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하는 네크로맨서-97화 (97/200)

제97화

“게르… 슈드리 님….”

“넌 돌아가서 쉬고 있어.”

다크 엘프의 모습으로 돌아가, 힘겹게 입을 여는 엘로우에 게르슈드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엘로우가 환한 빛에 집어삼켜지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편 제로는 갑작스러운 게르슈드리의 개입에 흥이 깨졌다는 듯, 사신화를 풀었다.

“네가 이겼어.”

휘익.

툭.

게르슈드리가 흑골의 리치의 모습으로 돌아간 제로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허공을 부유하다 제로의 발밑에 떨어진 그것은 검게 번들거리는 광물이었는데, 그것은 최상위 광물 중 하나인 아다만티움이었다.

제로는 자신의 발밑에 떨어진 아다만티움을 주워들며 입을 열었다.

“네 가디언이 털린 게 그렇게 불만이냐?”

피식 웃으며 말하는 제로에 게르슈드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로의 말 대로 자신의 가디언이 한낱 언데드에게 패배했다는 것으로 자존심에 상당히 금이 가 버렸다.

“그만 내 영역에서 사라져.”

파앗-!

그 말을 끝으로 게르슈드리는 엘로우처럼 환한 빛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제로는 제 할 말만 내뱉고 사라지는 게르슈드리에 다시 한번 피식, 웃음을 흘리며 스로우를 바라봤다.

“여기 있다. 거래는 잊지 마라?”

끄덕.

아다만티움을 던지며 말하는 제로에 스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드워프들.”

“무언가…?”

갑작스런 제로의 부름에 드워프 중 검은 망치 부족의 족장이 대표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오늘 진 빚은 잊지 말라고.”

그 말을 끝으로 제로 또한 게르슈드리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로우와 드워프들은 사라진 제로가 서 있던 자리를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 * *

그렇게 드래곤 산맥에서 사라진 제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죽음의 땅.

개중에서도 아크 리치를 죽이고 소유권을 가져온 망자의 거성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홀이었다.

망자의 거성은 현재 네크로맨서들에 의해 착실히 새로운 잿빛 마탑으로 개조되고 있었다.

“빡시네.”

홀에 자리 잡은 뼈의 옥좌에 앉은 제로가 중얼거렸다.

10강의 길드 마스터들과의 만남 이후, 스타툰과 켄달을 포함한 6인방과의 만남.

그리고 바로 드래곤 산맥으로 이동해서 벌인 전투 등등까지.

쉴 틈 없이 움직였기 때문일까, 제로는 육체적인 피로는 별로 느끼지 못했으나 상당한 정신적인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미적거리고 있을 틈은 없는데 말이지.”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멀게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은 랭커급 유저들. 혹은 이종족 플레이어들을 만나야 했으며.

가깝게는 아직 지배권을 획득하지 못한, 죽음의 땅 곳곳에 남아 있는 고위 언데드들을 제압해야 했다.

개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과거에 비해 한없이 약해진 네크로맨서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야 했으며.

아직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잿빛 마탑의 마탑주 자리를 인정받아야 했다.

제로의 강력한 힘을 직접 목격한 네크로맨서들은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것이 잿빛 마탑의 마탑주 자리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식으로 잿빛 마탑의 마탑주가 되기 위해선 네크로맨서들의 충성 또한 필요했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탑주의 신물을 획득해야 했다.

그 두 가지가 합쳐져야 로스트 월드의 시스템상, ‘정식 잿빛 마탑의 마탑주’가 된다.

뭐, 탑주의 신물이 있는 위치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지만 말이야.’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대 마탑주는 제국의 추격으로부터 네크로맨서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그 와중에 분실된 탑주의 신물은 높은 확률로 제국 쪽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만일 유저들 중 한 명이 그것을 입수했다면 진작에 경매장에 매물로 올라왔을 터이니, 유저들이 입수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 전에 일단….

“언데드들의 지배권부터 획득하자.”

죽음의 땅에는 아직 제로가 지배권을 획득하지 못한 언데드가 넷 남아 있다.

하나는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경지를 드높여 모든 죽음의 기사들의 왕이 된 데스 나이트 킹.

하나는 제로가 소유한 반쪽짜리 더미가 아닌, 진짜배기 본 드래곤.

하나는 모든 뼈의 지배자, 스켈레톤 엠페러.

하나는 영체형 언데드들의 여왕, 퀸 레이스.

이렇게 넷이 각기 망자의 거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을 제압해 지배권을 획득해야만 제로는 진정한 의미의 죽음의 땅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하나하나의 강함은 아크 리치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그럼에도 최상위 랭커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 할 수 있는 언데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제로는 그러한 네 마리의 언데드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떤 것을 가장 먼저 지배할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제로는 결정했다는 듯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역시 처음은 그거지.”

씨익 웃어 보이는 제로의 신형이 짙은 죽음에 휩싸이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여기가 용들의 무덤인가? 이름 그대로의 풍경이네.”

망자의 거성에서 사라진 제로가 나타난 장소는 죽음의 땅 북쪽에 자리 잡은 용들의 무덤이었다.

주변의 풍경은 용들의 무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곳곳에 뼈로 이루어진 드래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러한 드래곤의 시체를 이용해 망자를 만들 순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배경을 메우기 위한 오브젝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용들의 무덤에 존재하는 몬스터는 단 하나.

제로가 첫 번째 목표로 정했던 진짜배기 본 드래곤이었다.

그렇게 제로가 모습을 드러내자, 용들의 무덤 깊숙이에서 쿵! 쿵! 하는 땅 울림이 느껴졌다.

“내 존재를 눈치챘나 보네.”

