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쾅! 콰강!
골렘의 육중한 주먹이 한 번,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허상괴들의 육체가 터져나갔다.
허상괴들은 기본적으로 핵을 부수지 않으면, 육체의 상처 따윈 아무런 데미지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골렘의 육중한 주먹은 허상괴들의 육체를 넘어, 그 깊숙이 자리 잡은 핵마저 한 번에 부숴버렸다.
그렇게 수십 기의 골렘들은 일제히 움직이며 착실하게 허상괴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런 골렘들의 가장 앞에는 스로우가 있었다.
스로우의 크기는 인간 사이즈에 불과하지만, 그 몸뚱어리는 아다만티움으로 이루어진 골렘이다.
한 방, 한 방의 묵직한 파괴력은 하급 허상괴라 할지라도 일격에 육체가 터져나가고, 핵이 부서지기에 충분했다.
“확실히 골렘이 좋긴 좋아.”
“그렇긴 하죠.”
“원레는 저것도 내가 먹었어야 하는 히든 피스였는데 말이야.”
제로는 수십 기의 골렘을 지휘하며 허상괴들을 학살하는 스로우를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때,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골렘 제작 레시피는 제로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웬 잡것이 먹는 것보단, 스로우가 먹어서 다행이지.”
평범한 유저가 골렘 제작 레시피를 먹었다면, 지금의 스로우처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스로우가 먹었기에 이정도까지 골렘 제작 레시피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스로우를 바라보고 있을까.
스로우가 다루는 골렘들이 어느 정도 허상괴들을 정리하자, 그때서야 제로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음에 휩싸인 제로의 몸뚱어리가 무너지는 순간, 스로우의 등 뒤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타툰 또한 다크 로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림자와 그림자를 뛰어넘어 움직이며 제로의 옆에 멈춰섰다.
“안녕?”
“넌…, 제로?”
스로우는 갑작스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리며 주먹을 내뻗었다.
허나 그러한 스로우의 일격은 제로의 손에 손쉽게 낚아채였으며, 스로우는 뒤늦게 자신이 공격했던 존재가 제로라는 것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내비쳤다.
“넌 서울에 있다고 하지 않았냐?”
“맞아.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에 ‘있었지’.”
제로의 말에 스로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간단히 말해서 널 데리러 왔다고.”
“아…!”
제로의 부연 설명에, 스로우는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낮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싸움의 재능만 보자면, 스로우는 제로와 필적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은 공평하다고 스로우에게 싸움의 재능을 준 대신, 무언가 나사가 하나 빠진듯한 정신 상태마저 쥐여 줬다.
“그나저나 제주도에 나타나 허상괴는 이것으로 끝인가?”
얼빠진 스로우에게서 시선을 돌린 제로가 입을 열었다.
그런 제로의 등 뒤로 거대한 흑골의 창이 쏘아져서 구석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허상괴의 핵을 꿰뚫어 부숴버렸다.
“그럴겁니다, 형님.”
스타툰은 정확히 허상괴의 핵을 꿰뚫어 죽여버리는 모습에 감탄하며 대답했다.
스로우 또한 방금 전 제로가 죽였던 허상괴가 마지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바로 이동하자.”
“제주도는 이대로 냅두는 겁니까?”
“그럴 리가.”
스타툰의 질문에 제로는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허상괴를 처리한 이상, 제주도에 살아가는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제주도를 이대로 방치할 순 없으며, 애초에 제로는 그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리 대신 제주도의 치안을 관리해 줄 플레이어가 있어.”
그러한 말과 함께 제로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에 스타툰과 스로우 또한 자연스레 제로가 응시하는 방향을 바라봤는데, 그곳에는….
“안녕?”
새하얀 가죽 갑옷을 걸치고, 등에는 마찬가지로 새하얀 대궁을 매고 있는 여인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스타툰 또한 잘 알고 있는 유저로, 로스트 월드에서는 신성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로 알려져 있는 플레이어였다.
그녀의 이름은 루나. 흔히 ‘일격필살의 루나’라 알려진 랭커급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설마 네가 제주도에 있을 줄은 몰랐어.”
“잠깐 여행 겸 내려왔거든.”
제로의 말에 루나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루나와 신성 길드의 길드 마스터, 신성은 서로 남매 사이였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신성 대신, 루나가 대외적으로 나서 얼굴마담을 하기도 했다.
그런 루나와 함께, 제주도에서 각성한 신성 길드의 길드원들이 뭉친다면, 허상괴가 다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제주도의 안정은 어느 정도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탁할게.”
“예이, 예이. 넌 빨리 가봐. 안그래도 진혁… 아니, 신성이 널 애타게 찾고 있더라.”
확실히 남매는 남매라는 것일까.
루나는 신성의 알려지지 않은 현실 이름을 언급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런 루나의 말에 제로는 피식 웃으며 몸을 띄웠다.
“그럼 가볼까?”
그 말을 끝으로 제로는 스타툰과 스로우까지 허공에 띄우며, 한 줄기 선이 되어 사라졌다.
* * *
“으음.”
청와대에 깊숙이 자리 잡은 집무실.
그곳에 앉아 있던 대통령이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그런 대통령의 앞에는 신성을 포함해, 서울에 있던 랭커급 유저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아직 플레이어로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에게서 풍기는 힘은 미약했으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들은 로스트 월드에서 다뤘던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한편 신성은 상대가 대통령이기 때문일까.
회귀 전에도 고질적인 문제였던, 플레이어 특유의 비 플레이어를 무시하는 태도 대신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아닐세. 일단 제로가 오면 이야기하도록 하지.”
