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크아아아-!]
제로의 앞으로 본 드래곤과 흡사한 무언가가 포효를 내질렀다.
그것이 본 드래곤과 다른 점은 3가지였다.
하나는 육체를 이루는 뼈가 하얀색이 아닌, 어둠을 품은 듯 검게 물들어 있다는 것.
하나는 두개골의 공허한 눈구멍에 검은 귀화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
하나는 제로와 마찬가지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혈관이 전신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왕좌에 앉아 있던 제로가 그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사룡 덴드로?”
사룡 덴드로.
명계의 파수꾼이라 불리는 드래곤이자, 제로의 가슴에 박힌 심장의 주인이기도 한 존재.
제로가 심장을 온전히 본인의 것으로 만든 순간, 지배하고. 사역하며 소환할 수 있게 된 존재이기도 했다.
[어때? 꽤 쓸 만해 보이지?]
“이것과 내가 지배하고 있는 본 드래곤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제로의 질문에 죽음이 침묵했다.
평범한 본 드래곤… 아니, 애초에 본 드래곤 또한 최상위 언데드로 상당한 강함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사룡 덴드로의 강함과 비교하기에는 태양 앞의 반딧불이에 불과했다.
한편 제로는 침묵하는 죽음에 커험! 하며 헛기침을 터트렸다.
스스로가 질문을 던졌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사룡 덴드로와 본 드래곤의 강함은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던 것이다.
“농담이야, 농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실없는 질문을 무마한 제로가 왕좌 깊숙이 몸을 뉘었다.
이제….
“뭘 해야 되지.”
잿빛 마탑의 신물, 죽음의 심장. 아니, 사룡 덴드로의 심장을 황궁에서 회수함으로써 잿빛 마탑의 생존자들의 영원한 충성을 받아냈다.
비록 자아는 존재하지 않을지언정, 허상계와의 전쟁 때 그들을 소환해 장기 말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동서남북에 자리 잡은 언데드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지배권을 획득해 죽음의 땅의 온전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 외에도 사룡 덴드로의 심장을 받아들여 한층 더 강해지기도 했으며, 기타 등등 얼추 해야 할 일은 다 끝냈다.
10강의 주도하에 유저들 또한 한층 더 성장하는 것에 박차를 가했다.
비록 평범한 유저들은 허상계의 침입을 모르고 있지만, 이 정도 했으면 얼추 그들과의 전쟁에 충분한 대비를 했다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뭔가 찜찜하단 말이지.”
제로가 두개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무언가,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화장실을 사용하고 뒤를 닦지 않은 듯한 찜찜함을 유발했다.
제로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소환된 사룡 덴드로는 분위기조차 읽지 못하고 제로에게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제로가 아! 하며 낮은 탄식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났다.”
불쾌감마저 유발하는 찜찜함의 원인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제로의 신형이 죽음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시발, 오긴 오는 거야?
벌써 며칠째 뺑이치고 있는 거냐.
지가 아무리 학살자 제로라지만 이따구로 해도 되는 거야, 뭐야?
범죄 도시 루파의 정중앙에 위치한 분수대.
그 앞에 무수히 많은 유저가 모여 불평불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렇게 모인 유저들 중 대다수는 인간 플레이어였지만, 적지 않은 숫자는 이종족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그들 모두가 한가락 하는 유저들로, 하나같이 PK를 통해 강함을 쌓아 올린 유저들이기도 했다.
PK를 업으로 삼은 만큼 대다수의 유저가 내로라하는 강함을 자랑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온갖 곳에서 현상금이 걸려 버렸다.
그렇기에 그들은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는데, 그런 그들이 루파의 중앙 광장에 모여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학살자 제로.
로스트 월드 최강의 유저이자, 최악의 PK유저이기도 한 존재.
그 제로의 이름으로 로스트 월드 공식 사이트에 올라온 하나의 글 때문이었다.
그 글은 단순했다.
X월 X일.
XX시 XX분.
자신과 싸워 이긴 유저는 ‘학살자 제로’의 이름을 걸고 10강과 거래해 현상금을 풀어 주겠다.
그 외에도 강력한 히든 클래스의 정보. 그 외에도 온갖 히든 피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단, 만일 패배하게 된다면 자신의 밑에 들어와야 한다.
글의 내용은 이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무수히 많은 PK유저들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한편, 제로의 말대로 글을 올려 PK유저들을 끌어모은 스타툰은 구석에서 광장을 지켜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형님! 도대체 언제 오시는 겁니까!”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저들의 불만은 폭발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스타툰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폭동과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그렇기에 스타툰은 제로가 1분, 1초라도 더 빨리 이곳에 와 줬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었다.
한편, 그런 스타툰을 지켜보고 있던 켄달은 한심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그렇게 걱정이면 귓말이라도 해 보지, 그래?”
“친추 안 돼 있어.”
켄달의 지적에 스타툰이 절망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그렇게 친추라도 하자고 사정을 했음에도 제로는 자신의 친구 추가를 받아 주지 않았다.
만일 친추가 되어 있어, 귓말이라도 보낼 수 있다면 상황이 이 정도로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스타툰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중앙 광장에 모여 있던 유저들이 돌연 침묵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늘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에 스타툰과 켄달의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도대체 뭐…! 혀, 형님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돌연 일그러지며, 짙은 죽음이 뭉치더니 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골로 이루어진 육체와 죽음을 두르고 있음에도, 특이하게 사제복을 걸치고 있는 리치.
역 십자가가 새겨진 사제복 위에는 삐죽삐죽한 칼날이 치솟은 로브를 걸치고, 한 손에는 그로테스크함의 정점인 네크로노미콘을 쥐고 있다.
