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하는 네크로맨서-96화 (96/200)

제96화

스윽.

붉은 로브를 뒤집어쓴 괴인이 후드를 젖혔다.

가려진 후드 속에서 드러난 것은 한 명의 엘프였다.

그는 레드 드래곤 게르슈드리와 마찬가지로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평범한 엘프와는 다르게 그는 검은 피부를 가진 다크 엘프였다.

“아, 생각났다! 레드 드래곤 게르슈드리의 가디언, 엘로우.”

엘로우.

레드 드래곤 게르슈드리의 수많은 가디언들 중, 유독 이질적인 존재였다.

설정으로는 속해 있던 부족이 인간들에 의해 멸망 당하고, 복수를 위해 다크 엘프로 타락한 존재.

그렇게 인간들을 죽이고 다니다 게르슈드리의 눈에 띄어 가디언이 되었다고 한다.

게르슈드리의 가디언들 대부분이 ‘창조된 것들’이라면, 엘로우는 유일하게 ‘스카웃’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엘로우의 특기는 암살이었으며, 게르슈드리가 개조에 개조를 거쳐 불 속성의 마법 또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설마 네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내가 타락한 다크 엘프라고는 하나, 엘프는 엘프.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을 모독하는 네놈의 존재는 용서할 수 없다.”

제로의 말에 엘로우가 으득! 이를 갈았다.

확실히 다크 엘프라도 엘프는 엘프인 것일까.

자연 파괴자 칭호의 페널티는 엘로우에게도 적용되는 듯 보였다.

“그래서, 너도 불의 상급 정령처럼 죽고 싶다고?”

제로가 엘로우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뭐, 정확히 말해서 불의 상급 정령은 죽지 않았다. 그저 극심한 타격을 입어 정령계로 역 소환되었을 뿐이다.

엘로우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격에 불의 상급 정령을 역 소환시킨 제로의 강함에 다소 신중한 표정을 내비쳤다.

“뭐, 상관없겠지. 그나저나 벌써 몇 번째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시간이 없거든? 그러니 덤비려면 빨리 덤…!”

스칵-!

말을 하던 제로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제로의 머리가 있던 허공에 불꽃의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이게 가장 까다로웠지.’

회귀 전에 꾸렸던 레이드 파티도 엘로우에게 번번이 막혔었다.

엘로우는 다크 엘프 특유의 암살술과, 게르슈드리에게 강제로 부여받은 불꽃의 마법을 적절히 뒤섞어 사용했다.

특히나 방금 전,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던 불꽃의 칼날은 엘로우가 가장 애용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마력을 불꽃으로 변환시킨 그것은 강철조차 수 초 만에 녹일 정도의 열기를 자랑했으며, 어지간한 명검 이상의 날카로움을 지녔기 때문이다.

‘저 불꽃의 칼날에 탱커들이 썰려 나갔었…!’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제로가 다시 한번 몸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제로가 서 있던 공간에 다수의 불꽃의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네놈만큼은 절대 용서 못 한다.”

“아직도 네놈이 엘프라고 생각하는 거야?”

적의로 불타오르는 눈을 한 엘로우에 제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엘로우의 강함이 상당히 까다롭기는 해도….

‘그것도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야.’

과거, 엘레멘탈 워리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충분히 엘로우 또한 제압할 수 있었다.

한편 엘로우는 자신을 향해 비꼬듯 말하는 제로에 으득! 이를 갈며 움직였다.

제로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그 모습은 흔히 육상 경기에서 볼 수 있는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였는데, 그런 자세를 취하기 무섭게….

화륵-!

움직인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엘로우의 신형이 한 줌의 불꽃으로 산화하며 사라졌다.

“소용없어.”

엘로우가 사라지는 순간, 제로는 네크로노미콘을 펼치며 마법을 사용했다.

스킬 발동, 데스 본 실드.

스킬 발동, 인첸트-아이언.

쩌엉-!

