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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95화 (95/200)

제95화

스킬 발동, 데스 그라운드.

끼아아아악-!

제로를 중심으로 귀곡성이 울려 퍼지고, 딛고 있던 대지가 빠르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데스 그라운드에 들어선 몬스터들 또한 빠르게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역시나 최흉의 사냥터라 불리는 드래곤 산맥의 몬스터인 것일까.

의외로 데스 그라운드에 의해 죽어 나가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적었다.

허나 비록 살아남았다고 해도….

‘멀쩡한 것은 아니지.’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데스 그라운드 위에서 살아남았다 한들, 몬스터들의 상태가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적을 ‘죽이는 것’은 데스 그라운드의 부가적인 효과일 뿐, 그것의 진정한 힘은 온갖 종류의 디버프를 통한 약체화였다.

그 증거로 미친 듯이 달려드는 몬스터들의 기세가 한풀 꺾여 버렸다.

“모조리 쓸어버려.”

키기기기긱!

끼하하하-!

꺼흐흑.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망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을 향해 수천, 수만의 망자들이 움직이는 그 모습과 기세는 마치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 정도면 잡몹 처리는 얼추 되었고.”

중얼거린 제로는 주변을 훑어봤다.

스로우는 본인이 제작한 골렘들과 함께 몬스터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드워프들 또한 스스로가 만들어 낸 각종 장비들을 통해 몬스터들의 침공을 막아 내고 있었다.

압도적인 기세로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는 그 모습은, 딱히 제로의 개입이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저놈들을 처리하면 되겠네.”

제로의 시선이 몬스터 대군의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아홉 개의 머리를 달고 있는 괴물, 히드라와 드래곤의 하위 호환이라 불리는 드레이크. 마지막으로 불의 상급 정령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상당히 강력한 몬스터들이다.

다만, 개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것은….

‘역시 불의 상급 정령이려나.’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종의 정신체에 속하는 정령은 평범한 물리 공격을 모조리 무시한다.

또한 상급 정령이라면 본인이 속해 있는 속성과 관련된 공격 또한 무시하는 성질을 지녔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유저는 정령을 사냥하는 것을 상당히 꺼렸다.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을 때, 돌연 불의 상급 정령과 눈이 마주쳤다.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는 불의 상급 정령은 제로와 마주치기 무섭게 날카로운 엄니를 드러내며 적의를 발산했다.

‘그럴 줄 알았다.’

제로는 유독 자신에게만 강한 적의를 드러내는 불의 상급 정령에 피식 웃었다.

드워프 마을을 습격하는 몬스터들은 모두 레드 드래곤 게르슈드리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단 하나, 불의 상급 정령만은 스스로 자진해 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제로가 가지고 있는 칭호, 자연 파괴자 덕분이었다.

초창기에 한 번에 많은 악명을 구하기 위해, 제로는 6번째 마을의 옆에 자리 잡은 울창한 숲을 태워 버렸다.

그때 제로는 자연 파괴자라는 칭호를 획득했는데, 그 칭호의 페널티 중 하나가 엘프와 정령, 요정족과의 친밀도가 최악으로 고정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언데드를 혐오하는 정령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굳이 그러한 칭호가 없다 하더라도 자진해서 전장에 나왔을 것이다.

‘어떡할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제로는 슬쩍 스로우를 바라봤다.

스로우는 현재 전장의 최전방에서 몬스터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제아무리 스로우라 하더라도 최상위 몬스터들의 합공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내가 처리해야겠네.’

불의 상급 정령이 다소 까다롭긴 해도, 죽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시간이 얼마 없는 만큼, 차라리 자신이 나서서 저놈들을 쓸어버리는 편이 시간 단축에 유용했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네크로노미콘을 움켜쥔 제로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자.

제로를 응시하고 있던 히드라와 드레이크. 그리고 불의 상급 정령 또한 움직였다.

* * *

제로와 히드라. 드레이크와 불의 상급 정령이 움직이자 전장에 하나의 길이 만들어졌다.

한데 뒤엉켜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망자와 몬스터들이 그들이 내뿜는 존재감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것은 스로우와 골렘, 드워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스로우는….

‘이 정도였다고?’

제로가 내뿜는 존재감을 느끼며 충격에 빠진 표정을 내비쳤다.

자신과 싸울 때, 제로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던 스로우였다.

하지만 설마하니 자신과 제로 사이에 이 정도로 거대한 격차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한편, 그렇게 앞으로 걸어 나온 제로는 가장 먼저 히드라를 바라봤다.

“우선 너부터. 내가 뱀 대가리를 싫어하거든.”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는 히드라를 향해 내뻗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퍼버벅-!

혀를 날름거리며 제로를 바라보는 히드라의 아홉 개의 머리 중, 여섯 개가 동시에 터져 나갔다.

이렇다 할 스킬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저 죽음을 컨트롤해, 히드라의 머리에 거대한 압력을 주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히드라의 단단한 머리뼈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크륵-?

크르르륵!

키아아악!

살아남은 세 개의 머리는 여섯 개의 머리가 동시에 터져 나가자, 당황과 적의를 동시에 들어내며 제로를 향해 돌진했다.

쿵! 쿵!

히드라가 육중한 다리를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대지가 진동했다.

