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이… 럴수가….]
사신의 단죄에 핵이 잘려 나간 제르빌라가 짧은 단말마와 함께 사라졌다.
육체를 버리고 온전한 정신체가 되어 버린 제르빌라는 핵이 사라지자, 그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걸로 어느 정도 정리는 됐네.”
강한. 아니, 이제는 ‘제로’의 이름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제로는 주변을 에워싼 죽음의 구체를 회수하며 밑을 내려다봤다.
밑에는 제로가 미리 소환했던 망자들이 최하급 허상괴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최하급 허상괴들은 제르빌라가 살아 있을 땐, 그 영향을 받아 처리하기 까다로웠다.
제르빌라는 괜히 ‘녹의 선봉장’이라는 이명을 가진 게 아니라는 듯, 자신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허상괴들의 공격에도 맹독의 성질을 가지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제르빌라가 사라진 지금, 그 특성을 잃어버린 최하급 허상괴들은 순식간에 썰려 나갈 뿐이다.
한편, 그렇게 제르빌라를 처리한 제로가 바닥에 내려서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흑골의 모습으로, 겉에는 역 십자가가 새겨진 칠흑의 사제복과, 날카로운 칼날이 삐죽삐죽 돋아난 사신의 옷자락. 마지막으로 한 손에 기괴한 외형의 네크로노미콘을 쥐고 있는 제로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진짜 학살자 제로야.
10강에서 공표한 말이 사실이었구나.
근데 다른 이종족 플레이어들도 현실에서 로월의 종족이 되는 걸까?
누군가는 로스트 월드 최고의 유명 인사나 다름없는 제로를 현실에서 봤다는 것에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누군가는 10강에서 발표한, 허상괴들에 대한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누군가는 제로와 마찬가지로, 로스트 월드 안에서 이종족으로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 또한 제로처럼 현실에서도 이종족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제로가 수많은 사람 사이에 파묻혀 있을 때, 그들을 헤치고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양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을 본 순간 제로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저들은 대통령이 자신을 찾기 위해 파견한 요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제로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알려 주듯 그들은 제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학살….”
“제로라고 불러.”
“예, 제로 님. 잠시 시간 되십니까?”
요원 중 한 명의 말을 제로가 정정했다.
굳이 현실에서까지 ‘학살자’라는 다소 중2병 넘치는 이명을 듣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또한 제로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해도,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가명이요, 외형 또한 흑골의 리치 그 자체였다.
무엇 하나 자신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그 뒤를 캐내거나 신상을 알아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왜? 대통령이 날 찾아?”
“크흠.”
제로의 말에 대표로 앞에 나왔던 요원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들의 입장에선 직속 상사나 다름없는 대통령을 마치 친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말하는 제로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허나 그들의 입장에서 제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특히나 그 신상조차 모르는 제로가 다른 나라로 넘어간다면, 자신들은 허상괴라 불리는 괴물에 관한 정보를 얻을 방법이 사라진다.
아니, 그 이상으로 제로라는 존재의 강함을 생각해 본다면, 반드시 대한민국에 붙잡아 둬야 하는 존재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제로는, 자신의 말에 불편해하면서도 딱히 뭐라 반박하지 못하는 요원들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내해. 어차피 나도 만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깐.”
녹의 선봉장, 제르빌라의 등장이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언제 허상계의 본진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특히나 이 상태라면, 허상괴들이 본격적으로 쳐들어와도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한국은 자신이 미리 경고를 했기에, 어느 정도 대응 세력이 갖추어졌을 뿐. 대다수의 나라는 허상괴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 그리고 대통령에게 미리 연락해서 각국의 정상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준비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한 제로의 말에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반갑네, 제로 군.”
대통령이 기거하는 푸른 집, 청와대.
그곳에 도착하기 무섭게 대통령이 환한 미소로 제로를 맞이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제로가 직접 청와대를 찾아왔으니, 대통령이 느끼는 기쁨의 크기는 상당했다.
다만, 제로를 환영하는 대통령과는 다르게, 그런 제로를 불편해하고 못마땅해하는 사람 또한 존재했다.
‘아무리 제로가 대단하다지만, 어차피 현실에서는 거기서 거기 아니야?’
대통령의 등 뒤에서 제로를 바라보던 한 청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랭킹으로 따지자면 10,000위권에 겨우 턱걸이로 들어가는, 별 볼 일 없는 유저 중 한 명이었다.
다만,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로스트 월드의 힘을 일깨웠으며, 그 힘으로 최하급 허상괴와 싸우는 모습을 들켜 스카웃이 되었을 뿐이다.
그는 현실에서도, 로스트 월드 내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다만, 그럼에도 로스트 월드에서의 힘을 약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기 때문일까.
그의 자존심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것이 제아무리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가 ‘학살자’로 불리며 유명세를 떨치는 제로라 할지라도.
그러한 청년의 시기, 불쾌, 질투 어린 시선을 제로 또한 눈치챘다.
‘아무래도 내가 싫은 모양이네.’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런 류의 인간은 회귀 전에도 있었다.
아니, 그나마 회귀 전의 케이스가 양반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적어도 한날한시에, 동시에 사람들이 로스트 월드의 힘을 각성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시간차를 두고 각성하지 않았기에, 적어도 저놈처럼 ‘자신만이 선택받은 사람이다’라는 마인드를 가진 놈들은 몇 없었다.
그마저도 괴물 같은 랭커들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로와 청년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하하! 하고 웃으며 제로를 안내했다.
“일단 밥부터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눕….”