제로의 등 뒤로 강철의 속성이 깃든 흑골의 방패가 나타나는 순간, 거대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한 흑골의 방패에는, 언제 움직인 것인지 제로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엘로우가 휘두른 불꽃의 칼날이 틀어박혀 있었다.

“칫.”

기습에 실패한 엘로우가 낮게 혀를 차며 움직였다.

다시 한번 그의 신형이 한 줌의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소용없다니깐.”

제로는 사라진 엘로우를 향해 쯧쯧 혀를 찼다.

엘로우의 저 은신술은 얼핏 보면 마법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과거에는 마법적 은신을 탐지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했으나, 단 한 번도 엘로우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럴 만하지.’

그때의 일을 떠올린 제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우의 저 은신술은 마법이 아니었다.

엘로우의 은신술은 그것보다 더욱 단순한, 그저 스스로의 모든 것을 극한까지 죽임으로써 타인의 인식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최상위 유저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지언정, 제로의 눈을 피하지는 못한다.

제로의 공허한 눈구멍에 자리 잡은 사신의 흉안은 대상의 ‘생명’을 들여다본다.

생명을 품지 못한 무생물이라면 몰라도, 생명을 품고 있는 엘로우는 제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나의 눈을 피할 수 없어.”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죽음의 탁류가 휘몰아쳤다.

그에 제로의 정면에서 기습을 가하려던 엘로우가 ‘큭!’ 하는 낮은 신음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아직 멀었어.”

스킬 발동, 역병의 화살-부패.

후웅-!

퍼억-!

제로의 손 위로 만들어진 초록빛 화살이 쏘아졌다.

그것은 살점과 근육, 피부. 나아가 뼈까지 부패시켜 버리는 역병의 집합체였는데, 그러한 화살이 엘로우의 허벅지를 관통하며 사라졌다.

“큭-!”

엘로우는 역병의 화살에 관통되기 무섭게 점차 부패되어 떨어져 나가는 살점과 피부 따위에 인상을 찌푸렸다.

“과연, 그분께서 네놈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가 있었군. 하지만.”

스킬 발동, 화령체.

화륵-!

스킬을 발동한 엘로우의 육체가 선홍빛 불꽃에 휩싸였다.

그 불꽃은 은신을 할 때와 다르게 꺼지지 않고 도리어 영역을 확장하며 엘로우의 전신을 뒤덮었다.

“벌써 그걸 꺼내는 거냐?”

제로는 전신이 불꽃으로 물든 엘로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스킬, 화령체.

육체를 불꽃 그 자체로 바꾸는 스킬로, 어떻게 보면 불의 정령과 비슷한 상태였다.

다만, 불의 정령이 극심한 타격을 입으면 정령계로 역 소환된다면, 화령체를 발동한 엘로우는 ‘미약한 불꽃’만 존재한다면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으로 재생할 수 있었다.

회귀 전, 그런 엘로우의 모습을 봤던 한 랭커는 ‘저런 사기캐를 봤나!’라며 외치기도 했었다.

특히나 화령체의 까다로운 점은 한번 발동하면 육체에 깃든 모든 부정한 것들, 디버프 따위를 지워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화령체가 발동한 엘로우의 체내에는 제로가 쏘아낸 역병의 화살-부패의 효과가 완전히 사라졌다.

“칫. 까다롭기는.”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것을 칭찬해…!”

“네놈 칭찬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냥 죽으라고. 나 시간 없다고.”

스킬 발동, 사신의 시선.

번쩍-!

제로의 등 뒤로 사신의 흉안이 흉흉한 안광을 흩뿌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전, 불의 상급 정령을 한 번에 역 소환시킨 사신의 흉안이 나타나자 엘로우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사신의 흉안을 노려보며 양팔을 펼쳤고, 그에 그를 중심으로 불꽃이 휘몰아치며 수십, 수백 개의 화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에겐 통하지 않는다!”

화르륵-!

퍼버벅!

손가락을 까딱하자 수백 개의 불꽃의 화살이 쏘아지며 사신의 흉안에 틀어박혔다.

