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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110화 (110/200)

제110화

“저… 제로 님? 이건 도대체…?”

대통령의 뒤에 서 있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눈앞에 무언가 떠 있다는 듯 허공을 응시했는데, 그 모습에 제로가 입을 열었다.

“플레이어로 각성했다는 증거야.”

“플… 레이어.”

제로의 대답에 다른 한 명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제로는 이미 로스트 월드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존재였기에 알림창이 떠오르지 않았을 뿐, 허상계의 침공이 시작된 지금.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했던 유저들. 그 레벨이 1이든, 100이든. 혹은 마스터 레벨을 넘긴 랭커급 유저이든 상관없이 모두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우선 상황부터 정리하자고.”

그 말을 끝으로 제로는 죽음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남겨진 사람들은 그런 제로가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한편, 청와대에 있던 제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서울 상공이었다.

머리 위에는 공간에 그어져 있던 금이 사라지고,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 너머로 보이는 세계는 천둥 번개가 내리치고, 날카로운 칼날로 이루어진 폭풍이 휘몰아치며 대륙을 집어삼키는 해일이 연신 출렁이는 모습이 드러났다.

제로는 그런 구멍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최하급과 하급. 그리고….”

구멍을 통해 수없이 많은 허상괴들이 지구로 넘어오고 있었다.

지금은 정신체에 불과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허상괴다.

저것들이 지구의 생물에 깃드는 순간, 진정한 재앙이 벌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것뿐이라면 제로가 인상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었다.

제로가 인상을 찌푸린 진짜 이유는….

“설마 처음부터 널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제로는 어느 한 곳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제로의 공허한 눈구멍 속에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사신의 흉안에는 한 괴물의 모습이 비쳐졌다.

그것은 허상괴의 왕과 같이 전신에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로스트 월드의 레드 드래곤 게르슈드리를 연상시키는 붉은 비늘이었으며, 머리에는 산양과도 같은 두 개의 뿔이 돋아나 있었다.

등에는 붉은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는데, 제로는 그러한 모습의 허상괴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적의 군단장, 베드리나.”

적의 군단장, 베드리나.

회귀 전, 제로가 가장 먼저 만났던 최상급 허상괴 중 하나다.

상급 이하의 허상계는 그 강함을 발휘하기 위해 지구의 생물 중 하나의 육체를 차지할 필요가 있었다.

허나 최상급부터는 달랐다.

최상급은 본신의 강함을 발휘하기 위해 따로 육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한 최상급 중 하나인 적의 군단장, 베드리나는 용서할 수 없는 제로의 원수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 전.

제로와 평생을 함께할 것을 약속했던 연인을 죽인 허상괴이기 때문이다.

한편 적의 군단장, 베드리나는 죽음이 뭉쳐 들며 모습을 드러낸 제로를 바라보며 호오! 하는 낮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네놈이로구나. 녹의 선봉장, 제르빌라를 소멸시킨 놈이.”

“맞아.”

베드리나의 말에 제로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놈을 향한 증오와 복수심은 여전히 끓어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망자… 아니, 오버 데스가 된 영향인지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침착했다.

“흐음. 확실히 제르빌라, 그놈이 당할 만하군. 약소 차원의 존재라 하기에는 상당한 강함이야.”

“그래?”

베드리나의 중얼거림에 제로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뻗었다.

흑골로 이루어진 제로의 손이 베드리나를 향해 쫙! 하고 펼쳐지는 순간….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후웅-!

제로의 등 뒤로 거대한 흑골의 창이 만들어지며 베드리나를 향해 쏘아졌다.

기습에 가까운 그 일격은 평범한 유저나 하위 허상괴였다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절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베드리나. 최상급의 허상괴임과 동시에 적의 군단장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괴물이었다.

베드리나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흑골의 창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골의 창이 베드리나에게 근접하는 순간, 흑골의 창은 그의 주변에 피어오른 선홍빛 불꽃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역시.”

그 모습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군단장, 베드리나. 녹의 선봉장 제르빌라가 독을 다루었다면, 그는 불꽃을 다뤘다.

용인족과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이 다루는 불꽃의 온도는 상당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것을 증발시켜 버렸다.

만일 베드리나가 전력을 다한다면 도시 하나쯤은 순식간에 증발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상당히 기쁘네.”

“무엇이 그리 기쁜가? 약소 차원의 존재여.”

제로의 말에 베드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로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힘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베드리나는 여전히 제로를 ‘약소 차원의 존재’라 낮잡아 부르며 무시하고 있었다.

제로는 그런 베드리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최상급 허상괴가 너라서 말이야.”

크르르-!

컹컹!

말을 마친 제로가 손을 까딱이자, 등 뒤로 공간이 갈라지며 외차원의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외차원의 창고에선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세 개의 머리를 가진 망자, 명왕의 번견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서 물어뜯어 버려.”

컹! 컹!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왕의 번견이 달려들었다.

허공을 박차며 움직이는 명왕의 번견은 순식간에 베드리나의 앞에 도착해 앞발을 휘둘렀다.

오우거조차 일격에 즉사시켜 버리는 거력을 품은 명왕의 번견의 앞발이 베드리나의 전신을 강타하려는 순간, 베드리나의 두 눈동자가 명왕의 번견을 응시했다.

그와 동시에….

화륵-!

베드리나의 선홍빛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명왕의 번견의 앞발이 불꽃에 휩싸였다.

명왕의 번견 자체가 망자이면서도 명계의 냉기를 품고 있기에, 평범한 불꽃으로는 털끝 하나 태우기도, 그을림 하나 만들어 내기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리나가 일으킨 불꽃은 그러한 명왕의 번견의 앞발을 집어삼키며, 한 줌의 가루로 만들었다.

