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잠…!”
퍼엉-!
다급히 입을 열던 제로가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제로의 머리가 있던 자리가 터져 나갔다.
‘미치겠네.’
제로는 문답무용으로 덤벼 오는 스로우에 인상을 찌푸렸다.
스로우와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이런 식으로 나올 것임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럴 시간이 없는데!’
이제는 말 그대로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이다.
괜한 헛짓거리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그러나 상황을 모르는 스로우는 제로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깐 내 말 좀 들으라고!”
스킬 발동, 명왕의 손아귀.
제로를 향해 달려드는 스로우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졌다.
마법진에서 명계의 냉기를 품은 거대한 뼈의 손이 튀어나와 스로우를 낚아챘다.
아니, 낚아채려 했다.
“이 정도쯤은!”
스킬 발동, 파괴의 일격.
쿠웅-!
스로우의 주먹이 명왕의 손아귀를 강타했다.
둘의 충돌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사방으로 충격이 퍼져 나갔다.
“칫.”
제로는 너무나도 손쉽게 명왕의 손아귀를 부숴 버리는 스로우에 혀를 찼다.
스로우의 피지컬과 재능을 생각해 본다면 강할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특히나 스로우는 최흉의 사냥터라 불리는 드래곤 산맥에서 사냥을 하고, 나아가 레드 드래곤 게르슈드리에게마저 도전하려 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간다.’
생각을 마친 제로의 분위기가 변했다.
차라리 진심을 내비쳐, 최대한 빨리 스로우를 제압하는 편이 좋았다.
“지금부터는 다를 거다.”
‘분위기가 변했어.’
자신을 향해 말하는 제로에 스로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한 중얼거림을 내뱉는 스로우의 두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스킬 발동, 명계의 사슬.
촤르륵-!
제로의 발밑으로 수십 개의 사슬이 튀어나왔다.
사슬 하나, 하나가 강철을 뛰어넘는 단단함을 가지고 있으며, 명계의 냉기마저 품었다.
그러한 사슬 수십 개가 스로우의 전신을 휘감았다.
“흡!”
수십 개의 명계의 사슬에 휘감긴 스로우가 낮은 기합성을 토해 냈다.
그에 스로우의 전신이 백금색으로 물들고….
“합-!”
스로우가 다시 한번 기합성을 터트리자, 스로우의 전신을 휘감은 명계의 사슬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져 버렸다.
“고작 이 정도로 날…!”
“잡을 수 없는 거 알아.”
명계의 사슬을 부숴 버린 스로우가 기세등등하게 말하는 순간, 제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스로우의 가슴에 거대한 흑골의 창이 틀어박혔다.
“커헉-!”
거대한 흑골의 창, 데스 본 스피어에 얻어맞은 스로우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수십 미터를 날아가고 나서야 겨우 착지할 수 있었던 스로우의 가슴에 미세한 금이 그어졌다.
“아직 멀었어.”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우웅-!
콰가가강!
제로의 앞으로 죽음의 탁류가 휘몰아쳤다.
그것은 방사형으로 퍼져나가 스로우를 덮쳤는데, 그에 스로우는 전신을 뒤흔드는 죽음의 탁류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웃… 기지 마!”
스킬 발동, 강철의 피부.
스로우의 육체가 다시 한번 백금색으로 물들었다.
육체를 백금색으로 물들인 스로우는 힘으로 데스 웨이브를 돌파하며 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함-!”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도착한 스로우가 주먹을 내뻗었다.
강력한 힘이 깃든 스로우의 일격을 제로는 몸을 던져 피해 냈다.
쾅-!
스로우의 주먹이 바닥과 충돌하며 사방으로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칫!”
상대는 분명 마법사다.
그럼에도 스로우는 속도에서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
스킬 발동, 강철의 거인.
쿠르르-!
제로를 바라보며 스로우가 스킬을 발동했다.
스로우가 딛고 있던 대지가 우르르 떨리며, 스킬 명 그대로 강철의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골렘.”
제로는 스로우의 발밑에서 몸을 일으키는 강철의 거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골렘.
나무로 만들어진 우드 골렘부터,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쥬얼 골렘까지.
그 종류도 수십 가지나 되는 골렘 중, 스로우가 소환한 것은 강철로 이루어진 아이언 골렘이었다.
허나 아이언 골렘이 강하긴 하지만 그것은 저레벨 유저들의 이야기다.
어지간한 고레벨 유저들이라면 손쉽게 부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이언 골렘이었다.
“평범한….”
“평범한 아이언 골렘이겠냐.”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제로에 스로우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강철의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대지가 울렸다.
덩치가 덩치이다 보니, 채 몇 걸음 걷지 않았음에도 강철의 거인은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도착했다.
“죽여.”
어깨에 올라탄 스로우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강철의 거인의 육중한 주먹이 제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이언 골렘답지 않은 거력이 실린 그것은, 고레벨 유저라 하더라도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아이언 골렘이지.”
스킬 발동, 망자의 거신병.
쿠웅-!
제로의 발밑으로 거대한 망자가 몸을 일으키며 강철의 거인의 주먹을 막아 냈다.
거인에는 거인.