제로의 중얼거림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본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의 크기는 제로가 지금까지 만나 왔던 그 어떤 몬스터보다, 그리고 회귀 전에 상대했던 허상괴들보다 거대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만 20m를 훌쩍 넘은 그것은, 뼈밖에 남아 있지 않음에도 상당한 위압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어디 보자…, 설정상 본 드래곤의 레벨이 780 정도였지, 아마?”

제로는 자신을 향해 ‘크르르….’ 하며 낮은 울림을 토해내는 본 드래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지금의 제로는 로스트 월드 속 존재들의 강함을 단순한 숫자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로는….

“내가 질 거 같지는 않단 말이지.”

드래곤 산맥에서 상대했던 드레이크 그 이상의 위압감을 뿜어내는 본 드래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후웅-!

콰앙!

제로의 등 뒤에 만들어진 거대한 흑골의 창이 쏘아지며 본 드래곤의 안면을 강타했다.

죽음의 땅 동서남북에 위치한 언데드들의 지배권을 획득하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매우 단순했다.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눌러, 상대가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다만 ‘죽이는 것’이 아닌, ‘제압’하는 것이기에 다른 유저들에게는 상당한 난이도로 적용될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의 제로에겐 그저 손가락을 하나 피느냐, 두 개 피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크아아아아악-!]

제로가 쏘아 낸 데스 본 스피어에 얻어맞은 본 드래곤이 괴성을 내지르며 움직였다.

본 드래곤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쿵! 쿵! 하는 땅 울림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그냥 얌전히 복종해.”

스킬 발동, 명왕의 손아귀.

콰직-!

달려드는 본 드래곤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지며 뼈의 손이 튀어나왔다.

명계의 냉기를 품은 거대한 뼈의 손은 망설임 없이 본 드래곤을 낚아챘다.

아니, 낚아채려 했다.

막 명왕의 손아귀가 본 드래곤을 붙잡으려는 순간….

[크아악-!]

본 드래곤이 포효를 터트리며 한쪽 발을 내리찍었다.

본 드래곤의 단단하면서도 거대한 발과 충돌한 명왕의 손아귀는 그 이름값조차 하지 못한 채 산산이 부서지며 사라졌다.

“스로우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명왕의 손아귀가 그렇게 무른 건가?”

제로가 허탈한 웃음을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스킬 명에 ‘명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스로우의 일격에도 그렇고. 본 드래곤의 일격에도 그렇고.

요즘 들어 너무 손쉽게 박살 나 버리는 모습을 내비쳤다.

뭐, 그래도….

“딱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조용히 중얼거린 제로가 다시 한번 마법을 발동했다.

스킬 발동, 명계의 사슬.

촤르륵-!

제로의 발밑으로 수십 개의 사슬이 튀어나왔다.

사슬의 단단함은 명왕의 손아귀 그 이상이며, 사슬 자체에도 명계의 냉기를 품고 있기에 무언가를 구속할 때 제격이었다.

그렇게 튀어나온 수십 개의 사슬은 망설임 없이 본 드래곤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에 본 드래곤은 멈춰 서며 입을 쩍! 벌렸다.

“설마? 아니지?”

그 모습에 불안함을 느낀 제로가 중얼거렸다.

허나 그러한 제로의 불안함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크아아악-!]

다가오는 명계의 사슬을 향해 쩍 벌어진 본 드래곤의 입에서 산성과 어둠의 복합 속성을 가진 브레스가 뿜어졌다.

명계의 사슬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어둠 속성의 특성과,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산성 속성의 특성을 동시에 지닌 브레스에 뒤덮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 미치겠네. 꼴에 본 드래곤도 드래곤이다, 이건가?”

제로가 허망한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와이번의 뼈를 이용해 만들어 낸 가짜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나름 쉽게 쉽게 가려 했는데, 안 되겠네.”

쯧! 혀를 찬 제로의 몸에서 짙은 죽음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상대는 본 드래곤이다.

죽음의 땅을 사분하여 하나를 지배하는 지배자 격의 언데드였다.

그런 존재를 복종시키는 것을, 제로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우선 발부터 묶고.”

스킬 발동, 망자의 행진.

콰드드득-!

스킬이 발동하며, 제로의 앞으로 수백, 수천의 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자들은 대지를 뒤엎으며 행진을 시작해, 제로를 향해 달려드는 본 드래곤을 덮쳤다.

[크아악-!]

본 드래곤이 전신을 뒤덮은, 수많은 망자에 괴성을 내질렀다.

“소용없어.”

제로는 몸을 뒤흔들며 어떻게든 망자들을 떨어트리기 위해 노력하는 본 드래곤을 향해 중얼거렸다.

허나 그것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제로의 명령에 달라붙은 망자들은 끈끈이라도 바른 듯, 본 드래곤이 아무리 격하게 움직여도 떨어질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스킬 발동, 망자의 폭발.

콰가강-!

본 드래곤에 달라붙어 있던 망자들이 폭발했다.

수백의 망자들이 한 번에 터진 폭발력은 상당했고, 그러한 폭발에 휘말린 본 드래곤은 육중한 몸을 휘청거렸다.

그러한 본 드래곤을 이루는 뼈는 이곳저곳 금이 갔으며, 폭발에 의한 그을음이 묻어나왔다.

[크르르….]

쿵-.

본 드래곤이 낮은 울림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제아무리 본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수백의 망자들이 만들어 낸 폭발은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제로는 그런 본 드래곤의 앞으로 걸어 나가며 입을 열었다.

“복종할래? 뒤질래?”

[크륵….]

제로의 질문에 본 드래곤이 다시 한번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제로의 눈앞에 하나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죽음의 땅 북쪽의 지배자, 본 드래곤의 지배권을 획득하였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