그러한 복장을 할 수 있는 유저는 로스트 월드 내에서 단 한 명, 오직 학살자 제로뿐이었다.
늦었잖아!
며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아?
니가 먼저 시간을 정했으면 좀 지키라고!
갑작스러운 제로의 등장에 침묵하고 있던 유저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몇몇 유저들은 제로를 향해 무언가를 투척하거나, 스킬마저 사용하기도 했다.
허나 그들의 공격 아닌 공격은 제로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죽음에 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편,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제로는 발밑에 모여 있는 유저들에 음음! 하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좀 늦어서 미안.”
실없는 인사를 내뱉은 제로가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그렇게 제로가 내려서자,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유저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며 자그마한 공간을 만들었다.
그들 또한 어째서 자신들이 제로에게서 멀어진 것인지, 어째서 자신들이 물러선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한편, 그렇게 제로가 내려온 순간….
“형님!”
제로의 그림자로부터 스타툰이 모습을 드러내며 버럭 외쳤다.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어요!”
“미안해.”
스타툰의 불평불만에 제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제로의 공허한 오른쪽 눈구멍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사신의 흉안이 모여 있는 유저들을 훑어봤다.
“확실히 하나같이 강해 보이긴 하네.”
이곳에 모여 있는 유저들의 숫자는 정확히 231명.
평균 레벨은 400 정도 될 것이다.
이들을 하나로 규합할 수 있다면, 허상계에 대적하는 훌륭한 집단이 하나 탄생하게 된다.
물론….
‘하나같이 거친 놈들뿐이야. 쉽사리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겠지.’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허나 상관없다.
애초에 제로 또한 그들이 순순히 자신의 밑에 들어올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스타툰을 시켜, 로스트 월드 공식 사이트에 그러한 글을 올리게 한 것이다.
“우선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할게.”
제로의 말에 유저들이 술렁였다.
그 제로가. 학살자라 불리는 제로가. 수틀리면 저레벨 유저든, 고레벨 유저든. 혹은 상대가 10강에 속해 있는 유저든 상관없이 죽여 버리는 그 제로가 사과를 한다.
만일 이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재미없는 농담으로 치부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한편 제로는 유저들이 술렁이든 말든,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후딱후딱 시작하도록 하지. 룰은 간단해. 혼자서 덤비든, 단체로 덤비든 상관없어. 날 이긴다면… 아니, 나에게 단 한 번의 공격이라도 성공한다면 약속대로 너희들에게 걸려 있는 모든 현상금을 지워 주고, 온갖 히든 피스에 관한 정보들을 제공할 거야.”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유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허리춤에 두 자루의 검을 매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알아본 몇몇 유저들이 술렁였다.
“다 좋다 이거야. 또한 네 이름값이면 10강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에게 걸린 현상금을 철회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말이야. 네가 제공한다는 히든 피스. 그게 진짜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지?”
쌍검 유저의 말에 나머지가 맞아 맞아! 라며 동의했다.
그에 제로는 스타툰을 바라봤고, 그러한 시선에 스타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놈의 이름은 스타툰. 옛날에는 별 볼 일 없는 좀도둑에 불과했어.”
스타툰?
너 들어 봤냐?
아니? 넌?
나도 모르는 이름인데.
갑작스러운 스타툰의 등장에 유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다크 로드가 되기 전에는 평범한 좀도둑으로. 다크 로드가 된 이후에는 강해지기 위해 레벨을 올리느라 명성을 떨치지 않았으니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도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이놈은 내가 제공한 히든 피스를 토대로 다크 로드라는 직업으로 전직했지. 그 직업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로스트 월드 세계관에서 과거 유명했던 NPC의 유지를 이어받은 직업이야. 그 NPC의 이름은….”
“어쌔신 마스터이자 대도라 불리었던 예이안이죠.”
제로의 말을 스타툰이 이어받아 말했다.
그러한 스타툰의 말에 몇몇 유저들. 특히나 어쌔신 계열 유저들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 또한 예이안의 전설을 듣고, 그에 관련된 직업을 찾아봤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기에 포기했었는데…, 설마하니 그 예이안의 유지를 이어받은 유저가 이렇게 뜬금없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한편 제로는 스타툰을 지나쳐, 어딘가를 바라봤는데.
그곳에는 제로를 통해 죽음의 추적자. 아니, 이제는 ‘죽음의 눈동자’라는 다소 특이한 이름을 가진 직업으로 전직한 켄달이 자리 잡았다.
“저놈의 이름은 켄달. 날 통해 죽음의 눈동자라는 직업으로 전직한 유저지.”
제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유저들의 시선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렇게 다수의 유저의 시선을 한몸에 받자, 켄달이 하하! 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정도면 얼추 증명은 끝났을 거라 생각하는데…, 어때?”
“흠.”
이어진 제로의 말에 쌍검 유저가 낮은 울림을 토해 냈다.
확실히 스타툰도 그렇고, 검은 활을 메고 있는 켄달이라는 유저도 그렇고,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좋아, 네 말을 믿어 보도록 하지. 그래서 언제 시작하면 되는 거지?”
“시작은….”
쌍검 유저의 말에 제로가 뒷말을 흐리며 네크로노미콘을 들어 올렸다.
“바로 시작하자.”
스킬 발동, 외차원의 창고.
스킬 발동, 콜 데스 나이트 킹.
스킬 발동, 콜 스켈레톤 엠페러.
스킬 발동, 콜 퀸 레이스
스킬 발동, 콜 본 드래곤.
하늘 높이 떠오른 제로의 등 뒤로 죽음의 땅에서 사역한 네 마리의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