그렇게 움직이는 히드라는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은 날렵함을 선보이며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소용없어.”

스킬 발동, 데스 홀.

스킬이 발동하며, 히드라가 딛고 있던 대지에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이 만들어졌다.

크아아아!

크라라락!

키아악!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의 나락을 향해 떨어지는 히드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드레이크와 불의 상급 정령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그와 동시에 드레이크는 날개를 이용해, 불의 상급 정령은 정령의 특징을 이용해 하늘 높이 떠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히드라처럼 당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뭐, 그럴 줄 알았다.”

제로는 하늘에 떠올라 자신을 노려보는 드레이크와 불의 상급 정령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내비쳤다.

애초에 제로 또한 데스 홀로 저 둘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비행 수단이 없고, 막강한 재생력을 가진 히드라를 처리하기 위해 데스 홀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후웅-!

퍼억!

크아아아악-!

제로의 등 뒤로 거대한 흑골의 창이 만들어지며 드레이크의 날개를 꿰뚫었다.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드레이크는 비명과 함께 떨어져 바닥과 충돌했다.

크르르….

낙하로 인한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드레이크를 향해 제로의 공격이 쏟아졌다.

스킬 발동, 노화의 역병.

스킬 발동, 역병-페스트.

스킬 발동, 데스 에로우.

스킬 발동, 망자의….

제로의 발밑으로 페스트 역병을 품은 쥐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뒤로 닿는 모든 것을 노화시키는 역병의 가루와, 흑골로 이루어진 다양한 공격들이 쏟아졌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제로의 공격은 드레이크에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로 인해 양쪽으로 갈라져 있던 몬스터들은 제로의 공격에 휩쓸려 비명조차 내뱉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드레이크 또한….

크아아아악-!

쏟아지는 공격과, 육체를 침식해 들어오는 온갖 종류의 역병들에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생을 마감했다.

“자 이제 너만 남았어.”

히드라를 포함해 드레이크마저 손쉽게 처리한 제로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에 불타오르는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던 불의 상급 정령이 크르르…, 하는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제로는 자신을 경계할 뿐, 쉽사리 움직일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 불의 상급 정령에 입을 열었다.

“벌써 몇 번째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시간이 없거든? 그러니 후딱 끝내자.”

스킬 발동, 더미 블링크.

파앗-!

제로의 신형이 환한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제로가 사라진 장소에는 단순한 더미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으며, 그렇게 사라진 제로가 다시 나타난 장소는 불의 상급 정령의 뒤였다.

흠칫-!

불의 상급 정령은 자신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죽음에 몸을 떨며 움직였다.

크앙-!

등 뒤로 고개를 돌린 불의 상급 정령이 하울링을 토해 내며 입을 쩍 벌렸다.

제로를 향해 벌려진 불의 상급 정령의 입에선 초고온의 불꽃이 넘실거리는 파도와도 같이 뿜어져 나왔다.

“소용없어.”

스킬 발동, 데스 본 실드.

화르륵-!

제로의 앞을 가로막는 흑골의 방패에, 초고온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양옆으로 갈라졌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라 생각했던 불의 상급 정령은 그 모습에 당황한 표정을 내비쳤다.

“정령이 까다롭기는 한데, 솔직히 날 죽이려면 정령왕이라도 튀어나와야 하거든.”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는 불의 상급 정령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니 너도 사라져라.”

스킬 발동, 사신의 시선.

번쩍-!

제로의 등 뒤로 사신의 눈동자가 나타나며 안광을 흩뿌렸다.사신의 시선에 닿은 불의 상급 정령은 겉에서부터 천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것의 육체는 불꽃 그 자체라 할 수 있으나, 사신의 시선이 품은 명계의 냉기는 모든 것을 얼려 버렸다.

크앙!

크아아앙!

육체가 얼어붙자 불의 상급 정령이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자연을 파괴한 자를 용서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진해서 전장으로 나선 불의 상급 정령이다.

처음 전장에 나섰을 때만 해도, 불의 상급 정령의 마음은 자신감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감히 자연을 파괴한 자를 제 손으로 처단하는 것에 한 줌의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신의 시선에 얼어붙으며, 점차 대지를 향해 추락하는 불의 상급 정령은 전장에 나온 것을 후회했다.

상대는 자신 따위가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히드라와 드레이크. 그리고 불의 상급 정령마저 순식간에 죽어 버리자, 몬스터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드워프와 스로우, 망자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몬스터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한편, 하늘 위에 떠 있는 제로는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언제 움직일 거냐?”

제로의 등 뒤에는 붉은 로브를 뒤집어쓴 존재가 서 있었다.

* * *

“이제는 결정하셔야 합니다, 대통령님.”

“으음….”

청와대 회의실에 앉아 있던 대통령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며칠 전, 스스로를 제로라 칭한 존재와의 만남 이후에도 한국 곳곳에서 허상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처음과 비교해 무척이나 적었지만, 그럼에도 국가와 국민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대통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로스트 월드의 랭커들을 찾아 연락하세요. 어떻게든 그들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대통령의 말에 모여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제로. 그를 찾으세요.”

제로.

머지않은 미래에 허상계와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 말했던 존재.

그리고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허상괴에 대해 자세히 알려 준 존재.

대통령은 반드시 그를 찾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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