼굴에서 시작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끔찍한 죽음에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때론 주먹을 휘두르고, 때론 발로 걷어찼다.
스킬을 사용해 공격해 보기도 했으나, 그 무엇하나 제로에게 데미지다운 데미지를 입히지 못했다.
아니, 도리어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자신의 손과 발만 망가질 뿐이었다.
그렇게 핏빛칼날은 전신을 장악한 죽음에 점차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죽기 싫다.
아직 죽기 싫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쓰레기들 몇 죽였다고 자신이 죽어야 하다니!
핏빛칼날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난… 아직 죽… 을 수 없어….”
털썩.
단말마에 가까운 중얼거림을 내뱉은 핏빛칼날의 몸이 축 처졌다.
전신으로 피를 순환시키는 심장은 기능을 정지했으며, 뇌는 육체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 증거로 제로가 소유한 사신의 흉안에는, 육체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핏빛칼날의 영혼이 비쳤다.
“육체만 있으면 실패할지도 모르니….”
제로는 육체에서 빠져나가 점차 원령으로 변화하는 핏빛칼날의 영혼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러한 손에서부터 흘러나온 죽음은 핏빛칼날의 원령을 옥죄이며, 그 목에 사슬을 채웠다.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계약자라는 히든 클래스를 가진 핏빛칼날의 육체를 손에 넣었다.
억울함에 순환의 고리에도 가지 못하고 원령이 되어버린 영혼마저 손에 넣었다.
그 사실에 제로가 만족스러워하며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였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로의 등 뒤로 신성 길드의 추격대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몇몇은 이차원 창고에 빨려들듯 사라지는 핏빛칼날의 시체를 바라보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제로는 그런 신성 길드의 추격대에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나도 필요해서 움직인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제로는 짙은 죽음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신성 길드의 추격대는 사라진 제로가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