크륵!

앞발을 잃었음에도 명왕의 번견의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렇게 명왕의 번견이 남은 앞발을 다시 휘두르려는 찰나…

“그만. 돌아와.”

등 뒤에서 떨어지는 제로의 명령에 명왕의 번견이 낑낑거리며 제로의 등 뒤로 이동했다.

“꽤 쓸 만한 개새끼로군.”

베드리나는 명령대로 움직이는 명왕의 번견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편 제로는 명왕의 번견의 육신을 불태우는 베드리나의 불꽃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 정도의 위력이라면….’

지금 꺼낼 수 있는 망자들 중, 베드리나의 불꽃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없다.

괜히 망자들을 꺼냈다간 불필요한 소모로만 이어질 뿐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생각을 정리한 제로가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제로의 오른손에 쥐어진 네크로노미콘이 짙은 죽음에 휩싸이며 거대한 대검, 망자의 폭거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쾅-!

말을 마친 제로의 발밑으로 죽음이 폭발했다.

폭발하는 죽음을 통해 가속도를 얻은 제로는 순식간에 베드리나의 앞에 도착했다.

“흠.”

화륵-!

베드리나는 순식간에 나타난 제로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낮은 울림을 토해 낸 베드리나는 제로를 응시하며 불꽃을 피어올렸을 뿐.

“소용없어.”

베드리나가 피어올린 불꽃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제로를 덮쳤다.

허나 소용없었다.

베드리나의 불꽃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모든 것이 증발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제로는 전신에 죽음을 두르는 것으로 불꽃을 막아 냈다.

그와 동시에….

“죽어.”

후웅-!

제로의 손에 쥐어진 망자의 폭거가 휘둘러졌다.

묵직한 파공음을 동반하며 휘둘러지는 그것에는 산조차 부숴 버리는 거력이 담겨 있었다. 그러한 망자의 폭거가 자신의 핵을 노리며 다가오자 베드리나의 인상이 미약하게나마 찌푸려졌다.

“약소 차원의 존재 따위가…!”

화르륵-!

망자의 폭거가 닿기 직전, 베드리나의 육체가 불꽃으로 승화하며 사라졌다.

제로가 휘두른 망자의 폭거는 베드리나가 있던 허공을 허망하게 가를 뿐이었고, 그에 제로의 인상 또한 찌푸려졌다.

“까다롭-!”

“죽어라, 약소 차원의 존재여.”

화르륵-!

뭐라 중얼거리던 제로의 등 뒤로 화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에 등 뒤를 돌아본 제로의 시선에 들어선 것은 불꽃으로 이루어진 수백, 수천의 화살들이었다.

화살 하나, 하나에서 풍겨 나오는 열기는 방금 전 명왕의 번견의 앞발을 집어삼켜 버렸던 불꽃 그 이상의 열기를 풍기고 있었다.

“거슬리게.”

스킬 발동, 사신의 시선.

번쩍-!

수천 개의 화살이 일제히 쏟아지는 순간, 제로의 등 뒤로 붉은 흉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로의 공허한 오른쪽 눈구멍에 데굴거리는 사신의 흉안과 비슷한 형태의 그것이 안광을 토해 내는 순간.

제로를 향해 쏟아지던, 수천 개의 불꽃의 화살이 일제히 얼어붙으며 박살이 나 버렸다.

“칫.”

베드리나는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던 기습이 허무하게 막히자 혀를 차며 움직였다.

육체가 불꽃으로 승화화한 그것이 한줄기 선이 되어 움직일 때마다, 그것이 지나친 자리에 있던 모든 것들이 증발하며 사라졌다.

그것은 대기를 부유하고 있는 산소라 하더라도 다르지 않았다.

한편, 갑작스러운 허상괴의 등장에 당황하며 도망치던 사람들은 머리 위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전투에 눈을 떼지 못했다.

제로와 적의 군단장 베드리나의 전투는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혹은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전투였다.

허공에 적색 선이 그어지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증발한다.

허공에 잿빛의 선이 그어지는 순간,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한 두 색의 선이 교차라도 하면, 사방으로 거대한 충격이 휘몰아치기도 했다.

그러한 전투를 과연 누가 지켜보지 않고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으아아아악-!

제로와 베드리나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와중, 어디선가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에 사람들의 시선이 비명의 근원지로 움직였다. 그런 그들의 두 눈에 비쳐진 것은….

“괴, 괴물이다!”

끔찍한 괴물의 모습이었다.

어떤 것은 개의 형상을, 어떤 것은 고양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평범했던 쥐가 수백 배 거대해지고, 흉폭화된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러한 괴물, 최하급과 하급 허상괴의 등장에 대다수의 사람이 도망치기 바빴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역으로 허상괴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그들은 마치 로스트 월드라는 이름의 게임에서나 볼 법한 복장을 하고, 한 손에는 검이나 창, 도끼 따위의 무기를 쥐고 있었다.

“모조리 죽여 버려!”

“크하하!”

“이거 기분 죽이는데!”

그들은 허상괴의 침공이 시작된 직후, 눈앞에 알림창이 떠오르며 로스트 월드의 힘을 각성한 플레이어들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처음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얼추 적응을 끝내는 순간, 날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극히 평범했던 사람이, 특별한 힘에 눈을 뜬 순간 내비칠 수 있는 모습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허상괴의 존재. 그리고 그들과 벌어지게 될 전쟁에 관해 알고 있던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뭉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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