스로우가 일으킨 강철의 거인은, 제로가 일으킨 망자의 거신병과 얽히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한 두 거인이 한 번, 한 번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주변의 대지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한편, 강철의 거인이 망자의 거신병과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스로우는 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합-!”
짧은 기합성을 터트린 스로우의 몸뚱어리가 쭉 늘어나며 제로를 향해 쏘아졌다.
“죽어.”
스킬 발동, 파괴의 일격.
구우우우웅.
스로우가 주먹을 쥐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스킬, 파괴의 일격.
스로우를 붙잡기 위해 사용했던 명왕의 손아귀를 단번에 부숴 버린 스킬이다.
명왕의 손아귀는 뼈로 이루어져 있지만, 괜히 ‘명왕’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부수기 위해선 상당한 힘이 필요한데, 그러한 것을 부숴 버린 파괴의 일격은….
‘나에게도 살짝 위험하다 이거지.’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가 네크로노미콘을 펼쳤다.
펼쳐진 네크로노미콘은 파라랏!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페이지가 넘어가다 멈췄다.
그와 동시에….
스킬 발동, 망자의 역린.
제로를 중심으로 수십의 망령이 튀어나와 뭉치고, 얽히며 창으로 변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창, 망자의 역린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스로우를 향해 쏘아졌다.
콰가가강-!
“큭!”
망자의 역린에 얻어맞은 스로우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나마 골렘의 단단한 몸뚱어리 덕분에 살아남았을 뿐, 만일 다른 유저였다면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억지로 망자의 역린을 돌파한 스로우는 제로의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주먹을 내뻗었다.
“죽어!”
후우우웅-!
묵직한 파공음을 동반한 스로우의 주먹이 제로의 안면을 강타했다.
아니, 강타하려 했다.
아무리 망자의 역린에 의해 위력이 줄어들었다 한들, 그마저도 위험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맞았을 때의 이야기.’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는 스로우의 주먹이 강타하기 직전, 더미 블링크를 통해 몸을 빼냈다.
스로우의 파괴의 일격은 단순한 더미를 지워 버리고, 몸을 빼낸 제로가 나타난 장소는 그런 스로우의 등 뒤였다.
“칫-!”
“좀 가만히 있어라.”
스킬 발동, 사신의 시선.
번쩍-!
쩌저적!
제로를 향해 다급히 몸을 돌리던 스로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니, 얼어붙었다.
제로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낸 사신의 눈동자가 흉흉한 안광을 번뜩이는 순간, 스로우는 몸을 돌리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큭!”
제로는 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는 스로우의 앞에 멈춰 서며 입을 열었다.
“진정 좀 하고, 대화나 좀 하지?”
* * *
“그러니깐, 네 말은 현실에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끄덕.
“로스트 월드에서의 힘을 현실에서도 사용할 수 있고?”
끄덕끄덕.
제로는 이어지는 스로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로우는 그런 제로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같….”
“네가 믿고 안 믿고의 상황이 아니라니깐, 이 폐인 자식아.”
제로는 스로우의 반응에 하…, 하며 깊은숨을 토해 냈다.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스로우에 살짝 짜증이 밀려왔다.
특히나 지금 당장이라도 로월의 접속을 종료한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을, 왜 자신이 이렇게 고생해 가며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짜증 또한 섞여 있었다.
그나마 스로우의 강함이 허상계와의 전쟁에서 꼭 필요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제로는 이런 식으로 수고를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제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스로우가 입을 열었다.
“좋아, 믿어 주지.”
“그러니깐 믿고 안 믿고의 상황이 아니라…, 아니다.”
제로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반응이라도 보이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현실에서 괴물이 튀어나온 것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믿고 있다.
하지만 로스트 월드에서의 힘을 현실에서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다.
아니, 그러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로스트 월드에서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몇몇 랭커급 유저들뿐이기 때문이었다.
제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스로우가 제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현실에서 허상… 계? 그 괴물들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협력할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스로우의 말에 제로가 반문했다.
“아다만티움.”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거냐?’
제로는 스로우의 말에 하아…, 하며 깊은숨을 토해냈다.
아다만티움. 확실히 종족이 골렘이라면 포기할 수 없는 광물이다.
하지만 스로우 정도 되는 유저라면, 지금부터 단 한 번이라도 죽음을 맞이하면 크나큰 손실로 이어진다.
특히나 스로우 같은 이종족 플레이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렇기에 제로는 내심 스로우가 아다만티움을 포기하기를 바랐다.
허나 스로우는 아다만티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도리어 자신을 제압할 정도의 제로와 협력한다면 충분히 아다만티움을 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품었다.
“네가 아다만티움을 구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면, 현실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너에게 협력할게.”
다시 한번 이어진 스로우의 말에 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멍청이는 자신의 말을 들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지만.
스로우가 정말로 아다만티움을 구할 수만 있다면, 허상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올라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후, 알겠어.”
결국 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레드 드래곤 게르슈드리는 제로라 하더라도 현재는 이길 수 없는 강적.
그렇기에 제로는 레드 드래곤 게르슈드리와 거래를 통해 아다만티움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렇게 제로가 스로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골렘과 리치라니. 상당히 특이한 조합이네.”
오싹-!
머리 위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미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제로와 스로우는 동시에 몸을 빼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싹함이 엄습한 것이다.