“아, 미안. 나 음식 같은 거 못 먹거든.”
대통령의 제안에 제로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제르빌라를 상대하면서 치른 대가. 아니, 그것을 대가라고 칭해도 되는 것일까?
사신의 단죄를 사용한 부작용으로 제로의 육신은 너무 많은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제로는 인간의 육신에서, 로스트 월드로 따지자면 망자의 육신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의태의 반지나 아바타 마법 따위가 있으면 몰라도, 그러한 것들이 없는 지금의 육체는 말 그대로 ‘뼈’일 뿐이다.
무언가를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불가능했다.
겉으로는 역천의 의복과 사신의 옷자락으로 가려져 있기에,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대통령은 한껏 당황한 표정을 내비쳤다.
“이거, 미안하구먼. 그, 그럼 바로 이동하도록 합세.”
대통령의 말에 제로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제로가 미리 언급한, 각국의 정상을 만나는 것 또한 중요했지만, 지금은….
“잠시 교육 좀 하고 시작해도 될까?”
제로는 대통령의 뒤에서, 여전히 자신에게 불쾌, 시기, 질투 따위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청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별 힘도 가지지 못한, 전쟁이 시작되면 제멋대로 날뛰다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 나자빠지는 버러지 같은 놈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너도 내 힘을 보고 싶을 거 아니야.”
그러한 제로의 말에 대통령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후회 안 하겠냐?”
청와대 뒤편의 공터.
그곳의 중앙에 멈춰 선 청년이 우득-!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풀며 입을 열었다.
그런 청년의 표정은 자신감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그것은 상대가 제아무리 ‘학살자 제로’라 하더라도 승리할 수 있다는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이었다.
한편 대통령은 그런 청년과 제로 사이에 피어오르는 복잡미묘한 무언가에 불안한 표정을 내비쳤다.
“금방 끝내자. 내가 시간이 얼마 없거든.”
“하! 네놈만 로스트 월드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난 그 누구보다 빠르게 힘을 각성했다! 네놈같이 이름값만 높은…!”
퍼억-!
제로를 향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치던 청년이 돌연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청년이 서 있던 자리의 땅이 터져 나갔다.
“응? 뭐라고?”
설마 제로가 기습을 가할 줄은 몰랐던 것일까?
청년은 로브에 가려져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기색을 물씬 풍기는 제로에 으득! 이를 갈았다.
“네놈…!”
스릉-!
청년이 으득! 이를 갈며 허리춤에 매어진 검을 뽑아 쥐었다.
그가 뽑아 쥔 검의 검신에는 푸른 뇌전이 파지직거리고 있었다.
“죽여 주마.”
뇌전이 깃든 검을 앞세우며 청년이 움직였다.
그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딛고 있던 대지가 터져 나갔는데, 그것은 3차 전직을 마친 전사 계열 유저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스킬, 파워 스텝이었다.
파워 스텝은 이동 속도와 공격 속도를 소폭 올려 주는 스킬로, 대다수의 전사 계열 유저들이 애용하는 스킬 중 하나였다.
특히나 파워 스텝은 숙련도가 쌓이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기술로 업그레이드되거나, 파생 스킬들이 다양하게 생겨났다.
“레벨은 300 정도인가. 고작 이 정도로 그렇게 자신만만 했던 거냐?”
“뒈져!”
제로의 비아냥에 청년이 버럭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한 청년이 휘두르는 검에는 뇌전 외에도 푸른 마나가 깃들었는데….
‘파워 어택이라, 단순하네.’
제로는 상대가 어떤 스킬을 사용했는지 한눈에 꿰뚫어 봤다.
그런 상대가 사용한 스킬, 파워 어택은 막 전사로 전직하면 익힐 수 있는 스킬로, 단순히 공격력을 증폭시키는 스킬에 불과했다.
물론 로스트 월드에서는 있으나 마나 한 스킬이라도 현실에서는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아.”
제로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청년의 검과 충돌했다.
뇌전과 마나가 깃든 청년의 검은 제로의 목을 노리며 휘둘러졌으나….
카가각-!
기묘한 소리와 함께 청년의 검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청년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분명 제로의 목을 베었다고 생각했으나, 단단한 무언가에 검이 막혀 버렸다.
특히나 그 충돌로, 상당한 반발력과 충격이 검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그에 검을 쥐고 있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뚝! 뚝! 흘러내렸다.
“이상하지? 분명 스킬은 제대로 발동했는데 내 목을 베어 버리지 못한 게 말이야.”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가 죽음의 옷자락의 후드를 벗어 재꼈다.
푹 눌러 쓴 후드를 젖히자, 숨겨져 있던 제로의 얼굴이 드러났고 그에 대통령은 물론. 제로와 싸우고 있던 청년마저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후드에 가려져 있던 것은 죽음이었다.
심연을 품은 듯, 검게 물들어 있는 해골의 공허한 눈구멍 중 하나에는 흉흉한 안광을 뿜어내는 붉은 흉안이 데굴거렸다.
나머지 하나에는 푸른 귀화가 피어올랐다.
머리 위에는 새하얀 뼈로 만들어진 왕관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 모습은, 평범한 인간들의 공포심을 부추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은 제로가 이종족 플레이어. 그것도 리치라고 알고 있던 청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괴… 물….”
“괴물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좀 섭섭한데?”
청년의 중얼거림에 씨익 웃으며 말한 제로가 손을 들어 올렸다.
“뭐, 죽이지는 않을게. 약하긴 해도 전쟁에선 필요한 힘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