“내가 오면 뭘?”
신성의 물음에 대답하던 대통령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대통령뿐만이 아니었다.
집무실에 앉아 있던 신성과 나머지 세 명의 랭커급 유저들 또한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제로의 목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왔는가…? 제로.”
대통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제로가 주변을 훑어봤다.
신성 외에도, 이곳에 모여 있는 세 명의 랭커급 유저들은 모두 제로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한 명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거대한 덩치와 근육을 가지고, 등에 두 자루의 배틀 엑스를 매고 있는 유저, 광전사 덴푸라였다.
덴푸라는 ‘이종족’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바바리안이라는 종족을 하고 있었으며, 야만전사리는 직업을 가졌다.
바바리안이라는 종족이 주는 괴력으로 두 자루의 배틀 엑스를 휘두르는 모습은 말 그대로 ‘광전사’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야수왕 백호.
그는 블랙 와이번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걸치고, 허리춤에는 가시가 돋아난 채찍을 매고 있는 여인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뒤에는 이름과 같은 백호 한 마리가 그르렁 거리며 엎드려 있었는데, 그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백호의 직업은 테이머였다.
각종 맹수형 몬스터들을 테이밍해 부리는 그녀의 모습은 ‘야수왕’이라는 칭호와 매우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설마 네가 한국인일 줄은 몰랐어.”
제로의 말에 신성과 덴푸라,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앉아 있는 유저.
그는 뾰족한 귀에, 아름다운 미형의 엘프였다.
엘프는 이종족이긴 해도 그리 희귀하지 않은, 어찌 보면 매우 흔하다 할 수 있는 종족이었다.
그런 엘프 종족을 하고 있는 유저의 이름은 일살.
등에 세계수의 가지와 트윈 헤드 오우거의 힘줄로 만들어진 활을 매고 있는 일살은 유저들로부터 이렇게 불린다.
신궁 일살.
직업은 평범한 궁수였지만, 그의 직업 랭킹은 당당히 1위. 전체 랭킹은 5위에 빛난다.
덴푸라의 랭킹이 122위이고, 백호의 랭킹이 87위다.
허나 그 둘이 합공을 한다 해도, 일살의 옷깃 하나 스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저도 그 유명한 학살자 제로가 한국인일 줄은 몰랐… 아니, 그전에 ‘인간’이 맞으십니까?”
일살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제로의 외형은 국적과 인종을 떠나 같은 ‘인간’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들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종족 플레이어라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변화는 보이지 않기에 일살이 의문을 표하는 것도 다소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일살 뿐만이 아닌 덴푸라와 백호. 그리고 신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에 제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난 인간이 맞아. 아니, 때 인간이었다… 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려나?”
“한때 인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제로의 대답에 일살과 신성을 포함한 모두가 다시 한번 의문을 표했다.
허나 제로는 이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겠다는 듯, 대통령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대통령. 상황은 어때?”
제로의 대통령을 향한 막말과도 같은 그것에 집무실에 있는 모두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제로라지만 상대 또한 하나의 국가를 책임지는 대통령이다. 그런 대통령을 저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것일까?
허나 대통령은 이런 제로의 태도가 익숙하다는 듯, 아무런 불평불만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름 희망적이라네. 자네가 미리 알려준 덕분에 나름 대비를 할 수 있었지. 이곳에 있는 신성 군과 덴푸라 군. 백호 양과 일살 군. 그 외의 많은 플레이어들이 바삐 움직여 준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네.”
“좋아.”
대통령의 말에 제로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미리 정보를 풀고, 대비를 할 시간을 만들어 놓은 보람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회귀 전처럼 현대가 쌓아 올린 모든 기반을 한순간에 잃어버릴 가능성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다만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네.”
“문제?”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대통령에, 제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통령이 따로 ‘문제’라고 말할 정도의 무언가가 있었던가?
대통령의 말마따나 이곳에 있는 랭커급 유저와, 플레이어로 각성한 사람들 덕분에 허상괴는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몇몇 플레이어들이 폭주하기는 했지만 그들 또한 빠른 시간 안에 제압되어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럼에도 문제가 생겼다라….
“그게 뭔데?”
“그것이…, 미국의 대통령이 플레이어게 붙잡히고 백악관이 장악당했다더군.”
…!
대통령의 충격적인 말에, 제로를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확실히 플레이어의 힘을 각성했다면, 평범한 인간으로선 아무리 총화기로 무장했다 한들 막아낼 순 없었다.
그렇기에 몇몇 플레이어들은 그런 힘을 가지고 국가 전복을 꾀하기도 했다.
다만 한국 같은 경우에는 제로와 신성. 그리고 신성 길드에 의해 그러한 의도가 진작에 봉쇄되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미치겠네.”
한편 제로는 뼈로 이루어진 손가락으로 두개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우려하고 있던 일이 발생해 버렸다.
차라리 허상괴의 손에 죽었다면 몰라도, 플레이어에게 한 국가의 대통령이 붙잡혔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상당한 공을 들이고, 각국의 정상들에게 경고를 했던 것인데.
“그래서, 미국 대통령을 억류한 놈팽이는 누구야?”
“이름은 센 다이고. 스스로를 ‘죽음의 왕’이라 칭하는 플레이어더군.”
센 다이고.
죽음의 왕.
그것만으로 제로는 미국 대통령을… 아니, 백악관을 장악한 유저에 대한 정보를 단번에 떠올렸다.
“하필 그놈이냐.”
그 중얼거림에 신성과 일살. 덴푸라와 백호. 마지막으로 대통령의 시선이 일제히 제로를 향해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