불꽃의 화살이 틀어박힌 사신의 흉안은 명계의 냉기를 품은 시선 한번 발산하지 못하고 한 줌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쯧.”

제로는 사신의 시선이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막히자 혀를 찼다.

뭐, 그래 봤자….

“널 죽일 수단이 이것밖에 없는 건 아니거든. 우선은….”

스킬 발동, 명계의 사슬.

제로의 발밑에서 명계의 냉기를 품은 사슬이 튀어나왔다.

수십 개의 사슬은 기기묘묘한 궤도로 움직이며 사방에서 엘로우를 압박했다.

한편 수십 개의 명계의 사슬에 포위당한 엘로우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명계의 사슬을 바라봤다.

사신의 시선은 발동되기 전 재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명계의 사슬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대한 명계의 냉기를 품고 있으며, 사슬 자체도 상당히 단단했다.

제아무리 엘로우라 하더라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제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날 우습게 보지 마라!”

푸확-!

버럭 외친 엘로우의 불꽃이 점차 푸른빛으로 물들어 가며, 그 화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딛고 있던 대지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 용암이 되었는데, 그 압도적인 열기는 명계의 사슬마저 주춤하게 만들었다.

“미치겠네.”

제로는 완전히 푸른 불꽃으로 뒤바뀐 엘로우에 인상을 찌푸렸다.

푸른 불꽃을 꺼내기 전, 최대한 빨리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그것이 늦어 버렸다.

이대로 간다면 엘로우와의 전투는 더욱 길어질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구상하고 있던 계획이 틀어질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제로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오버 데스가 되어 페널티는 사라졌다지만…, 그래도 하고 나면 상당히 피곤한데. 어쩔 수 없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제로가 엘로우를 바라봤다.

푸른 불꽃으로 뒤바뀐 엘로우는 다시 한번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취하며 제로를 노려봤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라.”

스킬 발동, 사신화.

과거 무색의 성자 베이글을 상대할 때 사용했던 스킬, 사신 강림. 그것이 오버 데스가 되면서 강화되어 사신화라는 스킬이 되었다.

사신화가 발동하자 제로를 중심으로 죽음으로 이루어진 안개가 퍼져 나갔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네크로노미콘은 어느새 거대한 죽음의 대낫, 데스 사이드가 되었다.

다만 머리에는 이미 죽음의 왕관을 쓰고 있기 때문인지, 사신 강림을 사용했을 때 만들어졌던 왕관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너, 넌 도대체 무엇…!”

완연한 사신의 모습이 된 제로에 엘로우가 당황하며 외쳤다.

짙은 죽음을 흩뿌리며 거대한 대낫, 데스 사이드를 쥔 제로는 ‘생명’을 품은 모든 존재에게 공포를 품게 만든다.

그것은 필멸자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공포였다.

“이만 끝내자.”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한 제로가 데스 사이드를 휘둘렀다.

데스 사이드는 천천히. 마치 사신이 선물하는 단두대와 같이 엘로우의 생명을 노리며 떨어졌다.

엘로우는 주변을 잠식한 죽음에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며, 제로가 휘두른 데스 사이드에 생명을 잘려 죽음을 맞이했다.

아니, 맞이했어야 했다.

막 제로가 휘두른 데스 사이드가 엘로우의 목. 정확히는 생명을 잘라 버리려는 순간….

“거기까지.”

촤라락-!

사방에서 불꽃으로 이루어진 사슬이 튀어나와 데스 사이드는 물론, 제로의 육신마저 휘감으며 포박했다.

불꽃의 사슬에 포박당한 제로는 천천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런 제로의 두 눈에 내비쳐진 것은….

“시련은 통과했으니 그쯤 하지?”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선홍빛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니고, 선홍빛 드레스를 걸친 미녀, 레드 드래곤 게르슈드리.

그녀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로는 그런 게르슈드리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레드 드래곤 게르슈드리.”

오싹-!

조용히 퍼져 나가는 제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엘로우는 물론. 주변에 있던 스로우와 드워프들까지 정신과 영혼을 엄습하는 공포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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